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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 신석기실] 신석기인의 어로, 수렵, 농경 생활과 정신세계

younghwan 2011. 3. 24.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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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석기시대는 빙하기가 끝나고 새로이 토기와 간석기를 만들어 정착한 시기를 말한다. 구석기시대부터 인류가 정착했던 한반도에서는 다양한 지역에서 신석기 유적이 발견되고 있다. 대표적인 신석기 유적으로는 서울 암사동, 양양 오산리, 부산 동삼동 등이 있으며 넓은 평야가 없는 한반도 지형의 특성에 맞게 농경을 주로 했다기 보다는 강가나 바닷가에서 고기잡이이와 사냥, 채집등으로 생활했던 것으로 보이며, 현재 발굴되는 유적지 또한 강가나 바닷가가 주를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에는 초기부터 농사가 시작되지는 않았고, 사냥과 어로 이외에는 산에서 도토리를 채집하여 저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농사는 주로 중기 신석기 이후의 유적에서 괭이, 따비, 낫 등의 농경용 석기가 출토되고 있다. 반면에 바닷가나 강가에 발견되는 유적지에서는 어로용 도구들이 많이 출토되는 것으로 봐서는 한반도 신석기인들에게 있어서 어로가 주된 생계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부산 동삼동 유적지에서 출토된 조가비로 만든 탈이다. 가리비 껍데기에 작은 구멍 두개를 내어 눈을 만들고, 큰 구멍 하나를 뚫어 입을 만들었다. 눈과 입 사이의 비례나 구도, 크기가 보통 솜씨가 아니다. 한반도 신석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이라 할 수 있다.

고기잡이의 시작
기원전 8천년 무렵 빙하기가 끝나면서 우리나라의 기후와 지형은 현재와 같은 양상으로 바뀌었다. 자연환경의 변화로 신석기인들은 사냥이나 야생식물 채집 외에도 새로운 생계 수단이 필요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가 고기잡이이다. 고기잡이는 우리나라 신석기인들이 농사를 짓지 않고도 정착 생활을 할 수 있었던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이는 신석기 시대의 집터가 주로 바닷가나 큰 강가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고기잡이는 동물의 뼈나 돌로 만든 작살, 낚시, 그물 등을 사용하였는데, 이 도구들은 주로 바닷가의 조개더미에서 출토된다. <출처:중앙박물관>


어로생활을 주로 했던 한반도 신석기인들이 많이 사용했던 것으로 작살이다. 작살은 돌이나 동물의 뼈로 만든 고챙이를 자루에 연결하여 물고기를 찔러 잡는 도구이다. 창처럼 손에 쥐고 던지거나 자루에 노끈을 연결하여 사용하는 것이 있다.


이음낚시(부산 범방동), 이음낚시는 신석기시대의 고기잡이 도구로 허리와 바늘을 돌과 뼈로 따로 만들어 끝으로 묶어 사용하였다. 주로 먼 바다로 나가 대구나 다랑어 등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이음낚시 허리


그물에 찍힌 토기(오른쪽, 부산 동삼동)와  그물추(왼쪽, 서울 암사동). 토기에 찍힌 그물 모양으로 옛 그물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도구 제작 기술의 발전
신석기시대에는 숫돌로 재료의 일부 또는 전체를 갈아서 만드는 마제기술이 본격화되었다. 돌과 뼈를 쪼갤 때 자연적으로 생기는 날을 이용하였던 구석기인들과는 달리, 신석기인들은 돌과 뼈를 원하는 형태에 맞춰 잘라내고, 갈고, 구멍을 뚫어서 날카롭고 정형화된 도구를 만들었다. 마제기술은 처음에는 도끼의 날을 세우는 데 쓰였지만 점차 낚시, 화살촉 등 석기뿐만 아니라 뼈 연모와 꾸미개를 만드는 데에도 널리 사용되었다. 마제기술이 생활 도구 전반에 걸쳐 쓰임에 따라 신석기인들의 생활문화는 한층 발전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숫돌


도끼


칼(강원 고성 문암리)


자귀


뼈 연모와 꾸미개

사냥은 사람에게 필요한 단백질을 공급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구석기시대부터 행해졌다. 큰 짐승을 사냥하던 구석기시대와는 달리, 신석기시대에는 사슴, 멧돼지 등 중소형 짐승과 날짐승을 사냥하게 되면서 사냥도구와 기술이 발전하였다. 창과 화살은 더욱 날카로워졌으며 형태도 정형화되었다. 특히 활은 사냥감에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먼 거리에서도 사냥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였다. 한편 신석기시대 여러 유적에서 발견되는 개뼈는 야생종과 사육종의 중간 형태를 띠는 것이 많아 개가 이때부터 사람들에게 길들여졌음을 추측케 한다. <출처:중앙박물관>


창은 사냥감에 다가가 찌르거나 던져 사용하는 창은 구석기시대 이래로 중요한 사냥도구였다. 신석기시대의 창은 구석기 시대에 비해 보다 날카로워지고 모양도 일정해졌다.


화살촉(왼쪽, 제주 고산리), 살촉은 슴베가 없는 것이 대부분으로, 살대를 갈라서 틈에 끼운 뒤 끈으로 묶어서 사용하였다. 동북.남부 지역에서는 주로 눌러떼기 방법으로, 중부 지역에서는 전체를 갈아서 만들었다.


흙으로 만든 멧돼지 (통영 욕지도)


동물 뼈(부산 동삼동). 조개더미에서는 사슴.멧돼지.개 등 여러 짐승의 뼈가 확인된다. 이 동물들은 식용 뿐만 아니라 연모를 만들고 가죽옷을 짓는데 이용되었다.

신석기시대
신석기시대는 빙하기 이후 달라진 자연환경에 적응하면서 새로이 토기와 간석기를 만들고 정착생활을 시작한 시기이다. 우리나라의 신석기시대 유적으로는 집터와 무덤, 조개더미 등이 있으며, 전국적으로 400여 곳에 이른다. 서울 암사동, 강원 양양 오산리, 부산 동삼동 등이 대표적인 유적이다. 신석기인들은 물과 식량이 풍부한 바닷가나 강가에 움집을 짓고 고기잡이와 사냥, 야생식물을 채집하면서 살았다. 이 시기에 조, 기장 등을 재배하는 농사도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다. 간석기와 뼈 연모는 더욱 효과적으로 식량을 구할 수 있는 도구였으며, 토기는 식량을 저장하고 음식을 조리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들은 실로 짠 옷감이나 동물 가죽으로 간단한 형태의 옷을 만들어 입었으며, 옥.동물뼈와 뿔. 조가비 등으로 몸을 꾸몄다. 또한 이들은 일본 열도, 중국 동북 지역, 러시아 연해주 등 주변의 여러 집단과 활발히 교류하였다.

도토리
야생식물 채집은 신석기시대의 중요한 생계 수단 중 하나였다. 특히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도토리는 신석기인의 주된 식량이었다. 서울 암사동, 강원 양양 지경리, 경남 창녕 비봉리 등 신석기시대의 여러 유적에서 저장해 놓았던 도토리가 출토되었다. 도토리는 떫은맛이 나는 타닌이라는 성분이 들어 있어 날로 먹기 힘들다. 신석기인들은 바닷가 진흙 구덩이나 토기에 도토리를 넣고 물을 채워 놓았다가 떫은맛이 빠지면 공이로 빻거나 갈돌과 갈판으로 가루를 내어 먹었다.


갈판.갈돌(서울 암사동) 갈판과 갈돌은 도토리나 가래 등 견과류를 가루로 만들거나 곡물의 껍질을 벗기는 데 사용되었다. 오른쪽편에는 경남 창녕 비봉리에서 출토된 옛 도토리를 볼 수 있다.

농사의 시작
농사는 고기잡이와 함께 신석기시대에 새롭게 시작된 생계수단이었다. 땅을 일궈 곡물을 재배하는 것은 인간이 특정 자원을 생산, 활용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석기시대에 들어서면서 곧바로 농사가 시작되지는 않았다. 중기 이후의 유적에서 괭이, 따비, 낫 등의 농경용 석기가 출토되었으며, 황해 봉산 지탑리, 부산 동삼동, 경남 진주 상촌리 유적 등지에서 탄화된 조와 기장이 출토된 점으로 보아 이때부터 농사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고기잡이와 사냥, 채집 활동이 중요한 생계 수단이었으며, 농사는 보조적인 수단에 머물렀다.


칼은 넙적한 돌의 한 쪽에 날을 세워 만든 것으로 이삭을 따는 도구이다. 신석기시대의 주요 곡물인 조.기장 등은 낟알이 잘 떨어지고 익는 시기가 달라, 칼은 여문 이삭을 골라 따는데 적절하였다.


뒤지개(서울 암사동. 부산 동삼동) 뒤지개는 알뿌리를 캐내고 땅을 고르는 도구이다. 오늘날의 삽, 괭이 등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였다.


공이(서울 암사동, 부산 동삼동)


꾸미개. 신석기인들은 동물의 이빨과 뼈.조가비.돌.흙 등의 재료를 가공하여 몸을 치장하였다. 꾸미개의 종류는 귀걸이.목걸이.팔찌.발찌 등이 있다. 이러한 꾸미개는 아름다움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의례 혹은 주술 등 상징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런 종류의 꾸미개는 현째까지도 여러곳에서 그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상징과 예술
생활이 안정되고 여유가 생긴 신석기인들은 자신들의 정신세계를 표현하고자 했다. 동물의 뼈나 뿔, 옥 등으로 자신의 몸을 꾸몄을 뿐만 아니라, 토기 겉면을 추상적인 무늬로 장식하는 등 나름대로 예술적 정서를 나타내었다. 신석기시대의 미술품은 주로 돌, 흙, 동물의 뿔과 뼈 등을 재료로 사람이나 동물의 형상을 만든 것이다. 이러한 미술품은 단순하면서도 상징성을 띠고 있어, 신석기인의 예술과 신앙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다.


조개껍질로 만든 팔찌(부산 동삼동)


장신구



 


여인상(왼쪽, 울산 신암리). 잘록한 허리와 풍부한 가슴으로 보아 여인상으로 보인다. 이 상에는 풍요와 안정을 기원하는 신석기인들의 꿈이 담겨 있다. 덧무늬토기는 한송이의 꽃처럼 덧무늬가 토기 전체에 장식되어 있다. 이것은 미리 공간을 나누어 덧무늬를 채워 넣은 것으로 신석기인들의 뛰어난 공간 구성 능력과 미적 감각이 돋보인다.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신석기인의 생활모습과 정신세계를 잘 보여주는 울산반구대 암가화이다. 그 연대는 정확히 알려진 것 같지는 않고 후기 신석기 또는 청동기 초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어로를 중심으로 생계를 이어갔던 한반도 신석기인의 바램을 보여주고 있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에 위치한 반구대 바위그림이다. 태화강변의 바위절벽을 쪼아서 만든 것으로 사람을 비롯해 사냥대상이던 고래, 거북이, 사슴, 호랑이, 멧돼지 등이 등장한다. 사람은 짐승을 사냥하거나 배를 탄 모습, 그리고 춤을 추는 형태로 나타나는데 성기를 강조한 경우가 많다. 짐승은 그물이나 우리에 갇히거나, 새끼를 배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 바위그림은 시베리아 일대의 선사시대 바위그림들과 비교되며 사냥 및 고기잡이의 성공을 빌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출처:중앙박물관>

 


신석기시대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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