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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China)

중국 북경 국자감 대성전(大成殿), 공자 위패를 모신 대성전의 시초

younghwan 2009. 10. 6.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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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경 국자감은 원나라때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大成殿)을 세우고, 유학 교육기능을 갖는 강학공간을 그 주위에 세움으로서 오늘날 국자감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북경의 국자감은 고려시대 국자감과 조선의 성균관, 각 지역의 향교의 형태를 갖추게 한 모범이 되었던 곳이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북경에서는 자금성의 규모에 비해서 국자감의 크기나 비중은 높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후대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곳이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나라 성균관이나 서원, 향교 들은 전묘후학(前廟後學)의 건물배치로 앞쪽에 대성전이나 사당을 두고, 뒷편에 강학공간을 두는 것이 보통이나, 북경 국자감은 동쪽에 대성전이 있고, 서쪽편에 강학공간이 배치되어 있다. 국자감이 먼저 세워진 것으로 보아, 전묘후학의 건물배치는 아마도 다른 사례를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국자감 대성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대성전 건물. 양쪽에는 아주 오래된 향나무가 심어져 있다.

대성전을 들어가는 길과 월대를 오르는 계단. 우리나라의 경우 국왕도 걸어서 올라가게 되어 있지만, 중국은 황제가 천자(天子)를 칭해서 그런지, 대성전 입구까지 황제의 가마가 지나는 통로가 설치되어 있다.

황제의 가마가 지나는 대성전 월대를 오르는 계단에 있는 용이 새겨진 조각상.

대성전에는 공자를 지칭하는 '만세사표(萬世師表'라고 가로로 글씨를 쓴 편액과, 대성전이라고 세로로 쓴 편액이 걸려있다. 원나라 무종이 대성이라고 추시(追諡)하였다고 한다.

대성전 출입문

대성문에서 대성전까지 들어오는 길. 좌우에는 오래된 향나무가 있다.

대성전 월대를 오르는 좌.우측 계단.

우리나라 서울 성균관의 대성전. 국가 규모에 비해서는 성균관 대성전이 훨씬 크고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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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4년(휘종 3) 벽옹문선왕전(壁雍文宣王殿)을 대성전이라 하고, 원나라의 무종(武宗)이 대성이라고 추시(追諡)한 후 지금까지 그 명칭이 내려오고 있다. 조선시대 향교와 성균관은 성현들을 봉사하는 향사처(享祀處)와 유학을 강(講)하는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병행했다. 따라서 건축적 공간도 대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향사공간과 명륜당을 중심으로 한 강학공간으로 대별된다. 남북축선상에 대성전과 명륜당이 위치하고 대성전의 앞뜰에는 좌우대칭으로 동무와 서무가 배치되며, 명륜당의 좌우에는 동재와 서재가 대칭으로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인 구성이다. 대성전의 칸수는 음양(陰陽)의 원리에 따라 3칸·5칸 등 기수를 취하며, 정면에 개방된 툇간을 만들어 의례시 편리하도록 하는 것이 전형이다. 내부에는 위패를 봉안하는데 서울 문묘 대성전의 경우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인 공자를 정위(正位)로 하여 안자(顔子)·자사(子思)는 동쪽에, 증자(曾子)·맹자(孟子)는 서쪽에 배치했으며, 이외에도 10철(十哲)과 송조 6현(宋朝六賢), 그리고 설총(薛聰)·안유(安裕)·이황(李滉)·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최치원(崔致遠) 등을 비롯한 우리나라 성현 18현의 위패를 봉안하여 종향(從享)하고 있다. 대성전 주위에는 정방형 또는 장방형으로 담장을 둘러 엄숙한 참례의 공간을 만들며, 대성전 앞면과 옆면에는 관수대와 축문을 태울 수 있는 망료대와 뜰을 밝히는 정료대를 놓는 것이 일반적이다. <출처: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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