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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 특별전] "문자, 그 이후: 한국고대문자전", 삼국시대의 비석

younghwan 2011. 11. 16.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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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석은 어떤 인물이나 사건 등을 기념하기 위해 돌.목재.철재 등에 글자와 조각 등을 새겨 넣은 기념물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졌으며, 주로 돌에 글자와 조각상을 새겨놓은 것들이 많이 남아 있으며 이를 통해 오늘날 사람들이 과거에 일어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과거에 일어난 사실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비석과 같은 형태의 기념물로는 고대 메소포타미의 함무라비법전,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석할 수 있게 단초를 제공해 준 로제타스톤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비석들이 남아 있다. 동양에서 비석은 주로 돌에 글자를 새긴 석비의 형태로 중국 주나라부터 시작되어 한대와 당대를 거치면서 거북받침돌, 비몸, 머릿돌을 갖춘 전형적인 석비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비석 중에는 85년에 만들어진 평남 용강군에 있는 점제현신사비가 가장 오래되었다고 한다. 삼국시대에는 다양한 목적으로 비석들이 많이 세워졌는 광개토대왕비, 진흥왕순수비 등  통치자를 찬양하거나 정치적 의도 등을 널리 알리기 위해 세운 것도 있으며, 포항 중성리비처럼 재산권을 조정하거나, 남산 신성비나 무술오작비처럼 성곽이나 제방을 쌓고 그 책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 등 국가를 통치하고 법령과 제도를 알리기 위한 비석들이 많이 세워졌다. 통일신라 이후에는 주로 왕이나 고승, 유명인사들의 업적을 칭송하기 위한 비석들이 많이 세워졌는데 당의 양식을 받아들여 거북받침돌, 비몸, 머릿돌로 이루진 정형화된 비석이 주를 이룬다.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인 "문자, 그 이후:한국고대문자전"에서는 삼국시대에 세워진 중요한 비석들인 광개토대왕비 탁본을 비롯하여 남산신성비, 진흥왕순수비 탁본 등과 일본의 중요 비석(복제품) 등을 전시하여 동시대 사람들이 세웠던 여러 비석들의 형태와 내용들을 체계적으로 살펴볼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문자와 통치
중국과 교류를 통해 수용된 문자는 먼저 국내통치와 국제외교에 활용되었다. 백제가 만든 칠지도 명문에는 특별한 강철제련기술로 이 칼이 만들어졌음을 강조하였다. 포항 중성리비는 신라 지배자들이 화백회의를 거쳐 지방의 재산권을 조정하는 법령비이다. 법령 공포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성곽이나 제방을 쌓는 과정에서도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 남산신성비는 완공 후 3년간 성의 튼튼함을 보증하는 내용이다. 무술오작비는 논농사에 필요한 수리제방을 쌓고 이를 기록한 비석이다. 문자가 통치에 활용되면서, 행정관리가 문자사용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른바 '史사', '도필지임'이라 불리던 사람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문서와 기록 작성을 위해 나무판에 문자쓰기를 익혔으며 이에 지치면 얼굴을 그리거나 낙서를 하기도 하고 돈이 없어 높은 벼슬에 오르지 못한다고 한탄하기도 하였다. 정창원 소장 신라촌락 문서와 사발문서는 일종으 호적과 세금장부이다. 이들 문서는 불경두루마리의 속지 혹은 사발을 싸는 포장재로 재활용되었던 것으로, 종이가 소중히 사용되었음을 알려 준다. <출처:중앙박물관>



포항 중성리 신라비(복제품), 신라 지증왕 2년(501), 경북포항

501년에 신라 지배층이 포항 중성리 지역 호족에게 명을 내려, '궁' 즉 토지를 지배할 수 있는 권리를 조정한 내용에 대해서 기록한 비석이다. 이제까지 알려진 신라 비석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포항 중성 신라비에 새겨진 글씨


영일 냉수리신라비(복제품), 국보 264호, 503년, 포항시

503년에 신라 지뱅층이 포항 냉수리 지역의 호족이 절거리에게 재물에 관한 권리를 보장하는 명령을 내린 비석이다. 지배귀족이 논의를 통해 명령을 결정하였으며, 일을 마치고 소를 잡아 제사를 지낸 뒤, 비석을 세웠다. <출처:중앙박물관>


사택지적비, 645년, 부여 부소산성

백제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대좌평 사택지적이 654년 불교 사찰을 세운 것을 기록한 비석이다. 중국 남조에서 유행하던 병문으로 썼다. 비석의 왼쪽은 파손되고 오른쪽만 남아 있다. 오른쪽 측면은 봉황(혹은 삼족오)이 새겨져 있다. 현재 전하는 백제의 유일한 비석이다. 사택씨는 6~7세기 백제의 대표적 귀족이었다. <출처:중앙박물관>



'上阝(상부)'새김돌, 백제, 부여

이 표석은 부여 동남리 향교 동쪽의 논에서 발견되었다. '부阝'는 백제 초기의 경우 연맹체를 이루는 하나의 단위였으나 웅진천도 후 도성 내 귀족의 주거지역을 편제하는 단위로 바뀌었고, 사비천도 후에는 그러한 성격을 더욱 심화시켰다. 이 표석은 사비시대에 도성을 5부 혹은 6부로 나우었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출처:중앙박물관>


사천신라비(복제품), 경남 사천

이 비는 대규모의 국가적 불교행사와 관련하여 세운 거으로 추정된다. 앞뒤 양면에 글을 새겼는데, 천자는 중국 당나라 측천무후시대에 만든 문자를 사용하였다. 신술이라는 글귀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8세기 후반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이 시기 신라의 중앙과 지방의 관계, 중국과의 교류를 알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다코비(복제품), 711년, 일본. 711년 주변 지역을 떼어내어 다코군을 신설하고 관리를 임명한 것을 기록하였다. 일본 고대 3대비 가운데 하나다.


경주 명활산성비, 551년, 경주 명활산성

551년 11월 중에 명활산성을 쌓고, 거기에 관여한 지방관, 역부를 동원한 지방의 촌주, 공사의 실무자와 공사내용, 비의 위치, 공사기간, 비문을 작성한 사람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비는 신라의 금석문 가운데 군郡이란 표기가 나오는 최초의 것으로 군제의 정비와 관련하여 귀중한 자료이다. 이 밖에도 통일기 이전 신라의 신분제와 관등제, 역역동원 관계 등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경주 남산신성비(제1비), 591년, 경주 탑동 식혜곡

남산신성을 쌓을 때는 각지에서 돌을 다듬는 기술자와 인부가 동원되었다. 행정처리를 하는 서기와 이들이 동원된 마을의 우두머리인 촌주가 통솔하였으며 중앙관리가 공사를 관리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경주 남산신성비(9비), 경주 남산신성


남산신성비에 새겨진 글씨

남산신성비는 모두 10기가 발견되었는데, 공사구간마다 세워졌으므로, 신성의 전체 둘레가 4.5km임을 생각하면 200기 이상의 비석이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멀리는 충북 옥천, 경북 영주, 경남 함안과 가깝게는 경주 등 전국 각지에서 마을 단위로 인력이 동원되었다. 가까운 곳에서 더 많은 인원을 동원하였으며 공사구간도 많았다. 남산신성 추겅은 왕경과 지방 사람이 모두 동원된 국가의 대토목공사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신라 관문성의 글자새김돌, 경주 관문성

관문성은 일본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세워졌다. 성벽에서 10개의 석각이 발견되었는데, 구간별로 축성을 담당한 군현이 작업한 구역 등을 기록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무술년에 제방을 짓고 세운 비석, 보물 516호, 578년, 대구 대안동

이 비는 578년 무동리촌에 오(塢:저수지나 제방)를 쌓고, 그것을 만드는데에 관여한 책임자들의 이름, 오의 규모, 동원된 인력, 작업기간 등을 기술한 것이다. 이 비에서 오를 쌓을 때의 책임자가 지방관이 아니라 승려라고 밝히고 있다. 무술오작비는 신라시대의 수리시설 문제나 촌락민의 역역 동원과 관련된 내용, 촌으 성격 등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법화경 석경, 경주 창림사지


법화경 조각


법화경에 새겨진 글씨


창녕에 세운 신라 진흥왕의 비석 탁본,

561년 진흥왕이 여러 신하와 함께 행차하고 세운 비석이다. 신하 가운데는 사방 군주 즉 지방장관이 모두 참석하였다. 1년 뒤에 대가야가 멸망하기 때문에, 영토를 확인하고 가야지역으로 진출하려는 의지를 담은 비석이라는 설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마운령에 세운 신라 진흥왕의 비석 탁본

568년 진흥왕의 영토확장과 선정을 칭송한 부분, 변경지역을 두루 순수하고 백성들에게 훈시한 사실, 진흥왕을 따라 왔던 신료의 관직과 이름을 기술한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마운령비는 진흥왕이 영토를 함경도 함흥지역까지 넓혔음을 알려주는 증거 자료이다. 뿐만 아니라 대창이라는 연호의 사용, 6부명, 관직과 관등, 인명은 중고기 신라의 정치사 및 제도사를 이해하는 데 기초자료가 되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단양 적성에 세운 신라비석 탁본

신라가 소백산맥을 넘어 단양의 적성을 고구려로부터 빼앗은 이후에 이사부를 비롯한 대중과 군주, 당주 등이 회의를 열어 공을 세운 현지인들에게 포상하기로 결정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왕명의 형식을 현지인인 야이차 등에게 전사법 등에 의거하여 포상한다는 내용이다. <출처:중앙박물관>


단양 적성에 세운 신라비석의 조각


울진 봉평 신라비(복제품), 국보 242호


봉평신라비에 새겨진 글씨

524년(신라 법흥왕 11)에 신라 지배층이 울진 봉평리 지역에 명령을 내린 내용을 기록한 비석이다. 명령을 이행한 뒤 소를 잡아 제사를 지내고, 책임자에게 형벌을내렸다. <출처:중앙박물관>


다기죠비(복제품), 714년, 일본. 다가죠의 위치, 성의 건립과 수리를 기록하였다. 다가죠는 고대 동북 변방의 군사요지이며, 다가죠비는 고대 일본의 3대 비석 가운데 하나다.


다가죠비에 새겨진 글씨


세계에서 가장 큰 비석,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비는 옛 고구려 수도인 국내성 동쪽 언덕에 있다. 광개토대왕이 죽은 뒤 그 아들인 장수왕이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높이 6.39m로 세계에서 제일 큰 비석이다. 거대한 자연석에 새겨진 1,802자는 시조 주몽으로부터 광개토대왕에 이르기까지 왕의 계보, 영토확장을 중심으로 한 광개토대왕의 화려한 정복사업, 광개토대왕릉을 비롯한 고구려 왕들의 무덤을 지키는 묘지기에 대한 법령규정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이 비문을 통해 4~5세기 동아시아의 국제정세, 고구려으 촌락과 인구 편성을 알 수 있다. 고층건물이 없었던 당시 고구려 서울 한복판에 우뚝 솟은 거대한 비석은 고구려 왕권의 자부심과 국가 상징물로 오랫동안 기억되었을 것이다. 광개토대왕비를 비롯해, 중원고구려비, 호우총의 호우 등 고구려 문자문화는 백제와 신라, 일본보다 앞선 것으로 동아시아 문자문화를 선도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광개토대왕비 원석탁본, 18세기, 원레 미즈타니씨가 갖고 있었던 것이어서 미즈타니본으로 알려진 탁본이다.


광개토대왕비 석회탁본

원석 탁본과 석회탁본
중국 청나라 말기 세상에 다시 주목을 받게 된 광개토대왕비는 당시 고증학의 발달로 그 탁본이 높은 가격에 거래되었다. 광개토대왕비는 매우 커서 탁본을 뜨는 데 많은 노력이 들었다. 그러나 천오백년간 비바람에 시달린 비석은 비면이 닳아 잘 보이지 않는 글자들이 많았다. 탁본을 떠서 생계를 잇는 탁공들은 1890년대 초 비면에 석회를 발라 글자획을 뚜럿하게 만들고 탁본을 뜨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탁본 애호가들의 수요에 대응하기 위한 석회탁본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석회탁본의 일부 글자는 왜곡되었다. 석회가 발라지기 이전에 뜬 탁본을 원석탁본이라 한다. 비문을 판독하는 데는 비문 원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원석탁본이 중요하다. 국내의 광개토대왕비 탁본은 임창순보을 제외하고는 모두 석회탁본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은 1890년초에서 1918년 사이에 지작된 것으로 자료적 가치가 있다. 중국과 일본, 대만에서 10여종의 원석탁본이 알려져 있는데, 일본 국립역사민속박물관 소장본은 그 중에서도 질이 좋은 탁본이며, 이번 특별전을 통해 국내 최초로 공개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중원 고구려비 탁본

중원고구려비는 한반도에 남아 있는 유일한 고구려비이며, 고구려의 중원진출을 입증하는 구체적인 자료이다. 특히 '신라토내당주'란 표현은 중원고구려비 건립 단계에 고구려 군대가 신라 영토내에 주둔하고 있는 실정을 알려주어 당시 양국간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자료이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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