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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이야기

통일신라 불교 구산선문 사자산문(獅子山門)

younghwan 2021. 5. 26.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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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선종(禪宗)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사자산문(獅子山門)이다. 통일산라 말 철감선사 도윤(道允, 798 ~ 868년)이 처음 열었다고 하나 실제로는 그의 제자 징효 절중(折中, 826 ~ 900년)에 의해 산문이 형성되었다. 도윤은 28세 때 당나라에 들어가 22년간 머물며 선법(禪法)을 배웠으며 당나라 회창폐불로 847년에 귀국하여 선법을 베풀었다. 금강산에 머물다 말년에 화순 쌍봉사에서 머물다 입적했다. 징효대사 절중은 금강산에서 철감선사에 선법을 배웠으며 전국 각지를 유랑하면서 수행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사자산문의 대표적인 사찰로는 영월 사자산 흥녕사(興寧寺), 화순 쌍봉사(雙峯寺) 등이 있다. 

<영월 흥녕사지 징효대사탑>
<영월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보물 612호)>

영월 사자산 흥녕사(興寧寺, 현 법흥사)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사자산 중턱에 위치한 법흥사(法興寺)는 옛 흥녕사(興寧寺)가 있던 곳으로 신라 자장율사가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이곳에 모시면서 창건하였다. 통일신라 말 징효대사가 머물면서 선종 구산선문(九山禪門) 사자산파 중심사찰로 발전시켰다. 통일신라말 진성여왕 때 전쟁으로 불타버리기 전까지 참선도량으로 크게 융성하였다. 고려초 중건되었으나 다시 화재로 불타버린후 폐사되었다가 일제강점기에 중건되면서 법흥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사찰규모가 크거나 문화재가 많은 곳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 중 한곳이자 통일신라 구산선문 중 사자산파를 열었던 유서깊은 사찰이다. 

<흥녕사 절터>

흥녕사는 고려초 화재로 소실된 후 천년이상 폐사된 상태로 남아 있다가 일제강점기에 법흥사로 이름을 바꾸면서 중건되었다. 법흥사는 절터 윗쪽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영월 사자산 법흥사>
<대웅전>

대웅전 뒷편에는 통일신라 말 구산선문 사자산파를 이끌었던 징효대사의 사리를 모신 승탑과 탑비(보물 612호)가 있다.  탑비는 거북받침돌에 비몸을 올려놓고 그 위에 머릿돌을 얹은 전형적인 당나라 비석 양식을 하고 있는데 징효대사가 입적한 후 44년이 지난 고려초(944년)에 세워졌다.

<징효대사탑과 탑비(보물 612호)>

법흥사 적멸보궁(寂滅寶宮)은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와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봉안한 곳에 세워진 불전이다. 자장율사가 도를 닦던 곳이라 전해지는 석굴과 주인을 알 수 없는 승탑이 있이 적멸보궁 뒷편에 있다. 오대산 적멸보궁과 마찬가지로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 진신사리를 봉안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법흥사 적멸보궁(寂滅寶宮)>

화순 쌍봉사(雙峯寺), 철감선사가 머물렀던 사찰

전남 화순군 이양면에 있는 쌍봉사(雙峯寺)는 통일신라 말 중국에서 선종을 공부하고 돌아온 철감선사가 머물렀던 사찰이다. 고려초에는 크게 쇠퇴했던 것으로 보이며 고려중기 혜소국사가 크게 중건하였으며 이후 조선시대에도 여러차례 중건이 있었다. 사찰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통일신라말 선종을 이끌었던 주요 사찰 중 한 곳이다.  사찰 뒷편에 있는 철감선사의 승탑(국보 57호)과 탑비(보물 170호)는 화려하면서 섬세한 조각수법과 조형미가 뛰어나 구례 연곡사 승탑과 함께 동시대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쌍봉사 철감선사탑(국보57호)>
<철감선사탑비(보물 170호)>

사찰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탑과 금당이 일렬로 배치된 전통적인 1탑1금당식 가람배치가 남아 있는 사찰이다. 마당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대웅전은 높이 12 m의 목탑 형식을 갖춘 불전으로 화재로 불타버리기 전까지 법주사 팔상전과 함께 사찰 건축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건물이었다. 주불전은 아미타여래를 모신 극락전이며 좌.우에 지장전과 호성전을 두고 있다. 

<화순 쌍봉사>
<쌍봉사 대웅전, 목탑형식을 하고 있다.>
<쌍봉사 극락전>
<쌍봉사 호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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