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은 한성 백제시대에 처음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실제로는 통일신라가 이 곳에 주창성을 쌓고 한강유역을 지키는 중요 산성으로 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 중기까지도 남한산성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임진왜란 이후 청의 압박에 대응하기 위해서 수도인 한양을 지키는 성곽으로서 그 역할이 크게 중요시 되었으며,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피신했던 성으로 45일간 이곳에서 항전하였다. 지금에 와서 볼 수 있는 견고한 석축과 방어시설이 완비된 산성으로의 모습은 상당부분 숙종때 쌓은 것이며, 정조대에 크게 개축하였다고 한다.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 방향으로 4개의 성문을 두고 있는데, 그 중 성남에서 올라오는 출입문인 남문에 제일 큰 규모로 실제 남한산성의 정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서울 송파나루와 연결되는 서문은 제일 가깝기는 하지만 길이 험하여 암문의 성격을 갖고 있다면, 남문은 지금도 이 곳으로 도로가 성남과 연결되기때문에 제일 평탄한 길이라 할 수 있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남문을 통해서 남한산성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현재의 성문은 정조3년에 성곽을 개보수할 때부터 지화문(至和門)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남문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남문은 남한산성에 있는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으로 현재에도 출입이 가장 많은 곳이다. 선조 때의 기록을 보면 동문, 남문, 수구문의 세문을 수축하였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남문은 인조2년(1624) 수축되기 이전부터 이미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남문은 정조3년(1779) 성곽을 보수할 때 개축하고 지화문이라 하였다. 1976년 문루를 복원하였고 2009년 정조의 글씨를 집자하여 전면에 현판을 설치하였다.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처음 남한산성에 들어올 때 바로 이 문을 통해서 들어왔다. <출처:광주시청>
남한산성 남문인 지화문(至和門). 수어장대와 함께 남한산성을 대표하는 장면이다.
남한산성 석축과 방어시설 대부분은 조선후기 숙종대에 완성되었는데, 남문은 송파나루와 성남을 통해서 남한산성으로 들어오는 정문역할하는 성문이지만 경사진 언덕에 위치하고 있어서 당시 많이 구축하였던 옹성을 별도로 쌓지는 않고 있다.
남한산성 출입문 홍예.
남한산성은 높은 지역에 위치하고 있어서 주로 자연석을 다듬어서 석축을 쌓고 있는데, 한양도성에 비해서 성벽이 투박한 편이다.
남한산성 성벽 위에 쌓은 여장. 조총 사용을 전제로 만든 방어시설로 가까운 곳을 향하는 근총안 1개, 먼곳을 향하는 원총안 2개를 두고 있는 평여장을 하고 있다.
철판으로 마감하여 견고하게 만든 성문. 조총 공격을 고려하여 철판으로 마감한 것으로 보인다.
산성내부에서 본 남문과 문루
'지화문(至和門)'이라는 명칭은 정조때 남한산성을 크게 개축하면서 붙인 이름이라고 하며, 현재의 현판은 정조의 글씨를 집자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남문과 연결된 성벽
남문 문루. 앞면 4칸, 옆면 4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문루이다.
문루에서 내려다 보이는 성남에서 남한산성으로 올라오는 길. 산능선을 따라서 현재의 도로가 나 있고, 옛날에도 능선을 따라서 올라왔던 것으로 보인다.
남문에서 내려다 보이는 남한산성 내부.
남문에서 북쪽편 수어장대로 올라가는 성곽길
남한산성 내부에서 본 남문인 지화문
남문 주변에 모아 놓은 옛 광주목사(유수)들의 공덕비
지금은 남문 아래로 터널과 도로를 통해서 남한산성으로 들어온다.
남한산성 남쪽편 남장대로 오르는 성곽길
남문 북쪽편 수어장대와 연결되어 있는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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