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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이야기

통일신라 불교 구산선문 가지산문(迦智山門)

younghwan 2021. 4. 21.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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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선종(禪宗)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가장 먼저 선종을 이끌었던 가지산문(迦智山門)이다. 가지산문은 개창조인 도의(道義)가 784년 당에 유학하여 중국 선종을 이끌었던 혜능(惠能)이 머물렀던 보단사(寶檀寺)에서 선종을 배웠으며 821년 신라로 돌아와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에 머물면서 후학을 양성했다. 염거(廉居)는 설악산 억성사에 머물렀으며 선풍을 확산하였다. 홍척(洪陟), 체징(替徵)이 염거에게 선법을 배웠으며 체칭은 신라 왕실의 후원을 받아 전남 장흥 가지산 보림사에 머물면서 가지산문이 형성되었다. 체징은 많은 제자를 양성했으며 강진 무위사에 활동한 선각대사가 법통을 계승하였다. 고려초 선종은 일시 침체하였으나 12세기에 학일(學一)이 운문사에 머물면서 다시 부각되었으며 13세기 후반 일연(一然)가 가지산문을 이끌었다. 

선종은 중국 당나라에서 8세기 후반 등장하였다. 선종 수행자들은 스승에게 선(禪)을 배웠으며 점차 사제관계를 형성하면서 특정 사찰이 특정 일파에 계승되는 경항이 보이면서 교단을 형성하였다. 후대 선종계열 사찰에서는 불상이나 탑보다는 승려의 사리를 모신 승탑이 중시되는데 그 중 진전사지에 남아 있는 도의선사 승탑이 목조건축물을 모방한 한국적인 승탑의 시초로 여겨진다. 

<양양 진전사지 도의선사탑(보물 439호)>

설악산 진전사(陳田寺), 도의선사가 머물렀던 사찰

진전사(陳田寺)는 낙산사 부근으로 흘러 내려오는 물치천 상류 설악산 계곡에 자리잡고 있다. 절터에는 삼층석탑(국보 122호), 도의선사탑(보물439호)가 남아 있는데, 삼층석탑을 중심으로 한 아래 공간과 도의선사탑을 중심으로 한 위쪽 공간에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염거화상이나 보조선사와 같은 고승들이 이곳에서 배웠으며 <삼국유사> 지은 일연도 이곳에서 수행했다. 

<양양 진전사지 절터>
<진전사지 삼층석탑(국보 122호)>

염거(廉居, ~ 844년), 가지산문 2대 조사

염거는 도의(道義)의 제자로 설악산 억성사에 머무르면서 제자를 양성했다. 홍각선사(弘覺禪師) 이관(利觀)과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에 그에게 배웠다. 선(禪)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가 없던 시기에 선종을 크게 일으킬 기반을 마련하였다. 승탑은 원래 원주 흥법사에 있었다고 전한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염거화상탑(국보 104호)은 팔각형 평면에 3단의 기단과 탑신, 머리장식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승탑의 형태를 하고 있다. 기단부 아래받침돌에는 사자를 새겨 놓았으며, 가운데 받침돌에는 안상, 윗받침돌에는 연꽃과 다양한 조각상을 새겨 놓고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승탑으로 후대 승탑의 모범이 되었다. 

<염거화상탑(국보 104호)>

탑을 옮길 때 동제염거화상탑비(보물1871호)가 발견되었다. 금동으로 만든 판에 승탑의 조성 내력을 기록해 놓았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이 승탑이 통일신라 문성왕 6년(844)에 세워졌음이 밝혀졌다.

<동제염거화상탑비(보물1871호)>
<원주 흥법사지>

양양 선림원지(禪林院址) 절터, 염거화상이 머물렀던 억성사(億聖寺)로 추정되는 절터

강원도 양양군 미천골에 있는 선림원(禪林院)은 해인사를 창건한 순응법사가 창건한 화엄종계열 사찰이었으나 염거(廉居)와 홍각선사(弘覺禪師) 이관(利觀) 머물면서 선종계열로 바뀐것으로 보인다. 절터에는 삼층석탑을 중심으로 한 주불전 영역과 수행하던 승려들이 묵었던 건물터들이 있다.  현재는 삼층석탑(보물 제444호)과 승탑(보물 제447호), 석등(보물 제445호), 홍각선사비(보물 제446호)들이 남아 있다. 

<양양 선림원지>
<선림원지 삼층석탑(보물 444호)>

홍각선사 이관(利觀)은 염거의 문하에서 배웠으며 봉림산문 원감대사의 문하에서도 수학한 적이 있다고 한다. 억성사에 머물면서 헌강왕의 초청을 받아 설법하였다. 홍각선사 승탑가 탑비 절터에 남아 있는데 글자가 새겨진 비몸이 파손되어 그의 행적은 자세히 전하지 않고 있다. 

<홍각선사 승탑으로 추전되는 승탑(보물 447호)>
<홍각선사탑비(보물 446호)와 석등(보물 445호)>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 804 ~880년), 가지산문 3대조

보조선사 체징은 가지산문 제3조(祖)로 설악산 억성사에서 염거에게 선(禪)을 배웠다. 837년 중국으로 유학하여 선(禪)을 체계적으로 배웠다. 841년 귀국하여 여러 곳에 머물다 왕의 요청으로 장흥 가지산 보림사에 머물면서 선종을 크게 일으켰다. 그의 승탑과 탑비가 가지산 보림사에 남아 있다.

<보조선사탑(보물157호)>
<보조선사탑비>

장흥 가지산 보림사(寶林寺), 가지산문 중심 사찰

전남 장흥군 가지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보림사(寶林寺)는 가지산문 중심사찰이었다. 통일신라 말 중국에서 선종을 배운 체징이 헌안왕의 권유로 말년에 보림사 머물렀다. 보림사는 화엄종 사찰이었지만, 체징이 입적하면서 헌강왕에게 ‘보림사’라는 사호를 받았다. 보림사는 본래 중국 선종의 개창자인 육조 혜능이 주석하던 절의 이름과 같다. 신라 왕실과 귀족들의 후원을 받으면서 선종 사찰로 크게 번창하였다. 한국전쟁 이전 20여동 전각을 갖춘 큰 사찰이었으나 대부분 불타 버리고 최근에 중건하였다. 대적광전에는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1254호)을 모시고 있다. 

<가지산 보림사>
 <남.북삼층석탑과 석등(국보 44호)>
<대적광전>

대적광전에 모셔져 있는 철조비로자나불상(국보117호)은 통일신라 말에 조성된 철로 만든 불상이다. 광배와 대좌는 남아 있지 않고 불상만 남아 후대의 불상처럼 닫집에 모셔져 있다. 860년 귀족 김언경이 사재를 희사하여 조성하였다.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117호)>
<보림사 입구 동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동승탑(보물 155호)>
<보림사 서북쪽 1 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서승탑(보물 156호)>

청양 칠갑산 장곡사(長谷寺)

충안 청양군 칠갑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장곡사(長谷寺)는 보조선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사찰이다. 칠갑산 중턱 경사진 지형에 터를 잡고 전각들을 지었는데 상.하 대웅전이 있는 이원식(二院式)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장흥 보림사처럼 철조약사여래좌상(국보 58호)와 철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174호)이 있다. 보림사처럼 지역 유력자가 시주하여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칠갑산 장곡사 상 대웅전 영역>

상 대웅전 영역은 장곡사의 중심이 되는 공간으로 철조약사여래좌상(국보 58호)를 비롯하여 철조비로자불좌상(보물 174호), 철조아미타여래좌상을 모신 상 대웅전(보물 162호)를 중심으로  응진전,  요사채인 염화실을 두고 있으며 동쪽편 언덕에 금당과 삼성각을 배치하고 있다.

<장곡사 상 대웅전(보물 162호)>
<철조약사여래좌상(국보 58호)
<철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174호)>
<장곡사 하 대웅전 영역>

선각대사(先覺大師) 형미(泂微, 864~917년)

선각대사 형미는 보림사에서 보조선사의 제자이다. 891년 당나라에 유학하고 귀국하여 강진 월출산 무위사(無爲寺)에서 머물렀다. 후에 궁예의 박해를 받아 처형되었다고 한다.  사후에 고려 태조는 '선각'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편광탑(遍光塔)'이라 하였다. 선각대사탑비(보물 507호)는 조각수법이 사실적이면서 섬세한 동시대를 대표하는 걸작 중 하나이다. 고려초 문장가 최언위가 비문을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선각대사탑비(보물 507호)>

강진 월출산 무위사(無爲寺)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출산 자락에 있는 무위사(無爲寺)는 조선전기 불교건축을 대표하는 주불전인 극락보전(국보 13호)으로 유명한 사찰이다.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통일신라 말 선각대사가 중창하였으면 보림사와 함께 지역을 대표하는 선종 사찰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죽은이의 영혼을 위로하는 수륙재가 유명한 사찰이었다고 한다. 

<강진 월출산 무위사>
<무위사 극락보전(국보 13호)>

원응국사 학일(圓應國師 學一), 고려시대 가지산문을 이끌었던 승려

원응국사 학일(圓應國師 學一, 1051 ~ 1144년)은 송나라에 유학하였으며, 의천이 천태종을 개창할 때 선종을 지켰다고 한다. 법주사, 구산사 주지 등을 역임했으며 운문사에 머물다 1144년 93세로 입적하였다. 그의 사후 인종은 그를 국사로 책봉하고 비를 세우게 하였다. 

<청도 운문사 원응국사탑비(보물 316호)

청도 운문산 운문사(雲門寺)

경북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운문산(해발 1,188 m) 북쪽 계곡에 있는 운문사(雲門寺)이다. 삼국시대 신라 진흥왕 때 한 신승이 이곳에 대작갑사(현 운문사)를 비롯하여 5개의 사찰을 창건하였다. 진평왕 때 화랑 세속오계를 지은 원광이 크게 중건하였다. 고려말 고려 태조왕건을 도왔던 보양이 다시 크게 중창하였으며 이때 국왕으로 부터 ‘운문선사’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고려초 숙종 때 학일 이곳에 머물서 크게 중창하였고, 일연은 이곳에서 머물면서 삼국유시 집필을 시작하였다. 

<청도 운문사>
<운문사 비로전 영역>
<운문사 동.서삼층석탑(보물 678호)>

<삼국유사>의 저자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

일연(一然)은 13세기 이후 고려의 선종을 이끌었다. 1219년 설악산 진전사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여러 선문(禪門)을 방문하면서 수행하였다. 대몽항쟁기에 강화도 선월사에 머물면서 설법하였다. 충렬왕 때 청도 운문사에 머물면서 선풍을 크게 일으키고 <삼국유사>를 집필하기 시작했으며 말년에 군위 인각사(麟角寺)에서 입적했다.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탑(보물 418호)

보각국사탑비(보물 418호)에는 일연의 행적과 비를 세운 경위, 제자들의 이름 등을 새겨 놓았다. 중국에서 직접 왕희지 글자를 집자하여 글을 새겼으며 당대 문장가인 민지가 비문을 지었다. 왕희지의 글씨를 얻기 위해 수많은 탁본이 만들어졌고 그 과정에서 비가 크게 훼손되어 일부만 남아 있다. 원본은 옛 탁본을 통해 알아볼 수 있다.

<보각국사탑비(보물 418호)>

군위 인각사(麟角寺)

경북 군위군 고로면에 있는 인각사지(사적 374호)는 일연이 머물면서 <삼국유사>를 저술한 장소로 잘 알려져 있다. 사찰입구에 우뚝 솟은 큰 바위가 기린의 뿔을 닮았다고 하여 인각사(麟角寺)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삼국시대에 처음 창건하였다고 하며 발굴.조사결과 고려시대에 절을 크게 중수하면서 건물의 위치가 바뀌었다고 하며 조선중기까지 큰 사찰이었나 이후 폐사되어 최근까지 극락전과 작은 요사채 만 있었다고 한다. 

<군위 인각사지>
<삼층석탑과 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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