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story Traveling

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 불교조각실] 삼국시대 금동불상, 반가사유상 (국보78,83호)

younghwan 2012. 8. 22. 23:46
반응형


 불교가 고구려 소수림왕(372년)때 처음 우리나라에 전해진 이래로 국가와 민간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쳐왔다고 할 수 있다. 불교에서 신앙의 대상은 원래 스투파라 불리는 부처의 사리를 모시는 탑이 중심이었으며, 점차로 서방이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간다라 불교 이래로 부처와 보살의 모습을 구체화한 불상이 신앙의 중심이 되었으며, 사찰에서도 탑보다는 불상을 모신 금당이 중요해졌다.

 삼국시대에도 많은 불상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이지만, 황룡사 장륙전의 거대한 불상처럼 금당에 모셔졌던 불상은 많이 남아 있지 않는 반면에 개인들이 소장했던 것으로 보이는 금동불상들은 지금도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 중 국보 78호, 83호로 지정된 반가사유상은 삼국시대 불상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보여주는 불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남아 있는 많은 금동불상들은 크기는 작지만 그 만든 수법의 섬세함이나 뛰어난 조형미 등으로 예술성을 인정받아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가 상당수 되며 국립박물관이나 민간이 운영하는 대형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1. 반가사유상

 국보 78호, 국보 83호로 지정된 반가사유상은 그 섬세한 표현과 뛰어난 조형미,로 석굴암 본존불과 더불어 한국을 대표하는 불상이다. 일본의 아스카시대에 만들어진 목조반가사유상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이 2개의 반가사유상은 국가 소유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점이 여간 다행스러운 점이 아닐 수 없다.


반가사유상, 삼국시대,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은 원래는 명상에 잠긴 싯타르타 태자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었으나,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당시에 크게 유행했던 미륵사상을 반영하여 미륵불로 만들어졌다. 당시 가장 큰 사찰이었던 황룡사 장륙전에도 미륵불이 모셔졌었다고 한다. 삼국시대의 다양한 반가사유상은 똑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졌었다.

반가사유상은 한 다리를 다른 쪽 무릎 위에 얹고, 손가락을 빰에 댄 채 생각에 잠긴 모습이다. 이러한 자세의 불상은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며 명상에 잠긴 싯다르타 태자의 모습에서 비롯되었다. 머리에 낮은 관을 쓰고 있는데, 삼산관 또는 연화관이라 한다. 상반신에는 옷을 전혀 걸치지 않았으며, 단순한 목걸이만 착용하고 있다. 다리를 감싸며 대좌를 덮은 치맛자락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상은 신라계 승려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일본 고류사의 붉은 소나무로 만든 반가사유상과 비교해 볼 때 신라에서 만든 것을 추정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균형잡힌 형태와 우아하고 세련된 조각 솜씨로 미루어 백제 불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반가사유상, 국보 78호, 삼국시대, 6세기 후반, 높이 83.2cm, 무게 37.6kg
반가사유상은 한 다리를 다른 쪽 무릎 위에 얹고, 손가락을 뺨에 댄 채 생각에 잠긴 모습이다. 이러한 자세의 불상은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며 명상에 잠긴 싯다르타 태자의 모습에서 비롯되었다. 머리에 높은 관을 쓰고 있는데, 이 관에는 해와 달 장식이 있어 '일월식보관'이라 한다. 이렇게 해와 달이 새겨진 관은 사산조 페르시아에서 유래한 것으로, 비단길을 통해 동쪽으로 전파되면서 보살상의 관으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고졸한 미소와 자연스러운 반가좌의 자세, 신체 각 부분의 유기적인 조화, 처의 자락과 허리띠의 율동적인 흐름 등에서 국보 83호 반가사유상과는 또 다른 세련된 조각 양식을 보인다. <출처:중앙박물관>


금동 반가사유상


보관을 쓰고 있는 반가사유상 얼굴


금동 반가사유상


금동 반가사유상 (삼국시대,7세기). 전형적인 반가사유상의 모습을 하고 있는 조그만 금동불상이다.


금동미륵보살반가가유상 (삼국시대,7세기전반, 보물 331호). 네모난 대좌위에 앉아 있는 이 금동불상은 신체가 사실에 비해 길게 표현된 불상으로 정교한 세부표현과 추상성이 특징이다.

왼다리를 내리고 걸터 앉아서 오른손을 들어 두 손가락을 살짝 뺨에 대고 생각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미륵보살상이다. 긴 얼굴은 눈꼬리가 치켜 올라가고 미소가 없는 정적인 표정이다. 머리는 평평하게 표현되었고 그 위에 높은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있다. 가늘고 긴 몸은 양 어깨와 양 팔에만 옷을 살짝 걸치고 있으며, 옷주름은 단순하면서 매우 도식적으로 표현되었다. 목 둘레의 2중으로 된 구슬 장식은 무거워 보이는데 가슴 앞으로 내려와 X자형으로 교차되고 있다. 대좌(臺座)는 4각형의 대좌 위에 8각으로 된 받침을 놓고 그 위에 다시 연꽃이 새겨진 대좌가 놓여있는 모습인데, 보살상보다 크게 만들어져 전체적으로 안정된 느낌을 주고 있다. 4각형의 대좌에는 마름모꼴 문양이 1면에 2개씩 뚫려 있는데 대좌의 이런 모양은 우리나라 금동불에서는 보기 드문 예이다. 조각수법이 선과 면의 구분이 분명하고 잘 다듬어져 세련된 모습이며, 출토지가 분명하지 않지만 2중의 구슬장식과 가운데가 솟아오른 연꽃의 형식 등으로 보아서 삼국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출처:문화재청>



금동 반가사유상(삼국시대, 7세기전반). 일반적으로 반가사유상이 손가락을 뺨에 살짝대고 있는데 비해 이 반가사유상은 손바닥 전체로 뺨을 감싸듯이 받치고 있다. 머리 윗부분에는 광배를 결합했던 것으로 보이는 동그란 구멍이 있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반가사유상은 한다리를 다른 쪽 무릎위에 얹고, 손가락을 뺨에 된 채 생각에 잠긴 모습을 한다. 이러한 형식의 불상은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여 명상에 잠긴 싯타르타 태자의 모습에서 비롯되었다. 중국에서 반가사유상은 5~6세기에 주로 만들어졌으며, 태자상 같은 여러 명치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6~7세기 크게 유행하였으며, 일반적으로 미륵으로 간주된다. 우리나라 반가사유상은 일본의 아스카 시대에 만들어진 반가사유상에도 영향을 끼쳤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2. 고구려불상

 고구려가 북한과 만주지역에 존재했던 국가였던 관계로 현재 우리나라에는 많은 불상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국보로 지정된 금동불상이 2점이나 있다. 하나는 발견된 지역이 경남 의령이지만 불상뒷면에 제작 내력을 적어 놓고 있어 고구려 불상임을 말해주는 금동불상이 있고, 다른 하나는 한때 고구려영역이었던 경기도 양평지역에서 발굴된 금동불이 있다. 고구려는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불교를 도입한 국가로 주로 남북조시대 북위, 동위 불상 양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생동감이 넘치는 고구려 특유의 불상양식이 만들어 갔던 것으로 보인다.


금동연가칠년명여래입상(의령, 539년, 국보119호), 금동불 뒷면에 '연가 칠년'이 새겨져 있어, 불상의 내력을 정확하게 알 수 있은 불상으로 실제로 이 불상은 경남 의령에서 발굴되었지만 만들어진 곳은 평양이라고 한다. 539년 평양에 있던 동사에서 만즐어 정국에 유포한 천불상 중의 하나이다.


불상 뒷편에 불상의 제작 내력을 글로 새겨놓고 있다. 글씨체가 아주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연가7년인 기미년(539) 고려국의 수도 낙양(평양)에 있던 동사의 주지스님 경과 그 제자 승연을 비롯한 사도 40인이 함께 현겁천불을 조성하여 유포하기로 하였는데 제29불인 인현의불로 비구 법영이 공양한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고구려와 관련된 글이 새겨져 있는 불상으로, 옛 신라 지역인 경상남도 의령지방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광배(光背) 뒷면에 남아있는 글에 따르면 평양 동사(東寺)의 승려들이 천불(千佛)을 만들어 세상에 널리 퍼뜨리고자 만들었던 불상 가운데 29번째 것으로, 전체 높이는 16.2㎝이다. 머리는 삼국시대 불상으로는 유례가 드물게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근에는 큼직한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있다. 얼굴은 비교적 작은데, 살이 빠져 길쭉한 가운데 미소를 풍기고 있다. 오른손은 앞으로 들어 손바닥을 정면으로 향하고 있으며, 왼손은 허리 부분에서 손바닥이 정면을 향하게 하여 아래로 내리고 있다. 왼손의 세번째와 네 번째 손가락을 구부리고 있는 모습은 삼국시대 불상에서 나타나는 특징적인 모습이다. 유난히 두꺼운 옷에 싸인 신체는 굴곡의 표현이 없지만, 전체적인 체구와 약간 보이는 어깨의 골격 등에서 강인한 힘을 느끼게 한다. 새의 날개깃 모양의 옷자락은 좌우로 힘차게 뻗쳐 있는데, 날카롭고 힘있는 모습이 중국 북위 이래의 양식을 보여준다. 불상과 함께 붙여서 만든 광배는 앞면에 거칠게 소용돌이치는 듯한 불꽃무늬가 선으로 새겨져 있다. 광배의 일부분이 손상되었으나 도금까지도 완전히 남아 있는 희귀한 불상으로, 광배 뒷면에 남아있는 글과 강렬한 느낌을 주는 표현 방법 등으로 볼 때 6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고구려 불상으로 보인다. <출처:문화재청>


소조보살입상 (평남 평원, 6세기 중엽). 평양근처에 있던 절터에서 발견된 흙으로 빚어서 만든 보살상 중의 하나라고 하며, 아마도 서역의 사찰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천불상 중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된다.

1927년 평양 부근 원오리의 옛 절터에서 발견된 것으로 흙을 구워 만든 보살상 수백개의 파편 가운데 하나이다. 틀을 사용하여 만들었으며, 표면에 흰색이나 은색을 칠한 흔적이 남아 있다. 옷주름 아랫부분은 간격이 촘촘하고 끝자락이 양쪽으로 삐친 모습을 하고 있어, 중국 북위 불상의 영향이 느껴진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양평신화리금동여래입상 (경기 양평, 7세기전반, 국보186호). 70년대에 발견된 이 불상은 다순하면서도 강한 인상을 주고 있는 불상으로 중국 북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중앙박물관과 문화재청의 설명이 약간 다르다.

1976년 경기도 양평 한강변에서 발견된 불상이다. 6세기 불상에 비해 앞에서 보는 것 뿐 아니라 옆이나 뒤에서 보이는 부분까지 입체감이 잘 살아나도록 만들었다. 이 불상은 중국의 북제, 북주 불상 양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늘씬한 신체에서 풍기는 강인한 인상과 자신감에 찬 표현들은 고구려 불상의 특징을 반영한 것이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1976년 경기도 양평군 신화리에서 농지정리를 하다가 우연히 발견된 높이 30㎝의 불상인데, 이곳에서 기와조각 등 유물이 많이 나온 것으로 보아 예전에는 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상은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를 잃었으나, 보존 상태가 매우 좋고 도금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다. 얼굴은 길고 둥글어 풍만한 느낌을 주며, 목은 매우 길고 굵게 표현되어 있다. 얼굴에 비해 몸이 매우 길어 비현실적인 모습이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있는데, 가슴과 배를 많이 드러내면서 U자형의 주름을 만들고 있다. 가슴에는 가로지르는 3가닥의 선을 새겨 속옷을 나타내고 있다. 치마의 옷자락은 몇 줄로 겹쳐져서 굵은 곡선을 그리고 있는데, 주름의 형태가 특이하며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느낌을 준다. 양 손가락이 없어진 상태여서 정확한 손모양은 알 수 없으나, 오른손은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왼손은 손끝이 땅을 향하여 손바닥을 보이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묵직하고 단순한 원통형의 몸체, 간결한 U자형의 주름은 중국 수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당시 신라가 점령하고 있던 한강 유역에서 출토되었으므로 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출처:문화재청>



금동 관음보살입상(7세기).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중국의 전진으로부터 경전과 함께 불상이 전해졌다. 이로 미루어 보아 적어도 기원후 4세기에는 고구려에 불상이 알려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불상은 대부분 6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고구려 불상은 대체로 중국 6세기의 북위, 동위 불상 양식을 기반으로 하였다. 여기에 단순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고구려인들의 미감이 반영되었다. 고구려 불상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예는 <연가칠년이 새겨진 부처로 고구려 불상의 양식적 특징을 잘 보여줄 뿐만 아니라 정확한 연대와 조성 배경을 알 수 있다. <출처:문화재청>


금동보살입상(보물333호)
금동보살입상(金銅菩薩立像)은 삼국시대 보살상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높이 15.1㎝의 조그만 작품이다.
머리에는 특이한 형태의 관(冠)을 쓰고 있으며, 몸에 비해 다소 긴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번지고 있다. 체구는 자그마하지만 당당하고 강직해 보이며, 온몸을 감싸고 있는 옷 때문에 신체의 윤곽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옷은 좌우대칭을 이루면서 X자로 교차되며 날리듯 표현되어 힘이 넘친다. 손은 삼국시대 불상에서 유행하던 모습인데 몸에 비해 매우 크게 표현되었다. 왼손은 아래로 내려 새끼 손가락과 네번째 손가락을 구부렸고, 오른손은 위를 향해 손가락을 모두 펴고 있는 모습이다. 두 발 아래에는 역삼각형 모양의 둥근 대좌(臺座)가 있는데, 여기에 긴 촉이 붙어 있어 아래 대좌에 꽂을 수 있도록 되어있지만 아래 대좌는 없어졌다. 대좌와 광배가 없어졌지만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불상으로, 손모양, X자로 교차된 옷자락 등이 삼국시대 보살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3. 백제불상


 중국 남북조시대에 북조를 통해서 불교를 수용한 고구려,신라와는 달리 백제는 독자적으로 남조의 동진으로부터 불교를 수용하였다. 백제는 고구려의 압박을 받아서 수도를 한성에서 공주, 부여로 천도를 해서 그런지 불교가 국교와 비슷한 수준으로 크게 융성한 국가였다. 백제 마지막 수도 부여에는 정림사지를 비롯하여 많은 절터가 있으며, 군수리사지에서 보듯이 왕궁과 사찰이 같이 있을 정도로 불교국가에 가까웠던 나라였고, 일본에 불교를 전해주고 불교 조각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금동불 입상(서산 보원사터, 6세기중엽). 백제를 대표하는 석불인 서산마애석불 부근에 있었던 화엄십찰 중의 하나인 보원사 절터에서 출토된 금동불이다.


금동광배(부여 부소산, 7세기전반). 아주 화려하게 잘 만들어진 광배로 연꽃무늬와 식물의 넝쿨처럼 생긴 장식이 들어가 있다.

부처나 보살에서 나오는 빛을 표현한 광배는 머리에서 나오는 빛과 모에서 나오는 빛으로 이루어진다. 이 광배는 원형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두광임을 알 수 있다. 두개의 금동판을 중앙과 가장자리에 작은 쇠못을 박아 결합하였다. 뒷면에는 '하다의 장법사'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는 광배를 만든 사람과 관련된 것이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금동 관음보살 입상(서울 삼양동, 7세기전반, 국보 127호). 우리나라에서 관음신앙이 정립된 시기를 알려주는 대표적인 관음상으로 보관을 쓰고 있고, 정병을 들고 있는 관음보살을 모습을 아주 세밀하게 잘 표현하고 있다. 서유기에 많이 등장하며 삼장법사 일행을 도와주던 관음보살을 모습이 보이는 듯한 불상이다.

보살이 쓴 보관 중앙에 화불이 새겨져 있고 정병을 들고 있어 관음보살로 여겨진다. 6세기까지만 해도 관음보살은 도상은 확립되지 않았다. 그러나 7세기 전반 즈음에는 화불과 정병을 갖춘 독존상이 등장하게 된다. 이 관음보살상을 통해 7세기 전반에는 본격적인 관음신앙이 확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1967년 서울시 도봉구 삼양동에서 발견된 높이 20.7㎝의 보살상으로,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발목 윗부분에 금이 가고 왼쪽 옷자락이 약간 떨어져 나간 상태이다. 머리에는 삼각형의 관(冠)을 쓰고 있고, 양감 있는 얼굴은 원만해 보이며, 입가에는 엷은 미소를 짓고 있다. 상체는 어깨가 좁아 위축된 모양이며, 배를 앞으로 내밀고 있어 옆에서 보면 활처럼 휘어진 모습이다. 배와 무릎 근처에 이중으로 걸쳐져 있는 두꺼운 옷은 U자형으로 늘어져 있다. 치마는 두껍게 입어서 다리의 윤곽이 뚜렷하지 않으며, 옷주름은 몇 가닥의 선으로 단순화시켰다. 오른손은 허리 근처에서 정병(淨甁)을 들고 있으며, 왼손은 위로 올려 엄지와 검지를 V자형으로 곧게 펴고 있는 특이한 모습이다. 보살이 서 있는 대좌(臺座)에는 엎어 놓은 연꽃무늬를 새겨 놓았으며, 꽃잎은 그 끝이 뾰족하여 보살상의 부드러움과 대비된다. 이 보살상은 삼각형 모양의 관에 작은 부처 하나를 새기고 있는 점과 오른손에 정병을 들고 있는 점으로 볼 때 관음보살이 분명하며, 살찐 얼굴과 신체, U자형으로 늘어진 옷 등으로 보아 만든 시기는 7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삼국시대 후기에 크게 유행했던 관음신앙의 단면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라 하겠다. <출처:문화재청>


부여 군수리 석조여래좌상(부여 군수리사지출토, 6세기후반, 보물329). 부여 궁남지 서남쪽에 위치한 군수리사지에서 출토된 석가여래상이다. 중국 남조 불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불상이지만 도교적인 이미지가 많이 보이는 점이 중국 남조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된다.

1936년에 충청남도 부여 군수리의 백제 절터를 조사할 때 발견된 불상으로, 곱돌로 만들었으며 4각형의 높은 대좌 위에 앉아 있는 백제 특유의 불상이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작은 머리(육계)가 솟아 있다. 네모난 얼굴은 두 볼에 웃음이 가득하고, 지그시 감은 눈·넓은 코·미소띤 입 등에서 부드럽고 온화한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두꺼워 신체의 윤곽이 거의 드러나지 않으며, 어깨에서 무릎 위까지 길게 흘러내린 옷자락은 4각형의 대좌(臺座)를 거의 덮고 있다. 이 옷자락의 표현은 부드러우면서도 탄력적이어서 사실성이 넘쳐난다. 가슴 부근에서는 U자형의 옷주름을 표현하였고, 무릎 밑으로 흘러내린 옷자락은 좌우대칭의 Ω형 주름을 나타내고 있다. 두터운 옷자락에 싸여 몸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는 점, 좁아진 어깨, 두 손을 배 앞에서 모아 깍지를 낀 단아한 손모양 등에서 옛 수법을 잘 간직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불상은 형식과 자세로 보아 4, 5세기 중국 불상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으나 얼굴 모습이나 신체의 표현 등 세부모습에서 백제화된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완숙한 6세기 중엽 백제불상의 특징을 갖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백제가 불교를 수용한 시기는 침류왕 원년(3840으로, 중국 남부에 세워진 왕조 중 하나인 동진에서 온 승려 마라난타에 의해서 였다. 현재 남아 있는 백제 불상은 대부분 6~7세기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주로 금동이나 돌로 만든 소형의 불 보살상과 삼존불상이 많다. 이 밖에도 비교적 큰 석불과 마애불도 전한다. 삼국시대 당시의 대외 관계와 불상의 특징을 고려할 때, 백제 불상은 고구려의 영향과 함께 중국 남조 여러 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백제는 일본에 불교를 전해줌으로써 일본의 불교 조각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일본에서 보주를 든 보살상의 유행과 백제관음이라고 알려진 일본 호류사의 보살상은 이러한 백제와 일본의 긴밀한 관계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4. 신라불상

 삼국시대 신라는 불교를 가장 늦게 받아들인 국가이지만, 황룡사를 건립하는 등 불교가 크게 융성했던 국가로 장륙전에는 신라의 3대 보물 중 하나인 거대한 불상이 있었다고 하며 많은 금동불상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금동불상은 불교를 고구려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까닭에 신라 고유의 특징을 많이 가진다고 하며, 특히 돌을 깍아서 만든 석불과 마애불을 많이 만들었다고 한다. 경주박물관이 있는 까닭에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신라의 금동불상이 많이 있는 편은 아니다.


금동불입상(7세기전반)

편단우견의 옷을 입고, 허리를 약간 꺽은 자세를 취하며, 오른손은 아래로 내려 동그란 물건을 들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한 미소를 띠고 있어 친근감을 준다. 이러한 형식의 불상은 삼국시대 신라지역에서 특히 유행하였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신라는 삼국 중에서 가장 늦은 6세기 전반에 불교를 공인했다. 이에 따라 현존하는 대부분의 신라 불상은 6세기 후반과 7세기에 만들어진 비교적 늦은 시기의 것들이다. 여기에는 금동이나 돌로 만든 부처, 보살, 반가사유상이 포함되어 있다. 신라 불상은 중국 북위와 동위 불상의 영향을 보이는 예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불상은 중국 북제, 북주의 입체감 있는 불상의 영향이 직.간접으로 보이거나, 신라만의 묵직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을 특징으로 한다. 7세기에는 특히 화강암을 깍아 만든 비교적 큰 석불과 마애불을 많이 만들었는데, 이는 훗날 석굴암으로 대표되는 통일신라 석불 조성의 밑바탕이 되었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금동불의 제작방법
금동불은 동으로 주물한 뒤 도금한 불상을 말한다. 금동불은 대개 밀랍을 이용한 실랍법으로 만들었다. 실랍법에는 안틀을 두지 않는 방법과 안틀을 두는 방법 두 가지가 있다. 안틀을 두지 않을 경우에는 먼저 밀랍덩어리 자체를 조각한다. 그 다음에 바깥쪽에 진흙으로 된 틀을 씌우고 가열하여 밀랍을 제가한 다음, 쇳물을 부어 만들었다. 이에 비해 안틀을 두는 방법은 먼저 흙으로 간단한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섬세한 조각을 위해 밀랍을 입히는 점이 다르다. 이렇게 하면 밀랍이 입혀진 부분에만 쇳물이 들어가기 때문에 사용되는 놋쇠의 양이 절약되는 장점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