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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_정원

오늘날의 웃대, 인왕산 아래 조선시대 중인들의 거주지

younghwan 2011. 9. 26.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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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웃대는 인왕산 기슭 아래 조선시대 중앙 관서에서 일하던 하급관리들을 중심으로 중인계층을 형성했던 사람들이 모여살았던 지역을 말하며 지금의 효자동 사거리에서 사직단 입구까지의 종로구 사직동.통인동.옥인동 등의 지을 말한다. 인왕선은 서울의 서쪽 백호에 해당하는 산으로 바위암봉을 중심으로 서울에서도 경치가 아주 좋은 지역으로 정선의 대표작 '인왕재색도'를 비롯하여 조선시대 많은 화가들이 이 곳 경치를 그림으로 남겨 놓고 있다.

 조선후기에 그려진 도성대지도에 나타난 당시의 명소나 지명으로는 청운동 54번지 일대 청계천의 발원지이기도 한 청풍계, 옥류동천이 흐르던 옥인동,통인동 일대의 옥류동, 광해군때 세운 인경궁 누각이 있었던 누각동, 백사 이항복이 살았던 집터인 필운대 등이 있으며, 구한말 대표적인 친일파 윤덕영 일가의 저택인 벽수산장에 있었던 송석원 등의 명소가 있었다.

 서울의 권문세가들이 살았던 북촌은 개량한옥을 비롯하여 여러 저택들이 남아 있는 것에 비해서 이 곳 웃대에서는 오래된 마을이기는 하지만 옛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고택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일제강점기를 비롯하여 그 이후에 지어진 양옥집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 또한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중인계층의 특성을 잘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중인계층으로 분류되었던 사역원 역관을 비롯한 중앙관서의 하급관리들이 주로 거처했던 인왕산자락 아래 마을은 지금도 알 수 있듯이 경복궁 앞에 있던 육조관아와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역 아래쪽에 주로 잡일을 보던 하급군인이나 신분이 낮은 사람이 거처했고 위쪽에 주로 중인들이 거주했다고 했더 웃대라고 불렀다.


서울 경북궁 경회루 연못에서 본 인왕산. 백호에 해당하는 서울의 명산으로 바위산이 상당히 빼어난 경치를 자랑한다. 정선의 인왕재색도롤 비롯하여 많은 그림에 묘사된 수도서울의 절경이다.


18세기 후반에 그려진 도성대지도에 묘사된 한양 웃대. 지금의 자하문 안쪽에 위치한 청운동 54번지 일대 골짜기를 말하는 청풍계에서 사직단까지 인왕산 도로 아래쪽에 주로 살았었다고 한다. 지도에는 당시의 명승지와 주요 마을이름인 청풍계, 옥류동, 누각동, 필운대, 인달방, 도가동, 송목동, 체부청동,전립동 등이 묘사되어 있다.

청풍계: 인왕산 동쪽 기슭의 북쪽 종루구 청운동 54번지 일대 골짜기를 일컫는 이름이다.
옥류동: 종로구 옥인동.통인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 맑은 물이 흐르는 곳인데서 유래되었다.
누각동: 누상동에 있던 마을로, 이 곳에 광해군 때 세운 인경궁 누각이 있었다고 전하는 데서 마을이 유래되었다.
필운대: 선조대 이항복이 그의 장인 도원수 권율의 집에서 처가살이를 하면서 호를 필운이라 하고, 부근 바위에 '필운대' 세 자를 새겼다.
인달방: 조선초기부터 있던 한성부 서부 9방 중의 하나이다.
도가동: 필운동에 있던 마을로, 물건을 제조 판매하는 도가집이 있어 유래되었다.
송목동: 누상동.누하동.필운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 소나무가 많아 유래되었다.
체부청동: 비상시에 군대를 지휘하거나 기타 군사업무를 맡아보는 체찰사부가 있었기에 유래되었다.
전립동: 벙거지를 만드는 집이 있어 유래되었다.
<자료출처:서울역사박물관>


경복궁 서북쪽 청와대 입구의 분수광장. 이 주변에는 조선중기 광해군때 세운 인경궁이라는 궁궐이 있었다고 하며 자하문 앞 백운동천에서 시작한 물길이 도심으로 들어오는 지역으로 이 지역 주변에는 권문세가들이 주로 거주했다고 한다.


효자동 사거리에서 웃대라 일컫을 수 있는 옥류동천이 있는 지역으로 올라가는 길. 이 곳에 있는 국립농학교에는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어머니를 모신 선희궁이 자라집고 있다. 이 곳에는 인경궁 누각이 있던 동네라 하여 누각동이라고 한다.


국립농학교 앞 도로에 심어진 은행나무.


사도세자의 어머지이자 영조의 후비인 영빈이씨를 모신 사당인 선희궁. 원래는 옛터만 남았던 곳에 건물을 세워서 복원하였다고 한다.


옛 누각동 중심을 관통하는 도로. 사직단입구까지 연결된 도로이며, 옛날에는 이도로를 따라서 소나무숲이 우거졌다고 하여 주변을 송목동이라 불렀다. 이 도로를 기준으로 윗쪽에 주로 중인들이 살았다고 하여 웃대라고 불렀다.


옥류동천이 있는 능선에 들어서 있는 주택가를 올라가는 계단길. 웃대에 있는 주택들은 북촌과는 달리 개량한옥보다는 60년대에 세워진 양옥집들이 많다. 이는 변화에 민감한 중인계층의 성향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능선 전망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60년대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양옥집.


능선 주택가 골목길.


능선에서 내려다 보이는 옥인동 일대 주택가. 중앙에 보이는 낡은 기와집이 구한말 친일파 윤덕영이 첩을 위해서 세운 한옥집이다. 이 집은 남산골 한옥마을에 옛모습을 복원해 놓고 있다. 기와집을 중심으로 언덕 대부분은 윤덕영 일가의 저택들인 벽수산장이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에는 옥류동천에서 흐르는 맑은 물이 흐른다고 하여 옥류동이라고 불렀다.


남산골 한옥마을에 복원된 옥인동 유씨가옥. 이 가옥은 원래 조선 마지막 왕비인 '순정효황후 윤씨 친가'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친일파인 윤덕영이 만든 벽수산장의 일보로 그의 첩을 위해서 만든 가옥이라고 한다.


누각동에서 옥류동천으로 올라가는 골목길.


웃대를 흐르던 옥류동천이 시작도는 지점에 위치한 옛 옥인아파트 자리. 지금은 철거되어 공원으로 조성되고 있다. 이 곳에는 원래 조선시대 안평대군의 집터가 있었다고 한다.


옥인동 백수산장 부근의 골목길


옥인동 친일파 윤덕영이 그의 딸을 위하여 1930년대에 지은 박노수가옥. 구한말 한옥양식과 중국시, 서양식 양식이 섞여 있는 가옥으로 1970년대 이후 동양화가 박노수 선생이 이집을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옥인동 박노수 가옥, 서울 종로구 옥인동 168-2
이 집은 일제시대 대표적인 친일파인 윤덕영이 그의 딸을 위하여 지은 것이다. 집터의 뒤쪽에는 추사 김정희가 당시 문인들과 모여서 풍류를 즐기던 곳인 송석원을 음각으로 새긴 바위가 있었다. 이 집은 조선 말기의 한옥 양식과 중국식, 서양식 수법들이 섞여 있는 절충식 가옥이다. 반 지하층을 포함한 2층 집인데 1층에는 벽돌조로 온돌방, 마루, 복도, 응접실이 있다. 2층은 목구조로 지었는데, 이곳에는 계단실을 중심으로 마룻바닥으로 된 방들이 있다. 건물의 서쪽 모퉁이에는 벽돌 아치로 포치가 덧붙여진 현관이 잇다. 집 안에 벽난로가 3개 있었고, 2층에는 베란다가 있었는데 여기에 방을 덧달아 내었다. 지붕은 서까래를 밖으로 드러내 추녀를 달아낸 단순한 박공지붕으로 되어 있다. 1972년부터 통양화가 박노수 선생이 이집을 소유하였는데, 2층의 증축부분을 제외하면 원형이 잘 남아 있어 1930년대 후반의 한국인 건축가의 저택 설계를 잘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출처:서울시청>


벽수산장이 있던 이집 뒷편 언덕은 추사 김정희가 당시 문인들과 모여서 풍류를 즐기던 곳인 송석원을 음각으로 새긴 바위가 있었다. 웃대에서도 경치가 좋았던 곳으로 많은 웃대인사들이 이곳에서 풍류를 즐겼던 곳으로 송석원이라고 불린다.


사직단 뒷편 배화여고 교정아래에는 아직까지 남아 있는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개량한옥을 볼 수 있다.


마을 뒷편에 있는 조선시대 활터인 백호정터. 이 곳에 활터가 있었다는 것은 구한말까지는 이곳에 주택이 들어서지 않고, 활터로 사용할 정도로 넓은 공터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주택들이 들어섰던 것으로 보인다.

백호정터, 종로구 누상동 1-33
이곳 백호정은 인왕산 기슭에 있었던 무인의 궁술연습장으로 유명했던 조선전기의 오사정의 한곳으로 북촌 제일의 활터였으며 바위에 백호정이란 각자는 숙종때 명필가 엄한명(1685~1759)의 글씨로 추정된다. 지금은 부근에 주택이 들어서서 활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으나 선대의 시인묵객들이 찾았던 명승지이다. <출처:서울시청>


이 동네에 남아 있는 개량한옥


인왕산으로 올라가는 길. 이 길을 따라 올라가면 조선시대 대표적인 활터인 황학정과 연결된다.


인왕산자락을 따라서 흘러내리는 작은 개울


웃대에서 사람들이 많이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 필운대가 있었던 배화여고 아래쪽 동네.


사직단에서 웃대 중심을 가로지르는 거리. 이 거리를 기준을 윗쪽을 웃대라고 했던 것 같다. 주변에는 조선시대 한성부 서부9방 중 하나인 인달방, 벙거지를 만드는 집이 있던 전립동, 물건을 만들어 팔던 도가동 등이 있다. 옛날부터 상당히 활발했던 웃대 초입에 해당하는 거리이다.


백사 이항복이 살았던 집터인 백운대가 있는 배화여고로 올라가는 길.


필운대 각자. 백사 이항복이 처가집인 권율장군 집에 얹혀 살던 시절에 바위에 적을 글씨라 한다. 지금은 옛 집터는 남아 있지 않고 배화여고 교정 뒷편에 글자가 적힌 바위만 남아 있다.


필운대 각자 옆 바위에 그의 후손들이 새긴것으로 보이는 한시.


필운대 뒷편 언덕에 세워진 작은 정자.


배화여고 교정 언덕에서 내려다 본 웃대.


필운대 입구에서 보이는 서울 도심의 경치



오늘날의 웃대
조선시대 웃대는 도로 정비로 인하여 사직로 북쪽 지역으로 한정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백운동천과 옥류동천의 물길은 모두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로 덮여서 옛 지형도 변화되었고, 근대시기 경복궁 영추문 앞으로 효자역 전차종점이 생겨나면서 웃대의 장소성은 크게 변동되었다. 조선 중인들의 위항 문학을 꽃피웠던 송석원 터에는 친일파로 알려진 윤덕영의 벽수산장이 들어서고, 영조의 잠저인 창의궁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사택이 들어서고, 비해당 안평대군의 집터였던 수성동에는 옥인아파트단지가 세워지는 등 역사문화경관도 많이 훼손되었다. 아울러 경복궁과 인접한 지역에는 한옥을 개량한 카페와 갤러리들이 들어섰으며, 조선시대 궁가와 권력층들의 부지에는 병원과 학교 등 근대시설물이 들어섰다. 한편 체부동을 비롯한 여러지역에는 옛 골목길과 물길의 흔적이 현재의 지층 아래 각인되어 남아 있다. 그리고 옛 도시조직이 남아 있는 곳에는 많은 도시한옥이 산재하고 있어 웃대의 풍광을 지속시키고 있고, 물소리 맑은 수성동 계곡에는 기린교가 남아서 과거의 기억을 전해주고 있다. 옛 중인들의 삶과 일상 공간은 근.현대 시기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상, 짧은 인생을 살가간 시인 윤동주,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이중섭과 이상범, 박노수가 이곳에 살면서 작품 활동을 하는 등 20세기 서울에서 가장 중요한 예술의 현장으로 장소성을 이어가면서 웃대의 역사문화경관을 지속시켰다. 그리고 서민들의 삶의 모습이 잘 드러나는 통인시장과 금천시장 같은 오래된 시장이 이러한 변화된 도시조직 속에 공종하면서 현재를 살아가는 도시 일상의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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