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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소르 신전을 입구를 장식하고 있는 람세스2세의 석상입니다. 신전탑문을 들어가는 문 양쪽에 위압적으로 앉아 있기때문에 저절로 경외심이 생기게 됩니다.
룩소르는 카라나크 최후의 성소, 왕의 힘이 의식을 통해 살아나는 '카'의 신전이다. "군주는 이집트의 모든 왕들이 공유하는, 군주에게서 군주로 전수되는 '카' 속에서 태어나 성장한다." 이 '카'는 대형 동상들로 구체화되는데, 이들은 어떤 개인의 초상이 아니라 창조적 힘이 돌로 구현된 것이다. 이 대형동상들은 바로 람세스2세가 세운 탑문앞에 있다. 좌대 위에 있는 9개의 아치는 이방 국가들 전체를 상징하며, 잠정적으로 위험한 존재들로 간주된 이 국가들을 파라오가 두발로 밟고 있다. 측면에는 람세스 왕비 네페르타리와 왕의 딸들 가운데 한명이 '카'를 활성화 시키는 역할을 맡고 있다. <출처:크리스티앙 자크와 함께하는 이집트여행,문학세계사>
탑문앞에 위압적인 자세로 앉아 있는 람세스2세의 석상
측면에서 본 람세스2세 석상
람세스2세 석상 측면의 부조
☞ 람세스 2세
람세스 2세(영어: Ramses II, 기원전 1314년경 ~ 기원전 1224년, 혹은 기원전 1302년경 ~ 기원전 1212년)는 고대 이집트 제19왕조 제3대 파라오(재위: 기원전 1290년 ~ 기원전 1224년, 혹은 기원전 1279년 ~ 기원전 1212년)이다.그의 치세동안 이집트는 리비아, 누비아, 팔레스타인까지 세력을 확장해 번영하였다. 람세 2세, 라메세스 2세라고도 표기되었다. 람세스란 이름은 라에 의해 태어났다는 의미를 가진 '라 메스 시스'의 그리스어 음이다.
생몰연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대체적으로 24세에 즉위하여 66년간 통치한뒤 90세에 죽은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사이 첫번째 왕비 네페르타리와 여러명의 왕비 및 측실과의 사이에서 현자(賢者)로써 명성이 높았던 카엠와세드, 후계자였던 메르에프타하을 시작으로 매우 많은 자식들을 낳았다고 전해진다. 일부에서는 그들 대부분이 양자이며 왕의 아들이란 칭호를 하사받은것이라고 주장했으나, 무엇보다 람세스왕의 전용 활이라 불리는 커다란 강궁이 남아 있는데, 왕 이외에는 아무도 당기지 못했다는 일화가 있을정도로 뛰어난 전사였던 그가 많은 자식을 남기지 않았다고는 생각되지 않아, 역시 그들은 왕의 친자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치세 전반기에는 히타이트와 팔레스타인을 사이에 두고 세력을 다투었다. 기원전 1286년 카데쉬 전투에서 직접 출정하여 히타이트 왕 무하탈리와 전투를 벌였다. 이집트는 카데쉬 전투에서 거짓정보에 속은 결과, 주력 군단이 괴멸당할정도의 고전을 면치 못했으나, 람세스 2세의 무용에 의해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히타이트 세력을 팔레스타인에서 몰아내지는 못했다. 양쪽은 서로 상대를 물리치지 못하고, 장기간 전쟁을 계속하던 중 람세스 2세의 재위 21년째인 기원전 1269년에 이집트와 히타이트 사이에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휴전하였다. 람세스 2세는 히타이트 왕녀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이것은 세계사에서 최초의 평화조약이라 평가했다. 또한 카데쉬 전투에 대한 람세스 2세의 승리선전은 이집트군의 군사제도 개혁을 방해했기에 훗날 재앙의 불씨로 남게 되었다.
람세스 2세는 또한 나일 제 1강을 넘어 누비아로 원정을 떠났다. 람세스 2세는 전승 기념비을 많이 세웠고, 현재도 기념비의 상당수가 남아있는 파라오가 되었다. 누비아는 후에 이집트에 동화되어 본가 이집트의 쇠퇴을 구원하는 형태의 왕조을 세우게 된다.
그는 히타이트와 전쟁을 벌이기는 했지만 실리를 추구할 줄도 알아서 히타이트와 휴전을 뱆어 50년 동안 평화를 유지했다. 또한 아부심벨 신전, 카르나크 신전, 라메세움 등의 거대한 건축물을 이집트 전역에 건설하기도 했다. 고대 파라오들에게 있어 자신의 업적을 후세에 알릴 수 있는 건축물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출처:위키백과>
람세스 2세(영어: Ramses II, 기원전 1314년경 ~ 기원전 1224년, 혹은 기원전 1302년경 ~ 기원전 1212년)는 고대 이집트 제19왕조 제3대 파라오(재위: 기원전 1290년 ~ 기원전 1224년, 혹은 기원전 1279년 ~ 기원전 1212년)이다.그의 치세동안 이집트는 리비아, 누비아, 팔레스타인까지 세력을 확장해 번영하였다. 람세 2세, 라메세스 2세라고도 표기되었다. 람세스란 이름은 라에 의해 태어났다는 의미를 가진 '라 메스 시스'의 그리스어 음이다.
생몰연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대체적으로 24세에 즉위하여 66년간 통치한뒤 90세에 죽은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사이 첫번째 왕비 네페르타리와 여러명의 왕비 및 측실과의 사이에서 현자(賢者)로써 명성이 높았던 카엠와세드, 후계자였던 메르에프타하을 시작으로 매우 많은 자식들을 낳았다고 전해진다. 일부에서는 그들 대부분이 양자이며 왕의 아들이란 칭호를 하사받은것이라고 주장했으나, 무엇보다 람세스왕의 전용 활이라 불리는 커다란 강궁이 남아 있는데, 왕 이외에는 아무도 당기지 못했다는 일화가 있을정도로 뛰어난 전사였던 그가 많은 자식을 남기지 않았다고는 생각되지 않아, 역시 그들은 왕의 친자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치세 전반기에는 히타이트와 팔레스타인을 사이에 두고 세력을 다투었다. 기원전 1286년 카데쉬 전투에서 직접 출정하여 히타이트 왕 무하탈리와 전투를 벌였다. 이집트는 카데쉬 전투에서 거짓정보에 속은 결과, 주력 군단이 괴멸당할정도의 고전을 면치 못했으나, 람세스 2세의 무용에 의해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히타이트 세력을 팔레스타인에서 몰아내지는 못했다. 양쪽은 서로 상대를 물리치지 못하고, 장기간 전쟁을 계속하던 중 람세스 2세의 재위 21년째인 기원전 1269년에 이집트와 히타이트 사이에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휴전하였다. 람세스 2세는 히타이트 왕녀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이것은 세계사에서 최초의 평화조약이라 평가했다. 또한 카데쉬 전투에 대한 람세스 2세의 승리선전은 이집트군의 군사제도 개혁을 방해했기에 훗날 재앙의 불씨로 남게 되었다.
람세스 2세는 또한 나일 제 1강을 넘어 누비아로 원정을 떠났다. 람세스 2세는 전승 기념비을 많이 세웠고, 현재도 기념비의 상당수가 남아있는 파라오가 되었다. 누비아는 후에 이집트에 동화되어 본가 이집트의 쇠퇴을 구원하는 형태의 왕조을 세우게 된다.
그는 히타이트와 전쟁을 벌이기는 했지만 실리를 추구할 줄도 알아서 히타이트와 휴전을 뱆어 50년 동안 평화를 유지했다. 또한 아부심벨 신전, 카르나크 신전, 라메세움 등의 거대한 건축물을 이집트 전역에 건설하기도 했다. 고대 파라오들에게 있어 자신의 업적을 후세에 알릴 수 있는 건축물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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