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은 수도를 방어하고 한강이남 주요 교통로를 지키기 위해 쌓은 천혜의 요새이지만, 병자호란 47일간 항전의 현장이자 치욕의 장소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626년 청나라는 백마산성을 비롯하여 주요 공격로에 배치된 산성을 이용하고자 했던 조선의 방어전략을 무력화시키면서 이를 우회하여 무려 10여일만에 수도인 한양을 직접 공략하였다. 워낙 청나라의 전략과 군사적 능력이 출중하였던 까닭에 원래 강화도로 피신할 계획이었던 인조는 불가피하게 남한산성에서 농성을 하였으나, 식량의 부족과 청나라의 효과적인 공략으로 47일만에 항복하게 되었다.
병자호란은 17세기 동아시아 역사를 크게 변화시킨 중요한 사건이었지만, 전쟁기간은 47일에 불과하기때문에 이 전쟁에서 개별 사건이나 인물은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고, 당시 백마산성에서 청과의 전쟁에 대비했던 임경업, 47일간의 항쟁에서 항복과 항전을 주장하던 인물들만이 병자호란이라는 큰 사건을 대표하고 있다. 병자호란은 결과적으로 볼 때 청이 중국대륙을 장악할 수 있었던 큰 발판이되었으며, 속전속결에 의한 청의 승리는 당시 동아시아 맹주로 떠오른 만주족의 총체적 역량이 뛰어났음과 이에 대응한 조선사회 지배세력의 무능함을 잘 보여주었던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병자호란과 항일의 현장
소설과 설화로 잘 알려진 임경업 장군은 1626년 병자호란 당시 백마산성(평안북도 의주군 백마산에 있던 성)에서 청군을 차단하고자 했으나, 청군이 우회하여 남하했으므로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조선의 군사는 대규모의 진열을 갖춘 청의 공격에 무기력했고, 결국 최후의 보루로서 남한산성은 청과 대결을 벌이는 격전장이 되었다. 이 와중에 병력과 무력을 갖춘 청에 조선이 얼마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남한산성이 가진 지형적인 이점 덕분이었다. 한편 남한산성은 항일의 현장이기도 했다. 한말 의병장인 김하락은 경기도 이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광주.이천.안성.연천 등지에서 항쟁했다. 그는 여주 의병장 심상희와 합세해 연합병력 2,000여 명으로 광주 남한산성을 점령하고 진을 옮겼으나 함락당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임경업 초상, 19세기. 실제 병자호란 전쟁 당시 큰 업적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병자호란을 대표하는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설화와 소설로 널리 알려진 임경업은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백마산성에서 청군을 차단하고자 했으나, 청군이 우회하여 남하했으므로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친명반청에 투철한 무장이었다. 청색 단령에 삽금대와 사모를 착용하고 정면을 향하고 있는 관복전신좌상이다. 화면 오른쪽 상단에 '충민공임장군유상'이라 적혀 있다. 인물은 정면에서 본 시점으로 그려졌는데, 인물 뒤의 탁자는 왼쪽에서 사선으로 본 시점으로 그려졌다. 호피가 깔린 교의에 앉아 있는데, 발밑으로 호랑이 머리가 보인다.
추련도와 칼에 새겨진 한시. 충주 충렬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임경업 장군의 칼이다. 이 칼은 본래 호신용이며, 양날에는 한시 28자가 새겨져 있다. 추련 즉 가을 연꽃은 다른 연꽃이 피지 않을 때 피는 꽃으로 지조 있는 대장부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출처:경기도박물관>
역사의 새로운 바람을 맞다.
인조 14년(1636)에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한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인조와 일부 신하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청의 공격에 47일간 맞섰다. 그러나 산성 안팎의 상황은 계속해서 악화되었고, 조선은 결국 오랑캐라고 멸시하던 청과 군신관계를 맺었다. 병자호란을 당하여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는 종사와 생민의 보호를 위해 강화를 하자는 주화론과 오랑캐의 힘에 굴복할 수 없다는 척화론이 일어나 서로 강하게 대립하였다. 척화파는 대명의리를 강조하였고, 주화파는 국가의 존립보다 우월한 명분은 존재할 수 없다는 실용적인 입장을 고수하였다. 남한산성의 동문 안에 세워진 현절사는 홍익한.윤집.오달제를 제향하는 사당으로 이들은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효종대 최고조에 달한 북벌론은 이후에도 조선 정치사회를 이끈 커다란 정치논리의 하나로 작용하였다. <출처:경기도박물관>
병자호란, 남한산성 47일간의 기록
1636년 12월2일, 청태종은 만주족.몽골족.한인으로 이루어진 2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왔다. 조선을 복종시켜서 후일 청나라가 중국을 지배하게 될 때 후환을 없애기 위해 전쟁을 벌인 것이다. 청나라의 선봉은 서울로 직행하여 심양을 떠난 지 10여일 만에 개성을 지나서 서울 근교에 육박했다. 인조는 세자와 함께 강화로 가려고 남대문까지 나왔으나 이미 청군이 양철평(지금의 녹번동으로 추정)이르렀다는 보고를 듣고 남한산성에 이르렀다. 청군의 선봉은 16일에 남한산성에 이르렀고, 뒤이어 군사들이 남한산성으로 몰려왔다. 성안에서는 비록 큰 전투는 없었으나, 청군대의 포위속에서 혹한과 싸워야 했으며 점차 식량마저 떨어져 성안의 상태가 비참해져갔다. 마침내 청군에 의해 강화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모든 정세가 불리해지자 인조는 1월30일 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는 의식을 행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삼학사전, 송시열, 조선후기
병자호란 당시 척화론을 주장하다가 청나라 심양으로 압송되어 죽음을 당한 홍익한.윤집.오달제 등의 행적과 글을 수록하여 대명의리론을 밝히기 위해 편찬한 책이다. 삼학사들의 약전과 언행, 조정 내부의 의논과 대청관계 등 주변상황을 기록했다. 병자호란 이후에 조선 지식인의 내내외적 대응방식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경기도박물관>
송시열초상.
송시열은 조선 후기 노론의 영수이자 사상적 지주로서 활동했다. 효종대 북벌론을 적극 지지한 대표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유복초상 반신상으로 후대의 모사작이다. 안면의 채색이나 표현에서 조선 후기 양식이 두루 감지된다. 안면의 필선은 경직되어 있고, 수염의 묘사도 기계적인 선묘를 보이고 있다. 얼굴과 달리 의복의 표현은 필선 아래 담묵으로 입체성을 표현하고 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난리일기, 남한산성으로 왕을 호종했던 남급의 기록이다. 인조 14년(1636) 12월 11일부터 30일까지 대책논의와 상황을 상세히 전하고 있으며, 인조 15년(1637) 1월1일부터 31일까지 급박하게 돌아가는 외교와 인질문제 그리고 4월3일까지의 전후처리, 포로송환, 국내 민심수습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남한일기, 석지형, 1636년.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들어 온 때부터 항복할 때까지의 기록이다. 청군사들에 의해 산성이 포위된 상황에서 주화파와 척화파의 대립, 물자부족과 날씨로 겪은 극한 고통, 인조가 항복하고 환도할 때까지 과정 등을 서술하였다. <출처;경기도박물관>
묵매도, 오달제(1609)는 윤집, 홍익한과 함께 세칭 3학사로 불렸다. 1637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청과의 화해를 끝까지 반대했으며 29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매화 그림은 부드럽고 능숙한 담묵처리를 보여주고 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충렬공유고, 삼학사 중 한명인 오달제의 시, 부, 표, 대책, 등을 모아놓은 문집이다.
윤집간찰, 삼학사 중 한 사람인 윤집이 인조 13년(1635)에 아버지에게 쓴 안부편지이다. 과거시험 성적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현절사 현판. 남한산성 현절사에 걸려 있는 현판이다. 현절사는 병자호란 당시 척화를 주장한 삼학사 윤집, 홍익한, 오달제의 넋을 위로하고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숙종 14년에 유수 이세백의 주도로 세워졌다. <출처:경기도박물관>
척화파와 주화파
병자호란 와중에 조선 조정에서는 척화론과 주화론이 일어나 이를 주장하는 각 축이 서로 대립하였다. 척화론은 청과의 항전을 주장하는 것으로 명에 대한 의리를 중요시하였다. 삼학사(오달제, 홍익한, 윤집)을 비롯하여 김상헌과 정온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은 청을 정벌하여 문화가 높은 조선이 문화가 낮은 오랑캐에게 당한 수치를 씻고 나아가서는 조선의 오랜 우방 국가로서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와 준 명에 대하여 의리를 지키고자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주화론은 청의 힘을 고려할 때 청과의 강화가 현실적인 해결책임을 주장하였고 최명길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경석 역시 병자호란 직후 청과의 불편한 관계를 조정하고 조선의 안전을 지키고자 노력하였다. <출처:경기도박물관>
청음집 목판, 청음 김성헌의 문집인 청음집의 목판이다. 김상헌은 척화론을 주장하였으며, 이후로도 반청 상소를 계속 올리다 심양으로 끌려가 4년여 동안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앞면은 정유길의 신도비명이고, 뒷편은 한효중 신도비명이다. <출처:경기도박물관>
김상헌 송별시, 김상헌의 친필로 좌랑 김존경이 중국에 조회하러 가는 것을 전송한 칠언율시이다.
청음집, 청음 김상헌의 시문집이다. 청의 침입에 대해 척화를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인 김상헌의 시국관과 행적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동계선생문집,
동계선생문집 속집, 연보
조선 중기 학자 동계 정온의 시문집이다. 초간본과 중간본 두가지 판본이 현존하고 있다. 정온은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한 인물이다. 동계선생연보는 숙종대 이광정의 발문과 함께 정온의 연대기를 편년체로 기술한 것으로, 정온의 이력과 학문활동 및 사승관계등을 서술하였다.
지천첩과 백헌집. 최명길은 1636년 이조판서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주화론을 주장하여 청나라와 강화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항복문서를 초안했다. 지천첩은 최명길의 시.소치.계시.잡저 등을 모은 문집이다. 백헌 이경석의 글을 모아 편찬한 책이다. 총49권21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책에서 20책까지의 48권은 이경석의 글과 비문 등이 실려 있고, 마지막 1책은 이경석의 개인 연보가 실려 있다. 이경석은 조선이 청의 군사적 감시를 받는 상황에서 조정을 대표해 책임을 진 인물이다. <출처:경기도박물관>
북벌론의 대두와 국왕의 행차
북벌론은 문화수준이 낮은 청나라의 오랑캐에게 당한 병자호란의 수치를 씻고,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켜 명을 대신하여 복수하자는 주장이다. 이 주장의 발단은 삼학사에 있으며, 뒤에 효종의 북벌 계획에 영향을 미쳤다. 숙종.영조.정조 등은 여주의 영능(효종릉)을 참배하는 길에 반드시 남한산성에 들러 치욕의 역사를 회상하고 숭명배청의 결의를 다졌다. 이와 같이 남한산성은 삼학사 등이 청화를 주장했던 대명의리의 연원지로, 역대국왕들이 영릉을 왕래하는 길에 들러 삼전도에서 치욕을 당한 그날을 잊지 말자고 다짐하며 대명의리를 확인하던 곳이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이완지석, 청화로 쓴 23장의 지석이다. 글씨는 석봉체이며 측면에 일련번호가 쓰여 있다. 이완은 효종대 북벌계획에 깊이 관여하면서 군요직을 두루 지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이완투구, 이완이 생전에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투구이다. 무쇠로 된 투구 아래에 이마를 덥도록 무늬를 새긴 얊은 판을 둘렀다. 금동 당조문이 입사되어 있고, 윗부분은 각종 문양이 있다. 모자 상단에는 술을 달 수 있는 대가 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남한산성의 개축과 증축
병자호란 후 조선은 남한산성의 취약점이라 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한 개축과 보강에 들어갔다. 원성 외에 외성을 쌓아 동북쪽을 보강하고 남쪽에 옹성을 설치하여 외부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영조와 정조 역시 성곽의 개축과 시설보강에 나섰다. 또한 홍이포의 위력을 실감한 조선은 남한산성에 포루를 설치하고 여기에 호준포, 불랑기 등을 옮겨 배치하게 하였다. <출처:경기도박물관>
숙묘보감. 숙종 재위 46년간의 치세 내용을 기록한 서적이다. 숙종대에 도성방위를 위해 북한산성을 쌓았으며, 남한산성의 증축과 개축도 많이 이루어졌다. 당시 수어사 김석주가 남한산성을 지키는데 필요한 군병을 동원하여 산성을 방어하도록 청하는 상소 등이 수록되어 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무망루 현판. 수어장대(서장대)는 남한산성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는 장대로 인조 때 단층으로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영조 27년(1751)에 2층으로 중건 하였는데 이때 내부에 무망루, 외부에는 서장대라는 편액을 걸었다. '무망'에는 병자호란의 치욕을 잊지 말자는 뜻이 담겨 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숙종대왕어제 현판. 현절사에 걸려있는 숙종대왕어제 현판이다. 숙종이 친히 지은 시문을 새겨 현절사 본전 안쪽 벽에 붙였다. 내용은 삼학사에 대한 회상과 오달제의 매화도에 대한 감회를 나타내고 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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