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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박물관] 가야의 대외교류

younghwan 2012. 4. 23.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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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 한반도남부지역에 자리잡았던 진국과 삼한시대에도 한반도는 한.중.일 무역에 있어서 중요한 거점이었으며,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킨 이유 중 하나가 고조선이 해상연안무역을 통제하면서 이익을 얻었기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 생겨났던 많은 성읍국가들 중 상당수가 한.중.일 해상무역로에 위치한 충청도 서해안, 영산강 하구의 나주지역, 한반도 동남부의 사천, 창원, 울산지역 등을 들 수 있으며, 이들 지역에서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청동제 의기 등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그 중 한반도 동남부에 위치한 가야는 일본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는 지리적 잇점으로 고대 이래로 한반도와 일본, 중국을 연결하는 주요 거점 중 하나로 파도가 거센 대한해협을 건너기 위해 잠시 쉬었다 가야만 하는 곳이다. 또한 철기시대에 고령을 중심으로 변한지역이 철생산의 중심지로 다양한 철제품들이 중요한 교역대상이 되었다. 초기에는 남해안 사천의 늑도, 고성 지역의 소가야를 비롯하여 마산항과 가까운 아라가야, 창원 다호리지역 등이 교역의 중심지였으나 점차 낙동강 하구의 넓은 평야와 낙동강 뱃길을 배경으로 한 금관가야가 한.중.일 교역의 중심이 되었다. 금관가야 지역이었던 김해 대성동, 양동리 고분군에서는 중국과 교역의 모습을 보여주는 청동솥, 청동거울을 비롯하여 일본과 관련된 폭넓은 창, 방울 형태의 창끝 꾸미개, 방패장식 등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또한 5~6세기 가야 연맹체의 중심지가 되었던 대가야의 고령,합천 지역에서는 다향형태의 갑옷, 유리잔 등에서 대외 교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3~4세기의 대외교류
낙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발전한 가야는 철을 매개로 주변 여러 지역과 활발하게 교역하였다. 무덤에서 출토되는 다량의 교류관계 유물이 이를 말해준다. 김해 대성동.양동리 고분에서는 중국제 청동거울, 청동솥을 비롯하여, 일본과 관련된 폭넓은 창, 창끝꾸미개, 방패장식, 석제장신구 등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일본에서도 토기와 덩이쇠 등 많은 가야계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이렇듯 가야는 발달된 제철기술을 기반으로 철을 생산하여 활발한 대외 교류를 하였다. <출처:김해박물관>



청동솥(Bronze cauldron), 김해 대성동 29호묘에서 출토되었다. 두 귀가 달리고 바닥이 편평한데, 이러한 모양의 청동솥은 북방 유목민들이 사용하던 것이다. 주로 몽골이나 중국 동북지방에 많이 출토된다.


방패꾸미개(shield ornaments), 김해 대성동. 바람개비모양 청동기는 가죽으로 만든 방패를 장식하던 도구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에도 이러한 유물이 많이 출토되며, 가야와 일본의 활발했던 교류를 알려주는 유물입니다. <출처:김해박물관>


화살촉모양석제품(Arrowuhead-shaped stone implements), 가락바퀴모양석제품(Spondle whorl-shaped stone implements), 칼집장식(Scabbard ornament), 김해 대성동


청동거울(Bronze mirror). 거울인데 얼굴이 비춰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거울의 뒷면이 보이도록 전시를 하였기때문입니다. 요즘의 거울과 달리 고대의 거울은 뒷면에 여러가지 무늬나 글씨를 넣어 정성스럽게 장식하여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무늬나 글시를 통하여 거울이 어느나라에서 만든 것이며, 언제 수입된 것인지 등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당시 거울은 지배자급 무덤에서 출토되며, 국가 간 물품교환의 대상이었습니다. 장식된 무늬는 종교적인 사상도 반영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거울의 뒷면은 고대국가와 관련된 많은 정보를 담은 귀중한 역사자료가 됩니다. <출처:김해박물관>


창끝꾸미개(Bronze pole fittings), 김해 대성동. 창을 매단 자루의 반대편 끝을 장식하던 것입니다. 안에는 금속이나 돌로된 노리개를 넣어 흔들었을 때 소리가 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일본에서 먼저 만든 것으로 알려져 왔지만, 우리나라에서 만들어 일본으로 전해졌다고 합니다. 함안에서는 흙으로 만든 것이 발견되기도 하였습니다. <출처:김해박물관>


항아리(Jar, 김해지역), 하지키(Hajiki, 일본토기, 경남 지역), 굽다리접시(Mounted cups), 마산 현동, 진해 용원


5~6세기의 대외교류
5~6세기대 가야연맹의 중심은 대가야였으며, 목항이리, 합 등을 비롯한 독특한 토기 문화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토기는 일본 규수에서 긴키까지 넓은 지역에서 발견된다. 가장자리에 무늬가 있는 거울.모자모양투구.세모꼴투구.삼각판갑옷.사각판갑옷.유리잔 등이 대가야 지역을 중심으로 발견되었다. 특히 이러한 유물들은 대외 교류 관계를 증명하는 것으로 지배층의 위신재로 추정된다. <출처:김해박물관>


말띠드리개(Horse strap pendant)와 말띠꾸미개(Horse strap decorations), 창녕 교동 외


청동바리(Bronze bowl, 합천 옥전), 용무늬꾸미개(Dragon-shaped ornaments, 함안 도항리)


자라모양토기(Snapping tutle-shaped pottery), 의령 천곡리


갑옷(Armour, 복제품), 고령 지산동 32호에서 출토된 것으로, 가로로 긴 형태의 철판을 가죽끈 혹은 못으로 연결하여 만든 갑옷이다. 갑옷과 함꼐 투구와 어깨갑옷이 함께 출토되었다. <출처:김해박물관>


목항아리.그릇받침(Long-necked jar & pottery stand), 부산 복천동


신라세력의 확산
서기 400년 고구려 군대의 침입에 의해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한 낙동강하류역의 가야세력은 큰 타격을 입는다. 먼저 창녕 지역이 신라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간다. 532년 신라에 의해 금관가야가 멸망하며, 562년 대가야의 멸망으로 가야는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전기 가야의 중심지였던 김해 대성동 고분에서는 5세기 전엽을 끝으로 대형 무덤의 축조가 중단된다. 각 가야의 특징적인 굽다리접시는 신라 양식인 짧은 굽다리접시로 바뀐다. 가야의 여러 지역에는 신라의 통일 양식 문화가 전파되어, 종래 다양한 가야 문화가 신라 지방 문화의 하나로 바뀌어 나갔다. <출처:김해박물관>


신라양식 토기(Silla style potteries), 삼국시대


은허리띠( Silver belt), 창녕교동. 허리띠 장식은 천이나 가죽에 금속으로 만들어진 장식품을 붙여 만들었다. 변진한에서는 호랑이나 말모양의 띠고리가, 삼국에서는 화려하고 복잡한 무늬를 장식한 것이 유행하였다. <출처:김해박물관>


허리띠장식(Belt ornaments), 삼국시대, 경남지역


관식(Headdress), 창녕교동. 관식을 관의 앞에 기우는 장신구로 금이나 은으로 만들어졌으며, 주로 새 깃털이나 나비모양을 하고 있다. 이런 관식은 관모와 함께 착용자의 신분을 과시하는 대표적인 위세품이다. <출처:김해박물관>


금귀걸이(Gold earing), 창녕 계성, 창녕 교동


팔찌(Bracelets), 경남지역


은반지,금반지(finger rings), 창녕 교동


가야의 배, 이 배는 호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배모양토기를 10배 확대하여 만든 것이다 죽은이가 저승에 편안히 가서 살기를 바라는 뜻에서 가야인들은 수레.신발.집.배 등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이형토기를 무덤에 만들어 넣었다. 당시 배는 중요한 운송수단이었다. 특히 해상교역을 바탕으로 성장한 가야 사람들에게 배는 특별한 의미를 지녔을 것이다. 가야사람들은 배를 타고 망망한 동해와 남해 그리고 서해를 자유로이 누비었으며, 멀리 일본열도를 거침없이 드나들며 가야의 기상을 덜쳤다. 이천년 세월의 힘을 이겨낸 가야의 배, 그 속에 험난한 파도를 헤치고 바다를 누비던 가야 사람들의 함성이 가득하다. <출처:김해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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