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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중국사행을 다녀온 화가들, 세한도(국보 180호)에 나타난 청나라 문인들과의 교류

younghwan 2011. 12. 28.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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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사신단의 일원으로 중국에 사행을 가는 것을 명나라때에는 천자에 조공을 간다는 의미로 '조천'이라고 불렀으며, 청나라때는 병자호란의 치욕도 있고 해서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조공이라는 뜻보다는 북경을 방문한다는 의미로 '연행'이라고 불렀다. 중국 사행을 오늘날 조공이라는 의미로 폄하하는 경향이 많지만 중국사회는 당시에는 넓은 세상과 문물을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였기때문에 조선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관동팔경 유람과 함께 꼭 한번 해보고 싶은 일 중에 하나였던 것 같다. 특히, 조선후기 영정조대에 들어서면서 청나라의 국력이 강성해지고 안정되면서 많은 지식인들이 다양한 형태로 중국을 방문했고,실학자 연암 박지원이 저술한 '열하일기'를 비롯하여 당시 지식인들이 느낀점을 많은 기록으로 남겨놓고 있다.

조선시대 총 500여회에 이르는 중국 사행길을 통해서 조선의 지식인들은 중국의 문인들과 많은 교류를 가졌고 대표적인 인물이 19세기의 추사 김정희와 그의 제자인 역관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추사는 북경 사행길에서 알게된 청나라 학자 옹방강과는 사제관계를 맺었고, 추사체가 정립되기 이전에 그는 옹방강으로부터 학문적으로도 영향을 많이 받았고, 글씨체도 옹방강체를 이어받고 있었다고 한다. 추사 김정희는 19세기 북경사행을 떠나는 인사들을 중국 문인들에게 추천하였으며, 그들과 글로써 많은 교류를 가졌다. 그의 제자인 이상적은 역관이지만 당대에 중국에서도 알아주는 뛰어난 문인이었으며, 역관으로서 중국을 오가며 추사 김정희가 중국 문인들과 교류하는데 가교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조선에서는 거의 유일하다시피하게 중국에서 생전에 개인문집을 발간할 정도로 역관이지만 시인으로서도 명망이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추사 김정희 대표작인 국보 180호인 '세한도'는 그가 이상적을 위해 글과 그림을 남긴 것으로 이상적이 중국문인들에게 이를 보여주고 많은 발문들을 받아와서 그 가치를 드높인 인물이다.

조선과 청 문인들의 활발한 교류
연행과 북학이 사회 흐름을 이끌었던 19세기는 조선과 청의 교류가 가장 활발한 시기였다. 19세기 조선 지식인들은 청의 문화를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의식으로 동등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옛 책의 저자가 아니라 최근 발간된 책의 살아 있는 저자를 만나고 그들의 문구류를 사용하고 싶어하는 등 청나라 지식인들의 생활방식에 관심이 높았다. 이러한 교류의 중심에는 경화세족과 역관이 있었는데 이를 주도했던 인물이 바로 추사 김정히다. 그는 조선의 문인과 역관들이 연행에서 얻은 서적과 물품을 통해 청의 학술과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시서화에서부터 금석학, 경학, 고증학에 이르기까지 최고의 경지를 구축한 19세기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지식인이다. 김정희는 연행을 통해 사제관계를 맺은 옹방강의 영향과 이상적과의 관계 속에서 <세한도>를 그리게 되고, 이상적은 연행길에 <세한도>를 중국에 가져가 많은 중국 문사들의 발문을 받게 된다. 이는 연행을 통한 조청교류의 산물인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문인화인 국보 180호로 지정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글과 그림이 함께 남겨져 있는 것으로 추사가 제주도 유배시절 변함없는 정성을 보여준 역관 이상적에게 그의 신의를 한겨울의 소나무로 표현한 그림이다. 후에 이상적이 감복하여 북경을 방문하였을 때 교유관계를 가졌던 중국 문인들로부터 이 그림에 대한 평가인 많은 발문을 받아와서 더욱 가치있는 작품이다.

제주도 유배 중인 스승 김정희에게 제자인 역관 이상적은 연행에서 얻은 최신 서적과 김정희 지인들의 편지를 꾸준히 보내드렸다. 김정희는 이상적의 변함없는 신의를 메마르고 찬 기운이 감도는 속에서도 싱싱한 잎이 솟아 있는 소나무와 잣나무로 표현하여 서화일치의 극치를 보여주는 문인화의 대표작 <세한도>를 탄생시켰다. 이상적은 이에 감격하고 연경으로 가지고 가서 평소 교유관계를 맺고 있던 장락전, 장록 등 청내의 명사에게 글을 받아서 <세한도>의 가치를 드높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추사 김정희가 '세한도' 그림과 함께 양족에 쓴 글. 제주도 유배시절에도 변함없어 추사 김정희와 중국문인들 간의 편지를 전해주면 변함없는 신의를 보여준 역관 이상적에 대한 느낌을 글로 적어놓고 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그대가 지난해 계복의 '만학집'과 운경의 '대운산방문고' 두책을 부쳐주고, 올해 또 하장령이 편찬한 '황조경세문편' 120권을 보내주니, 이는 모두 세상에 흔한 일이 아니다. 천만리 먼곳에서 사온 것이고, 여러 해에 걸쳐서 얻은 것이니 일시에 가능했던 일도 아니었다. 지금 세상은 온통 권세와 이득을 좇는 풍조가 휩쓸고 있다. 그런 풍조 속에서 서책 구하는 일에 마음을 쓰고 힘들이기를 그같이 하고서는, 그대의 이끗을 보살펴 줄 사람에게 주지 않고 바다 멀리 초췌하게 시들어 있는 사람에게 보내는 것을 마치 세상에서 잇속을 좇듯이 하였구나! 태사공 사마천이 말하기를 "권세와 이득을 바라고 합친 자들은 그것이 다하면 교제 또한 성글어진다'고 하였다. 그대 또한 세상의 이런 흐름 속에 사는 한 사람 일 터인데, 잇속을 좇는 세상 풍조의 바깥으로 초연히 몸을 빼내었구나. 잇속으로 나를 대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태사공의 말씀이 잘못되었는가?"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되어서야 소나무 잣나무가 더디 시들음을 알 수 있다."고 하셨다. 추운 계절이 오기 전에도 같은 소나무 잣나무요. 추위가 닥친 후에도 여전히 같은 소나무 잣나무다. 그런데도 성인(공자)께서는 굳이 추위가 닥친 다음의 그것을 가리켜 말씀하셨다. 이제 그대가 나를 대한는 처신을 돌이켜 보면 그 전이라고 더 잘한 것도 없지만 그 후라고 전만큼 못한 일도 없었다. 그러나 예전의 그대에 대해서는 따로 일컬을 것이 없지만 그 후에 그대가 보여준 태도는 역시 성인에게서도 일컬음을 받을만한 것이 아닌가? 성인이 특히 추운 계절의 소나무 잣나무를 말씀하신 것은 다만 더디 시드는 나무의 굳센 정절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역시 추운 계절이라는 그 시절에 대하여 따로 마음에 느끼신 점이 있었던 것이다. 아아! 전한 시대와 같이 풍속이 아름다웠던 시절에 살았던 급암과 덩당시 같이 어질었던 사람들의 경우에도 그들의 형편에 따라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지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하였다. 하물며 하비현의 적공이 대문에 방을 써 붙였다는 것은 세상 인심의 박절함이 극에 다다른 것이리라. 슬프구나! 완당노인이 쓰다. <출처:중앙박물관>


장악진, 오찬의 발문, 조진조, 반준기, 반희보, 김준학, 반증위, 품계분의 발문

반증위의 발문, 반증위는 반준기, 반희보 형제의 육촌으로 그들처럼 대수장가였으며 특히 금석학과 서예를 좋아하여 이 분야를 많이 수집했다.옹방강 문인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이상적과 반씨 문사들간의 교유를 주도했다.

"김정희는 바다밖의 뛰어난 영재, 일찍부터 그 명성이 자자했네.
명성은 훼손되어 갈 곳도 없고 세상의 그물 속에 걸려들었네.
도도하게 흘러가는 세속을 보니 선비의 맑은 정신 누가 알리오?
풍진 속 세상을 개탄하다가 일찍이 어린 친구 알게 되었네.
높은 의리 돈독하긴 언제나 같고 겨울에도 그 맹세는 변함이 없네.
소나무와 잣나무를 닮아서인지 타고난 성품마저 곧고 단단해.
시들지 않는 바탕 그림 그려서 도타운 그정에 보답하였네.
우진 선생 부탁으로 반증위가 쓰다."

반희보의 발문, 반희보는 소금장사로 큰 부를 축적한 오흥 반씨 집안 출신이다. 이후 청나라 소주의 문학과 예술을 주도하는 대가문으로 성장했다. 반준기와형제로서 함께 서화를 많이 모았으며 이상적에게 집안 문사들의 서화를 선사했다. 그는 발문에서 세한도를 보고 예찬의 필치를 떠올렸다고 썼다.

"원나라 화가 에찬의 필이 담긴 한 폭의 그림 만리 길 배를 타고 건너 왔다네
동심 담아 고사의 뜻을 전하니 신물이라 태평한 시절 오겠지.
산골짜기 있는 재목 어찌 버리며 얼음 설 겪은 절개 더욱 굳어라
내가 부친 줄 없는 소리 감상하시고 바다 건너 산마루에서 몸조심하길
<세한도>에 시를 써서 바치고 우선 존형 문단의 교정을 청한다.
오현 반희보" <출처:중앙박물관>


왕조, 조문경, 지경용, 요복중의 발문 


장목, 장요손의 발문

장요손의 발문(1845년). 장요손은 청나라 학자로 이상적과는 1836년에 처음 만났으며 이후 그에게 보낸 편지가 40~50여 통에 이를 정도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상적과 서화를 주고 받았는데, 그를 통해 김정희의 서화를 요청하기도 했다. 장요손은 전각에도 뛰어나 김정희는 그가 새긴 '동해순리'인장을 높이 평가했다.

" 우선 인형과 헤어진 지 8년이 되었다. 갑진년(1844) 겨울에 사신으로 연경에 왔는데, 을사년(1845) 봄 1월에 오찬(장요손의 매형)의 정원에 초청하여 술을 마셨다. 연경의 선비 17명이 모여 옛일을 이야기하고 문장을 논하며 모두 즐거워했다. 우선이 김추사 선생이 그린 <세한도>를 보여주며 제영을 부탁했다. 급히 율시 두수를 짓고, 추사 선생과 한묵을 통한 마음으로의 교유를 생각했다. 언제쯤이나 얼굴을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니 더욱 슬플 따름이다. 양호 장요손이 기록했다."

장목의 발물(1845년). 장목은 완원에게 실력을 인정받은 학자로서 하소기, 조진조, 진경용 등 당대 명유들과 교유했다. 김정희가 존경했던 명말청초의 실증주의 사상가 고염무의 사당을 짓는 일에 앞장섰다. 그가 저술한 고염무의 연보인 '고정림연보'와 완원이 새로 저설한 '시서고훈'을 김정희에게 보내겠다고 발문에 적었다.

"예전에 언젠가 서유지에게 완당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네.
기인은 바다밖에서 오고 감춰둔 책 동쪽에서 빛이 났다네.(중략)
완당이 존경한 완원선생이 이 책 보더니 기쁘고 놀라 가져다 출판을 기획했는데.
(중략) 원본을 소중히 보관한 곳은 용마루 치솟은 문선루였네.
완원은 그 아래 살았는데 저술을 늙을수록 더욱 많아져 (중략)
옛 주석에서 사라진 경전 발라냈다네.
완원이 새로 저술한 '시서고훈'이 완성되었다.
(완원께서) 한 질을 멀리까지 보내주시니 속된 귀가 잠시나마 호강했다내. (중략)"


장목의 행서대련, 장목, 청나라 19세기 전반

장목은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지만 문장으로 이름난 청나라 문인으로 김정희가 존경한 완원에게 학식을 인정받았고 이상적과 친분이 두터웠다. 김정희와는 교유가 없었으나 명성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이 대련에는 풍양조씨 신정왕후의 조카 소하 조성하의 인장이 있어서 조선으로의 전래를 확인할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이상적의 시문집(은송당집), 이상적은 역관이지만 당대의 시인으로 조선과 청나라에서 명망이 높았던 사람으로 그 문학적 재능을 높게 평가하여 중국 문인들이 그의 문집을 북경에서 출판하였다고 한다. 그 중 대표적인 시로 이상적이 추사 김정희를 만났던 초기의 작품을 보여주고 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이상적은 30년 동안 12차례 이상 사행에서 역관으로 활동했다. 초기에는 김정희의 후광으로 청나라 문인들과 교유를 시작했으나 점차 그의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아 그들의 도움으로 시문집 '은송당집'을 연경에서 간행하게 되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생전에 문집을 출판하는 일이 많지 않았으며 게다가 연경에서 출판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이었다. 이상적이 김정희를 찾아뵙기 위해 이른 아침 한경변을 걸어가면서 느낀 감회를 시로 남겼다. 그의 시는 섬세하고 화려하며 회화성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데 이 시를 읽으면 겨울철 강변의 풍경이 눈앞에 그려진다. 김정희와 이상적의 만남에 관한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입춘 다음날 용산의 김추사 선생님 댁을 방문하다.
"아침 햇살 흐릿한 성곽 너머로 눈서리 뒤엉킨 드넓은 들판
 지독한 추위는 풀리지 않고 남은 겨울을 옥죄고 있다.
 모래 길 찾으면서 걸어가는데 얼음은 돌맹이와 뒤섞여 있고
 빈 강의 찬 기운은 눈을 찌르며 드넓은 유리 빙판 덮어버린다.
 주막 깃발 나부끼는 깊은 마을엔 고깃배 얼어붙어 멀리 갈 수 없지만
 파교로 매화를 찾아 나서면 시인을 만날 수도 있을 듯하다.
 그 옛날 왕휘지는 친구 찾아 나섰다.
 부질없이 섬게에서 배를 돌려 왔었지
 저기 저 한겨울의 나뭇가지 위로는 바람속에 까치가 맴돌고 있다. "


김정희가 북경에 가는 조용진을 위해 지은 송별시(행서송운경입연시), 김정희, 1811년

19세기에 조선과 청 문인들간의 교류가 활발해지는데 그 중심에는 추사 김정희가 있었다, 김정희는 사행을 떠나는 이들에게 자신이 알고 지내는 청문인을 소개해 주었다. 1811년 운경 조용진이 사행을 떠나게 되자 김정희는 연경에서 스승인 옹방강을 만나 보라는 뜻을 담아 기름지고 윤기가 흐르는 옹방강체로 송별시를 써 주었다. 조용진은 옹방강을 만났고, 돌아올 때는 옹방강이 보내는 선물을 김정희에게 전달했다. <출처:중앙박물관>

"솔바람에 차 한잔이 묵연의 참모습
향불이 타오르자 생각마다 번뇌로다.
만리 밖의 만남이라 반가운 정 눈에 가득
소재 성생 옹방강은 바로 나의 스승일세."

"내가 존경하는 분은 소재 옹방강 선생님이시다. 지금 동갑내기 친구인 조용진이 연경에 가므로 이런 뜻을 가르쳐 준다. 아울러 선생님께 인사드리고 옛적 내가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은 인연을 계속 이어가기 바란다. 추사 김정희가 씀" <출처:중앙박물관>


주학련을 위해 쓴 행서대련, 김정희, 1813년 이전

김정희가 1809년 자제군관으로 연경에 갔을 때 반갑게 맞이해 준 주학년을 위해 주학년이 좋아했던 조선의 유득공의 시를 행서로 쓰고 그 의미를 이어서 자신의 7언 절구 시를 옆에 적었다. 추사체의 특징이 보이기 시작하는 단계의 글씨로 옹방강체에서 벗어나 예서 획에 구양순 해서체를 섞어 썼다. <출처:중앙박물관>

"우뚝 솟은 고목 위에 까마귀는 떠나갔고
아스라한 노을 속에 나그네가 찾아온다."
야운 주학년 선생께서 이 시의 의미를 사랑하여, 여러 차례 화고에서 언급하셨습니다. 글씨를 써서 보내니 주학년의 서재인 함추각 기둥의 대련으로 삼도록 하십시오. 그 의미를 다시 펼치고자 칠언절구 한 편을 지으니 잘못을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 고목에 겨울 까마귀, 손님이 오려는가?
 시정은 어느덧 화정으로 옮겨간다.
 연운공양은 끝도 없는데
 홀 밖의 가을 빛은 벼루에 가득하다." <출처:중앙박물관>


주학년이 보내는 편지(주학년 간찰), 주학년, 1831년, 보물 547호.

이 편지에는 <함추각 행서 대련>에 썼던 김정희 시구가 인용되어 있기때문에, 주학년이 대련을 받은 후에 김정희에게 보낸 편지임을 알 수 있다. 주학년은 김정희가 완원의 아들 완상생에게 보낸 편지와 책이 잘 도착했음을 알리고 또한 자신의 서재인 함추각을 그린 부채그림, 찻잔, 향, 먹을 보낸다고 밝히고 있다. 조선과 청나라 문인 사이의 문물교류를 보여주는 편지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소동파가 삿갓을 쓰고 나막신을 그린 그림 (소동파입극도), 중봉당 모사, 19세기

북송의 대학자이자 서예가 동파 소식이 유배 새활 중 어느날 갑자기 내린 폭우를 피하기 위해 삿갓과 나막신을 별려 신은 채 도포를 걷어 올리고 진흙탕을 피해 걸어가는 모습을 그린 소동파입극도이다. 청나라에서는 소동파를 흠모하던 홍방강에 의해 유행하였는데 조선에서도 김정희 지인들에 의해 자주 그려졌다. 이 그림은 김정희의 제자 허련이 그린 그림을 중봉당이 모사를 한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매화나무에 둘러싸인 감실(매감도), 조희봉, 19세기

매화를 매우 사랑한 청나라 문사 오승랑과 그를 위해 그림을 그려준 장심, 김정희 일가와의 교유를 통해, 감실 주위에 만발한 매화나무가 심어져 있는 '매감도'가 출현했다. 오승량의 매화 사랑을 기리고자 김명희가 장심에게 그림을 요청했고 이후에 김정희의 제자 조희룡이 장심의 매감도를 바탕으로 이 그림을 완성했다. <출처:중앙박물관>


김명희에게 보내는 편지 (장심간찰), 장심, 1826년

산수화를 잘 그린 장심이 난옹 오승량의 시구에 의거하여 <매감소도>를 그려 보냈다는 내용이 담겨 있는 편지이다. 이외에도 장심은 김명희의 요청으로 <부춘산도>를 그려주기도 하고 자신도 김정희에게 서실의 편액을 써달라고 요청했으며 이인상의 화첩, 인각사 탑본을 받기도 하는 등 서화 교류를 활발히 진행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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