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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월성(반월성)은 지금은 나무가 울창한 평범한 야산처럼 보이는 곳이지만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 수도 경주의 궁궐이 있는 성으로 성벽은 자연 지형을 이용한 곳도 있고, 흙과 돌을 쌓아 놓은 부분도 있는 국왕이 살고 있던 도성이었다. 고려이후 통일된 국가에서는 평지에 궁궐을 쌓지만 삼국시대까지만 해도 전쟁이 많았기때문 안전한 요새처럼 성벽을 쌓고 그 내부에 궁궐을 짓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성벽은 석축형태로 쌓은 조선시대와는 달리 흙과 돌을 섞어서 쌓았으며, 자연지형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경주 월성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별궁이었던 임해전지가 있고, 북쪽으로는 신라 초기 왕들의 왕릉과 계림, 첨성대가 있다. 남쪽은 하천이 흐르고 있으며 천연의 해자 역할을 했고, 그 하천을 건너서 왕성인 경주 월성을 출입하는 월성교가 있었다고 한다.
1. 경주 월성 해자와 월성교(모형)
2. 경주 월성을 둘러싼 성벽
3. 얼음을 보관하던 석빙고
4. 경주 김씨 시조인 김알지 탄생 설화가 담긴 계림
사적 제16호. 반월성(半月城)·신월성(新月城)이라고도 한다. 반달 모양으로 생겼다고 한다.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있다. 둘레 2,400m의 토석(土石) 혼축으로 남쪽은 남천을 끼고 자연지세를 이용해서 쌓았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101년(파사이사금 22)에 금성(金城)의 동남쪽에 성을 쌓고 월성이라 했으며, 재성(在城)이라고도 했는데 주위가 1,023보(步)였다고 한다. 이때 파사이사금은 거처를 월성으로 옮겼으며, 월성 북쪽에는 만월성(滿月城)이 있었다. 이는 월성을 쌓기 전에 왕이 살던 곳으로 짐작된다. 월성은 475(자비마립간 18)~487년(소지마립간 9)에 궁성을 명활성(明活城)으로 옮긴 시기를 제외하면 줄곧 신라 왕들이 거처하던 곳이었다. 초기 월성은 도성(都城)으로 출발했으나, 신라의 국가성장과정에서 인구 증가와 함께 대규모 고대도시로 성장하면서 궁성의 기능을 갖게 되었다. 많은 건물이 들어서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1741년(영조 17)에 축조한 석빙고(石氷庫)뿐이다. 성벽은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데 서남쪽 월정교지(月精橋址)를 바라보는 곳이 가장 높게 남아 있다. 석탈해설화에 의하면 원래 호공(瓠公)의 거주지였던 것을 탈해가 꾀를 써서 빼앗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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