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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 특별전] '145년만의 귀환, 외규장각 의궤', 왕실의 장례

younghwan 2011. 7. 28.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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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국가였던 조선시대에서 국가적인 행사 중 가장 중요하고 큰 행사는 아마는 왕실의 장례행일 것이다. 그 중 왕의 장례 절차에는 새로운 국왕의 즉위도 포함되어 있어서 정치적으로도 상당히 중요했다. 조선 숙종때 대비의 복식에 관한 남인과 서인의 예송논쟁에서 볼 수 있듯이 절차 하나하나가 첨예한 정치적 행위였다고도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왕이 승하하면 거국적인 규모의 빈전도감, 산릉도감, 국장도감 등이 설치되어 일을 주관하였는데 대부분 영의정급에 해당하는 인물이 주도했다고 한다. 빈전도감은 왕의 시신을 재궁에 안치하는 산릉까지 모시는 발인전 5개월간의 장례를 주관했으며, 국장도감은 국장행렬을 재궁에서 장지인 산릉까지 모시는 일을, 산릉도감은 왕릉을 조성하는 일을 맡았다고 한다. 국와의 장례절차는 각 도감에 정한 예법에 근거한 장례절차에 따라 엄격하게 시행되었으며, 그 기록들은 보고서 형태로 의궤로 남겨놓고 있다. 의궤의 형식은 대체로 조선후기 영조대에 체계화되었다고 한다.

왕실의 장례
왕과 왕비의 장례는 나라 전체의 애도 속에서 엄숙하게 치러졌다. 왕이 승하하면 당일로 장례 절차를 담당할 임시 관서인 빈전도감, 산릉도감, 국장도감 등이 설치되어 일을 주관하였다. 국왕의 승하가 선언되면 5일 간 그 혼이 돌아오기를 기다린 후 입관하였다. 예법에 따라 입관 후 5개월 동안 빈전에 시신을 모신 재궁을 안치하였는데, 빈전도감에서 담당하였다. 산릉도감에서는 무덤이 산릉의 조성을 담당하였다. 빈전에 모신 재궁을 장지인 산릉까지 모시는 의식은 왕이 임종한 지 5개월이 되는 달에서 길일을 골라 치렀다. 국장도감이 주관하는 국장행렬은 재궁을 대여에 옮겨 실은 후 노제를 거쳐 장지로 향하였다. 왕릉 조성이 끝나면 우제를 지내 혼을 위로하고, 신주를 모시고 궁궐에 돌아와 혼전에 모셨다. <출처:중앙박물관>

빈전도감에서 거행하는 의식
국왕이 승하하면 국장을 치르기 위해 각종 도감들이 설치되었는데, 국왕의 시신을 수습하고 빈소를 차리는 것은 빈전도감의 일이었다. 장례 후 신주를 혼전에 모시고 삼년상을 치르기 위해 혼전도감이 따로 설치되기도 했지만 대부분 빈전도감에서 함께 주관하였다.

0 복: 내시가 궁궐 지붕에 올라가 왕의 옷을 흔들며 "상위복"이라고 세 차례 외친다. 이는 죽은 왕의 혼을 부르는 것이다.
0 염습: 습은 왕의 시신을 목욕시키고 수의를 입히는 것, 염은 옷과 이불로 시신을 감싸는 것이다.
0 성빈: 염습이 끝난 시신은 장례 때까지 빈전에 모셔졌다. 왕의 관은 재궁이라 하였으며, 이를 다신 찬궁이라는 큰 상자에 넣어 빈전에 모셨다.
0 성복: 승하 6일째 되는 날, 상주가 상복으로 갈아 입는다.
0 사위: 왕세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을 맗나다.
0 상시책보의: 죽은 왕에게 시책과 시보를 올리는 의식이다. <출처:중앙박물관>


효종빈전혼전도감의궤, 1659년(현종즉위), 효종의 빈전과 혼전 설치에 관한 기록으로 각종 기물의 설치 등을 그림과 함께 아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효종의 시신 염습과 안치를 담당한 빈전도감과 장례 후 신주를 모시고 삼년상을 담당한 혼전도감의 일을 기록한 의궤다. 책머리에 소선, 명정, 영좌, 찬궁, 영침 등 빈전도감에서 담당한 12종 기물의 도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의궤는 빈전도감의궤와 혼전도감의궤가 1책으로 합쳐져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인선왕후빈전도감의궤, 1674년(현종 15), 인선왕후의 빈전 설치에 대한 기록이다. 사진의 내용은 시신을 이불로 싸서 관에 안치하는 의식인 대렴 大斂에 대한 절차를 기록해 놓은 부분이다.

효종의 비 인선왕후의 빈전 설치와 운영에 관한 의궤다. 승하 5일째인 2월 28일 대령을 마친 시신을 재궁과 찬궁에 넣어 융복전에 마련된 빈전에 모셨다가 5월 28일 발인하여 장례를 치렀다. <인선왕후혼전도감의궤>와 짝을 이루는 의궤다. <출처:중앙박물관>


헌종빈전혼전도감의궤, 1849년(철종즉위). 헌종의 빈전, 혼전 설치에 대한 기록으로 영조대에 체계화된 의궤의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사진의 내용은 왕위를 이어받은 의식인 '사위'의 절차를 기록한 내용이라고 한다.

헌종의 빈전과 혼전을 설치하고 의례를 거행한 과정에 관한 의궤다. 국왕의 빈전혼전도감의궤에는 후계 왕이 왕위를 이어 받는 의식인 '사위'가 포함되어 있다. 이 의궤는 양도감이 '빈전혼전도감'으로 일원화된 한편, 목차가 생기고 항목이 세분화되고  3책으로 분량이 늘어나는 등, 영조 대 후반 이후 변화가 생긴 19세기 의궤의 체재를 보여준다. <출처:중앙박물관>

왕위를 이어 받는 의식
그날 전설시에서 (왕이 임시로 머물) 악차를 빈전 문 밖의 동쪽에 북쪽 가까이 남향하여 설치하고, 액정서에서 어좌를 악차의 안에 남향하여 설치하고, 또 욕위(요를 깔아 마련한 자리)를 빈전의 뜰 동쪽에 북향하여 설치한다. 병조에서 여러 위의 군사를 거느리고 내.외정의 동쪽과 서쪽, 내.외문에 배치한다. - 군사는 모두 무기와 군복을 갖춘다. - 전의가 문관 1품 이하 관원의 자리를 명정전 뜰의 길 동쪽에 설치하고, 종친과 무관1품 이하 관원의 자리를 길 서쪽에 설치하되, 모두 매 등급마다 자리를 달리 하여 두 줄로 북향하며 서로 마주보는 쪽을 수위로 한다. <출처:중앙박물관>


소금저(관에 옻칠한 후 씌우는 상자형의 덮개)의 그림과 설명

국장도감에서 행하는 의식
0 발인:왕의 상여가 궁을 떠나 능으로 감
0 노제: 장지로 가는 중간에 길에서 지내는 제사
0 하현궁: 임금의 관(재궁)을 구덩이(현궁)에 묻음
0 제주: 장사후 첫 제사(우제)에 쓰이는 신주인 우주에 글자를 씀
0 반우: 우주를 모시고 궁궐로 돌아옴


헌종국장도감의궤, 1849년(철종즉위), 헌종의 장례

헌종의 국장 과정을 기록한 의궤로 총 4책 중 제 1,3,4책만 있으며, 3책 모두 초록색 비단표지와 변철 등 제작 당시의 장정을 유지하고 있다. 그 중 삼바의궤에는 시책, 시보, 애책, 증옥, 증백, 삽선, 만장, 제기 등의 채식 도식이 있어 재료와 제작 방법을 알 수 있다.<출처:중앙박물관>


헌종국장도감의궤 표지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 1688년(숙종14), 장렬왕후의 장례를 기록한 의궤로 사진은 발인행렬을 그린 발인반차도이다.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장례에 관한 의궤로 상.하 2책 중 도청, 일방, 별공작의 업무가 기록된 상책만 남아 있다. 발인 반차도를 보면, 왕비의 관(재궁)을 실은 대여의 좌우에 보삽, 불삽, 화삽 각 2명, 집탁 호군 16명이 나누어 서고, 그 밖으로 좌우 각 6명이 장막을 쳐서 외인들이 볼 수 없게 하였다.


소현세자예장도감의궤, 1645년(인조23).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의 장례에 관한 의궤다.

의궤의 구성은 도청의궤, 일방의궤, 이방의궤, 삼방의궤 순으로 구성되었으며, 총 12면인 반차도는 현존하는 세자의 장례 관련 반차도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다. 백택기, 현학기, 표골타, 금동 등 의장물이 행렬좌우로 늘어섰는데, 왕의 발인 행렬에 비해 그 종류와 규모가 적다. <출처:중앙박물관>


현빈예장도감의궤, 1751년(영조27), 현빈 조씩의 장례

영조의 장남 효장세자의 빈인 현빈 조씨의 장례 절차에 관한 의궤다. 현빈은 1727년 가례를 올렸으나 이듬해 효장세자가 요절하여 홀로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재궁을 실은 대여의 뒤로는 배왕대장, 종사관 2명, 예장도감 일방 감조관 2명에 이어 곡을 담당하는 궁인 14명이 너울을 쓰고 말을 타고 따라가는데, 곡궁인의 주위는 흰 베로 만든 장막으로 둘러 막았다. <출처:중앙박물관>


의소세손예장도감의궤, 1752년(영조 28). 세살의 어린 나이에 죽은 사도세자의 맏아들 의소세손의 장례에 관한 의궤로, 상.하 2책이다. 상책에는 반차도가 수록되었는데, 행렬의 전반부에 소.사기.악기.복완 등을 실은 채색 가마와 그 좌우로 죽산마, 죽안마 등의 의장물이 배치되었다. 
 

하책 이방의궤에는 면류관, 푸른 색 겉옷, 치마 등 의소세손의 각종 복완이 선명한 색감의 채색 도설로 수록되었다.


의소세손 무덤의 부장품, 1752년 경

의소세손은 1751년(영조27)에 세손으로 책봉되었으나 이듬해인 1752년 어린 나이에 죽어 의령원에 안장되었다. 의소세손의 명기류는 제기의 일종인 보와 궤, 청화안료로 장신된 소합과 항아리 등이 백자로 만들어졌다. 이 외에도 채색자기와 화장용 내용물을 담은 청동제의 기물이 포함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문효세자예장도감의궤, 1786년(정조10), 다섯살의 나이로 죽은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의 장례 과정을 기록한 의궤로, 상.하 2책이다. 상책의 일방의궤에는 무덤에 함께 묻을 복완과 명기의 종류와 수량이 적혀 있다.


하책의 삼방의궤에는 신주의 구성과 제작방범, 재료 등에 대한 설명이 채색 도설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문효세자 효창원 부장품

문효세자는 정조가 의빈 성씨에게 얻은 아들로, 1782년에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1786년 어린 나이에 죽었다. 효창원에 안장된 문효세자의 명기류는 도기호, 청동호, 석제 벼루와 합, 그리고 백자로 만들어진 연적, 합, 소호 등으로 구성되었다. 청화안료로 장식된 '만수만복'의 글귀가 눈에 띈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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