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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 특별전] "문자, 그 이후: 한국고대문자전", 삼국의 문방구

younghwan 2011. 11. 12.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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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가 한반도에 전래된 이래로 문자생활을 사용했던 문방구로는 기본적으로 종이,붓,먹,벼루가 구한말 이후 새로운 필기도구들이 등장하기까지는 사용되었다. 삼국시대 이전의 문방구가 이후와 다른점은 글자를 적는 필기도구로서 목간, 죽간 등이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목간은 종이가 발명대기 이전인 진한(秦漢)시대와 그 이후에도 종이와 함께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목간은 끈으로 엮은 얇은 나무판에 붓으로 글씨를 쓰는 것으로 책(冊)이라는 글자의 어원이 되며, 종이가 발명된 이후에도 상당히 오랜기간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에서도 문자가 도입된 이래로 목간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창원 다호리 유적지에서 발견된 붓과 지우개 역할을 했던 칼에서 알 수 있듯이 교역을 위한 실무적인 목적에서 먼저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종이가 전래된 삼국시대에도 목간은 실무적인 용도로 많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종이에 비해서 내구성이 좋아서 그런지 여러곳에서 목간이 출토되어 당시 사람들의 문자생활을 간접적으로 볼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삼국의 문방구
문방구는 문자의 전래와 활용에 깊이 관련되어 있다. 문방구로서는 낙랑지역이나 부산 고촌리의 서안, 창원 다호리의 붓과 삭도, 삼국시대 왕경이었던 부여나 경주 등에서 출토된 다양한 벼루들이 있다. 시대가 내려오면서 벼루는 왕경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에서도 사용되고 있어, 문자사용의 확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먹을 제작하는 전문공방이 이미 자리잡고 있었다. 또한, 정창원 신라촌락문서에 선이 그어져 있어 줄을 치는 자가 따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太子(태자)'새김 나무뚜껑과 하남 이성산성에서 출토된 연적모양 병과 작은 물건에 매단 꼬리표 목간들, 목간이 들어있던 항아리. 목간은 전국적으로 실무적인 용도로 많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 정창원 소장 신라먹, 석가탑 출토 먹, 백제 먹조각.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는 우수한 먹을 생산하여 일본으로 수출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먹
정창원에 소장되어 있는 신라먹으로, "신라의 양가에서 생산된 상급 먹"이라고 새겨져 있다. 8세기 신라에는 양가나 목가와 같이 먹을 생산하는 전문 공방이나 장인집단이 있었으며, 이것이 일본에도 수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서기"에는 610년에 고구려의 승려 담징이 일본에 종이, 먹 등을 만드는 방법을 전해주었다고 한다. <출처:중앙박물관>


전남 나주(610년)와 충남 부여에서 출토된 목간
 

전대등이 명령을 내린 원통 모양 목간(복원품), 목간(복제품), 경주 월성해자 출토, 부여와 나주에서 출토된 목간


관리가 글자 연습을 하고 얼굴을 그린 목간, 나주 출토 목간(610년), 익산 미륵사지 출토 석간


부여에서 출토된  '하천상'이라고 쓴 목간,'우이'라고 쓴 꼬리표 목간과 현내들 목간, 일본의 목간(복제품),


함안 성산산성 출토 붓, '신라양가' 글씨가 있는 먹(복제품),통일신라,붓꽂이 벼루


부여 출토 목간


두루마리문서의 책갈피 목간(복제품), 7~9세기, 일본


목간 부스러기, 부여


이천 설봉산성 출토 '함통7년'새김 벼루, 안압지 출토 벼루


종이조각, 경주 안압지


백자 벼루, 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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