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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국가의 행사 중 가장 큰 행사는 국왕을 비롯한 왕실의 장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왕의 즉위식 또한 장례의 일부분일 정도로 절차도 복잡하고 삼년상을 치룬 후 종묘로 신위를 옮기기까지 상당히 오랜 기간이 소요되는 행사였끼때문에 의궤로서 많은 기록들을 남겨 놓고 있다. 국왕의 장례시에는 임시관청으로 시신을 수습하고 빈소를 차리는 빈전도감, 장례절차를 총괄하는 국장도감, 묘소의 능을 만드는 산릉도감이 설치된다. 고궁박물관에서 개최한 특별전에서는 구한말 명성황후의 장례를 진행하는 과정을 기록한 의궤를 중심으로 왕실의 장례절차를 기록한 의궤를 전시했는데, 명성황후는 대한제국이 선포된 이후 황제국의 절차를 적용하고 장례기간 또한 시해사건 이후 오랜 기간에 걸쳐서 진행되었기때문에 조선왕조 의궤 중 그 내용가 가장 방대하고 세밀하다고 한다.

왕실의 장례
왕과 왕비의 장례는 국장, 세자와 세자빈의 장례는 예장이라고 하여 그 명칭과 규모가 달랐다. 특히 왕과 왕비의 죽음은 국가와 백성들의 가장 큰 슬픔으로 최고의 예를 갖추어 엄숙하게 치러졌다. 왕이나 왕비가 돌아가시면 곧바로 장례준비를 위한 임시관청인 삼도감(빈전도감, 국장도감, 산릉도감)이 설치되었다. 빈전도감은 시신을 수습하여 빈소를 차리고 염습과 상복을 준비하는 일을, 국장도감은 장례를 총괄하고 왕의 관인 재궁을 왕릉에 모시는 일을, 산릉도감은 왕과 왕비의 묘소인 능을 만드는 일을 담당하였다. 장례를 치른 후 신주를 모시고 삼년상을 치르는 혼전을 담당하는 혼전도감이 별도로 설치되기도 했는데, 대부분은 빈전도감이 함께 업무를 담당하여 빈전혼전도감으로 불렀다. <출처:고궁박물관>

명성황후 국장
명성황후의 국장은 황제국이 된 이후에 최초로 치러진 황후 장례이다. 고종은 1897년 10월 황제로 즉위하자마자 1895년에 경복궁 건청궁에서 시해된 명성왕후를 황후로 추존하고 그동안 미뤄왔던 장례를 황제국의 격식에 걸맞게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명성황후의 국장은 근대적으로 변화된 제도 아래 주관되었으며, 왕실의례가 황실의례로 바뀜에 따라 모든 의례용품들의 종류와 양식이 변화하였고, 보다 다양하고 화려해졌다. 이를 통해 고종은 대내외적으로 대한제국이 자주독립국이자 황제국가임을 널리 알리고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고자 하였다. 명성황후의 첫장지는 서울 청량리 홍릉이었으나, 1919년 고종이 붕어하자 경기도 남양주시 홍릉으로 옮겨 고종과 함께 모셔졌다. <출처:고궁박물관>


명성황후 빈전.혼전 의궤 (명성황후 빈전도감의궤), 1895~98년, 오대산사고본
1895년에서 97년 사이에 치러진 명성황후 국장 당시의 빈전과 혼전에 관한 기록을 담은 의궤이다. 1895년에 빈전은 경복궁 태원전에 마련하고 혼전은 문경전으로 정했다. 그러나 1896년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황후의 시신을 경운궁 경호전으로 이봉하였으며, 혼전은 경운궁 경소전에 마련하였다. 이 의궤에는 망자의 혼을 부르는 복에서 부터 목욕, 습, 발인 등의 의식과 빈전과 혼전에서 사용했던 각종 기물에 대한 채색 그림이 실려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명성황후 국장 의궤(명성황후 국장도감의궤), 1895~98년, 오대산 사고본
1895년(고종 32) 10월 8일 시해된 명성황후의 국장에 대해 기록한 의궤이다. 명성황후의 국장은 왕실의 국장이 3개월을 넘기지 않는 것이 관례임에도 불구하고 2년이 지난 1897년에야 거행되었다. 이는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 왕후를 황후로 승격시키고 황제국의 격식에 맞추어 성대한 국장을 진행하고자 하는 의도 때문이었다. 따라서 다른 국장도감의궤와 달리 2년 2개월에 걸친 긴 장례기간의 내용을 담고 있어 분량이 국장도감의궤 중에 가장 많다. <출처:고궁박물관>



명성황후 옥보, 1897년. 1896년에 일본인들의 칼에 시해된 황후 민씨에게 '명성'이라는 시호를 내리면서 제작한 옥보이다. 인면에는 '명성황후지보'라고 새겨져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홍릉
청량리 홍릉은 1897년 명성황후의 국장 때 황후의 예로 세워진 능이다. 황제릉의 격식에 따라 정자각이 침전으로 바뀌었으나, 석물의 배치는 조선왕릉 형식을 따르고 있어 황제국과 제후국의 능형식이 혼재되어 나타났다. 이후 고종 황제가 1919년 1월 21일 승하하자 남양주시 금곡동으로 홍릉을 옮겼고, 고종 황제와 합장했다. 이 때 일자형 침전, 코끼리와 기린 석물 등을 조성하여 비로소 완전한 황제릉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명성황후 산릉 조성 의궤(명성황후 산릉 조성 의궤), 1895~98년, 정족산사고본
1895년(고종 32) 8월부터 1897년 11월까지 명성황후의 산릉을 조성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처음에는 동구릉 숭릉 옆에 '숙릉'이라는 능호로 산릉을 조성하다가 공사가 중단되었으나, 1896년 12월 다시 국장이 재개되었다. 1897년 고종이 능호를 '홍릉'으로 고치면서 다시 청량리로 산릉을 옮겼다. <출처:고궁박물관>


명성황후 산릉중수 의궤(홍릉석의중수도감의궤), 1903년, 오대산사고본
명성황후릉인 청량리 홍릉의 석물이 부서지거나 흑점이 생기는 등 문제가 있어 1808년 2월부터 도감을 설치하고 강화도와 충청도 남포 등지에서 고급 석재를 채취하여 산릉을 중수한 것을 기록한 의궤이다. <출처:고궁박물관>


효장세자장례의궤
영조의 첫째 아들인 효장세자가 어린나이에 세상을 떠나나 빈궁도감에서 왕세자의 장례를 기록하여 편찬한 조선시대 어람용 의궤이다. 어람용 의궤는 녹생이나 청색 비단을 표지로 사용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신분에 따라 왕의 시신을 모신 장소를 빈전, 왕세자의 시신을 모신 장소는 빈궁이라 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순종비 순명왕후릉 유강원 조성 의궤, 1904년, 오대산사고본
순종의 첫번째 비인 순명황후의 능인 유강원 조성에 관해 기록한 의궤이다. 순명왕후는 민태호의 딸로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순종이 왕이되기 전에 1904년에 사망하여 유강원에 묘소를 마련하였다가 순종이 세상을 떠난 1926년에 지금의 남양주시 유릉에 옮겨와 함께 모셔졌다. 보관을 위한 분상용 의궤의 표지는 홍색 무명 또는 삼베로 감쌌으며 내지는 초주지보다 질이 떨어지는 저주지를 사용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순종비 순명황후릉 유강원 조성 의궤, 1904년, 오대산사고본. 어람용 의궤는 내지에 붉은색 인찰선을 돌려 그린 반면 분상용 의궤는 검은색 인찰선을 그렸다.

부묘, 신주의 종묘 봉안 의식과 대제
국장이 끝나고 삼년상을 치른 후 신주는 조선의 역대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셔놓은 사당인 종묘로 모셔졌다. 이 의식을 부묘라고 하며 이후 종묘에서 정기적으로 제사를 올렸다. 종묘에서 지내는 제사는 국가의 가장 큰 행사인 대제로 불렸으며, 국가 존립의 근본이 되는 제례로 엄격하고 장엄하게 진행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철종 신주를 종묘로 모시는 의식에 관한 의궤(철종 부묘도감의궤), 1866년, 태백산사고본
1865년(고종2)에 철종의 3년상을 마치고 철종의 위패를 혼전이던 효문전에서 종묘로 옮기는 부묘에 관한 의식을 기록한 의궤이다. 1865년 2월 5일 효문전에서 철종의 신주를 옮겨 다음날인 2월 6일에 종묘의 제17실에 봉안하였다. 이로써 장례와 관련된 국가 의식은 모두 끝이 났으며, 종묘로 옮겨진 혼령은 나라와 백성의 안녕과 행복을 지켜주는 최고의 신으로 숭배되었다. 의궤에는 신주를 실은 가마가 종묘를 향해 가는 행렬을 그린 반차도와 부묘에 쓰인 책장, 제기 등의 기물에 대한 그림이 실려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왕실제기 중 코끼리.소 모양 술동이(상준, 희준), 산그림 술동이(상뢰)
종묘제례나 국장 등 왕실 제사에서 사용되었던 제기이다. 제상에 술을 올리는 의식을 행하기 위해 차려진 준소상에 사용된 제기로 계절에 따라 구별하여 사용하였다. 봄과 여름에는 조이.계이.희준.상준.산뢰를 놓았으며, 가을과 겨울, 납일에는 황이.가이.착준.호준.산뢰를 놓았다. <출처:고궁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