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고성은 투루판 동쪽편 화염산 계곡에서 강물이 흘러드는 투루판 분지 북쪽편에 자리잡고 있는 고성이다. 메마른 투루판 분지내에서도 계곡과 가까운 까닭에 지금도 고창고성 주변에는 농지가 많고 주민들도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고창고성은 한나라시대 투루판 교하고성에서 번성하던 차사전국의 국경 부대원들이 만든 요새에서 출발하여 후대에 중국 내륙에서 넘어온 국씨가 고창국을 건설함으로써 투루판 분지의 중심이 되었고, 그 뒤 회골칸국까지 이 곳에 수도를 정함으로써 오랜 기간 이지역 중심지이자 동.서 교역로인 실크로드의 중심도시였다. 당나라 때 현장법사를 비롯하여 인도로 순례를 떠났던 많은 승려들이 이 곳을 지나 갔으며, 이슬람교도인 위구르 세력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 불교가 번창했던 곳으로 화염산 협곡에 있는 베제클라크 석굴을 비롯하여 토욕구의 천불동 등 많은 불교 유적을 남겨 놓고 있다.
고창고성은 둘레 5.4km, 면적, 220만 평방미터의 상당히 넓은 성으로 지금은 폐허가 되어 있지만 투루판 같은 사막지역에서 규모가 큰 도시를 형성하고 있었다. 투루판 서쪽편 강이 흘렀던 곳에 있었던 교하교성은 요새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고창고성은 평지 한가운데 높은 성을 쌓은 중국 내륙의 도시들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이 고창고성은 외성과 내성, 궁성으로 나뉘어 있으며, 외성은 벽의 두께가 12m에 높이가 11m에 달한다고 한다.
고창고성 출입문은 고성 북쪽편에 있으며, 고창고성 북쪽으로 마을과 농경지가 많이 형성되어 있다. 고창고성은 그 면적이 백만평 가까이 되는 넓은 지역으로 그 곳 모두를 상세히 보기는 힘들고 대부분은 당나귀가 끄는 마차를 타고 서남쪽 사원구역을 탐방하게 된다.
고창고성 북쪽편 외성 성벽.
고창고성 북쪽 정문에서 남쪽 성문까지 연결된 도로. 동쪽편에는 내성 성벽이 드문드문 이어져 있다.
이 유적의 실제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고창고성을 대표하는 장면으로 많이 등장한다.
고창고성 입구 근처에 있는 건물군. 흙벽돌로 쌓은 건축물로 규모가 상당히 컸던 것으로 보인다.
고창고성이 상당히 큰 도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 남.북을 있는 왕궁터 옆 대로 주변에는 규모가 큰 건물들이 아직도 상당히 남아 있다는 것이다.
고창고성에는 많은 건물들이 이처럼 그 구조물이 많이 남아 있지만, 지금의 모습으로 봐서는 원래의 모습이 어떤 형태였는지는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고창고성 왕궁터 부근의 건물
고창고성 내성 성벽과 출입문. 흙벽돌로 상당히 높게 성벽을 쌓고 있다.
고창고성 외성 서남쪽에 위치한 사원구역의 건물로 이 건물 또한 사원 건물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고창고성 입구에서 출발한 당나귀 마차는 이 곳 사원구역까지 운행되고 있다. 사원구역에는 상당히 규모가 큰 사찰이 여러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창고성을 가로 지르는 대로는 남쪽 성문까지 연결되어 있다. 멀리 외성 남문터가 보인다.
고창고성 사원구역의 건물 또한 규모가 상당히 크다.
고창고성 서쪽편 외성 성벽.
고창고성 사원구역 남쪽 건물들
고창고성내 상당수 지역은 건물 흔적이 없어져 버린 곳이 많다.
고창고성을 운행하는 당나귀가 끄는 마차
고창고성내 건물 유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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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高昌)은 고대 실크로드 도시로 중국의 신장 웨이우얼 자치구의 황량한 타클라마칸 사막의 북쪽 주변에 건설되었다. 교역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로 상인들의 휴식처이기도 하다. 고창의 유적인 고창고성 유적은 현재의 투르판에서 북쪽으로 30km 부근에 있다. 고창은 기원전 1세기에 건설되었고, 비단길의 중요한 도시였으나 14세기에 전쟁으로 파괴되었다. 가오 왕궁 유적은 도시 외곽에 있으며 오늘날에도 볼 수 있다. 고창은 위구르어로는 콰라호자라고 불리며 위치는 신장의 투르판에서 30km 떨어져 있다. 고창은 서부 중국에서 교통의 허브로서 열쇠의 역할을 하였다. 오늘날 남아있는 문헌 역사 많지 않다. 구전된 이야기들만이 역사를 구체화하기 위해 존재한다. 고고 학적인 유물은 단지 지역주민에 의해 이디쿠샤리라 불리는 교외의 장소에만 있다. 도시의 예술적인 기념비는 A. 폰르콕에 의해 출판되었다. 서기 439년에 북량의 패잔병이 주쿠 우휘와 주쿠 안조우의 지휘아래 고창으로 달아났다. 그곳에서 그들은 서기 460년까지 권력을 유지하였다. 그때 누란에의해 정복되었다. 고창에는 한족이 만가구 이상 있었으며, 460년, 누란은 한족인 칸 보조우를 고창 왕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고차(高車)는 타림 분지내에서 누란의 권력에 도전하며 부상 중이었다. 고차 왕 아푸질루오(阿伏至羅)는 칸 쇼우귀를 죽이고 한족 장맹명(張孟明)을 고창의 속주왕으로 둔황에서 임명하였다. 그리하여 고창은 고차의 지배 아래로 들어갔다. 후에 장맹명은 고창의 백성들의 반란으로 피살되고 마유(馬儒)로 교체되었다. 501년 마유 자신도 전복되고 피살되었으며, 고창의 백성들은 간수성 진쳉의 쿠지아(麴嘉)를 그들의 왕으로 임명하였다. 고창의 결정적인 몰락은 한족이면서도 당나라에 의해 시작되었다. 당나라보다는 돌궐족과 가까워 651년 당태종은 소정방을 보내 고창을 정벌한다. 657년 소정방은 서돌궐까지 항복시킴으로써 중앙 아시아의 여러나라들은 모두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에 예속되게 된다. 결국 고창은 100년의 역사로 멸망하고 이슬람과 몽골의 침입을 받아 성이 완전히 소실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성터의 흔적만 남긴 채 사라지고 만다. 현재는 고대 고창의 흔적은 덩그러니 남은 고창고성과 베제클릭 천불동에서만 찾일 수 있다. <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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