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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옥산서원(사적154호), 조선중기 문신이자 유학자인 회재 이언적을 모신 서원

younghwan 2012. 5. 27.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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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소재한 사적 154호로 지정된 옥산서원은 조선 중종때 문신 회재 이언적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전 서원이다. 옥산서원은 비교적 이른 시기인 1572년(선조5)에 경주부윤 이제민이 지역인사들과 함께 뜻을 모아 세웠으며, 1573년에 선조로부터 옥산서원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옥산서원은 서원의 건축양식이 정형화된 후기의 서원들과는 달리 건물의 배치나 건축양식에 있어서 자유로우면서도 형식적이고 절제된 형식을 반영하고 있다. 건물은 앞쪽에 강학공간, 뒷편에 제향공간을 두고 있는 전학후묘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으며, 서원을 출입하는 길이 있는 방향에 다른 서원에 비해서 넓은 고직사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서원 정문인 역락문을 들어서면 누각건물이 무변루가 있고, 그 앞으로 작은 시냇물이 흐르도록 하고 있다. 무면루를 들어서면, 정면에 강당 건물인 구인당과 양쪽에 동.서재가 배치되어 있다. 강당 뒷편에는 제향공간인 회재 이언적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체인묘가 있는데, 강당과는 일자로 배치되어 있지는 않다. 서원 주 공간인 강학공간과 비슷한 규모로 강당 옆쪽에 고직사를 비롯한 부속건물들이 있다. 옥산서원 경각에는 삼국사기를 비롯해서 많은 전적류를 소장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입구에 있는 별도의 전시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옥산서원은 경북 안강읍 옥산리의 옥산천이 흐르는 계곡에 자리잡고 있으며, 인근에 13층석탑이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 정혜사 절터가 있으며, 회재 이언적이 말년에 사랑채를 짓고 기거했던 독락당이 있다. 옥산서원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세워진 서원으로 후기의 제향공간이 중심이 되었던 정형화된 서원에 비해서 강학공간과 고직사의 규모가 큰 학문연구에 중점을 둔 교유기관으로서의 서원의 모습을 잘 갖추고 있는 곳이다.

 회재 이언적(1491~1553년)은 조선중기 문신으로 주로 중종대에 명종대에 관리이자 학자로서 활동했던 인물이다. 이 시기에 일어난 여러번의 사화에서 관직에 물러나거나 여러 사건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이언적은 학자로서 성리학 연구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주자의 주리론에 근본을 두면서 당시 성리학의 거두였던 조한보와 무극태극논쟁을 벌였으며, 이는 조선 성리학사에 최초의 본격전인 논쟁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학설은 이후 퇴계 이황에 의해 계승.발전되어 영남학파의 선구가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학문적 성과에 따라 1610년(광해군2)에 명종의 배향공신으로 종묘에 배향되었다.



옥산천 계곡에 자리잡고 있는 옥산서원 입구에는 이 서원이 생긴 이래로 조성한 다양한 수목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옥산천을 따라서 서원으로 들어가는 울창한 숲길. 옥산서원 주변은 다양한 나무들이 심어져 있는 전형적인 조선시대 인공림이라고 할 수 있다. 인근 마을에 비해서 숲이 상당히 우거져 있다.


옥산서원 전경. 옥산서원길을 따라서 들어가다보면 제일 먼저 서원의 살림을 맡아보던 고직사 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옥산서원 정문 앞 마당에는 지금 고직사 건물 일부를 수리하고 있어 약간 어수선한 느낌을 주고 있다.


옥산서원 정문인 역락문. 삼문의 형식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출입문이다. 주위로는 옥산서원 특유의 흙과 벽돌을 섞어서 만든 토담으로 둘러져 있다.


독락문을 들어서면 출입문이자 이곳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의 휴식공간인 무변루가 있다. 무변루는 앞면 5칸의 건물로 가운데 3칸은 넓은 대청마루를 두고 양쪽에 온돌방을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양쪽에 조선후기 건축물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작은 누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지금은 판문을 달아 놓고 있지만, 판문을 열면 누각 마루에서 서원 앞을 흐르는 옥산천 계곡을 보면서 쉴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무변루 앞마당에는 계곡에서 물을 끌어 들여 흐를 수 있도록 작은 수로를 만들어 놓고 있다. 이는 궁궐 건물에서 볼 수 있는 금천과 비슷하게 서원 안팎을 구분하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으며, 형식과 절제를 강조한 이 서원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강학공간
강학 영역은 학문을 연구하는 공간으로 무변루, 구인당, 민구재(동재), 암수재(서재) 등의 건물로 이뤄져 있다. 유생들의 휴식공간인 무변루는 '끝이 없는 누각'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편액의 글씨는 석봉 한호가 쓴 것이다. 처음 이름은 납청루였으나, 노수신이 '스승이 남긴 뜻에 맞지 않다'며 주돈이의 '풍월무변'을 따와서 무변루로 고쳤다. 무변루를 마주 보고 있는 구인당은 이언적이 쓴 '구인록'에서 이름을 따왔는데, 이 현판도 석봉 한호가 썼다. 구인당은 현종4년(1838)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지어졌다. 이곳은 강의와 토론이 열렸던 곳으로, 서원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마루 양쪽의 양진재와 해립재는 교수와 유사들이 기거하던 곳으로 현대학교의 교무실에 해당한다. 강당의 앞마당 좌우에는 유생들이 학문을 닦으며 기거하던 동재와 서재가 마주보고 있는데, 유생들 간에도 위계가 있어 나이가 많은 유생들이 동재에 기거하였다. <출처:경주시청>


옥산서원 강학공간의 중심건물이라고 할 수 있는 유생들이 공부하고 학문을 논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강당건물인 구인당이다. 앞면 5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로, 양쪽에 1칸씩 온돌방을 두고 있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건축물로서는 잘 지어진 건물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단정하면서도 절제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후기 명필 추사 김정희가 썼다는 옥산서원 현판


강당 대청마루 내부부. 뒤편은 판문으로 막혀 있는데, 판문을 열면 상당히 시원하고 넓은 느낌을 주는 구조이다. 대청마루에 걸려 있는 '구인당'이라 적혀 있는 현판은 조선중기 명필 한석봉이 쓴 글씨라고 한다.


뒷편에서 본 강당 건물


강당 온돌방의 아궁이


강당 옆에 있는 작은 쪽문과 담장. 이 곳을 통해서 계곡으로 출입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강학공간 마당 앞 유생들이 기거하면서 공부하던 건물인 동재에 해당하는 민구재. 옥산서원에서 공부하던 유생중 상급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머눌던 곳으로 앞면 5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이다. 온돌방 3칸과 작은 대청마루를 1칸씩, 2개를 두고 있다. 이 곳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을 서열에 따라서 분리하여 공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옥산서원 서재에 해당하는 암수재. 서원에서 공부하던 유생중 하급생에 해당하는 유생들이 기거하면서 공부하던 공간으로 건물구조는 동재와 같은 형태이다. 다른 서원의 동.서재에 비해서 건물규모가 큰 편으로 학문을 연구하는 교육기관의 역할이 강조되었던 초기에 세워진 서원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마당 한쪽편에 세워진 불을 밝히던 정료대


앞면 5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유생들이 휴식공간으로 사용되었던 누각건물인 무변루. 다른 향교나 서원의 누각건물과 마찬가지로 이 곳 옥산서원을 찾은 손님을 맞는 접대장소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무변루 넓은 대청마루. 대청마루에 걸린 '무변루'라고 적힌 현판은 조선중기 명필 한석봉이 쓴 글씨라고 한다. 판문을 열면 서원앞을 흐르는 옥산천 계곡이 한눈에 들어오는 구조이다.


제향공간
제향영역은 제사를 지내는 공간과 이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체인문.체인묘.전사청.경각.비각 등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체인문을 들어서면 회재 이언적의 위패를 모신 체인묘가 있다. 사당은 신성한 공간이며 위엄을 갖추어야 하기에 내삼문의 주위로 담장을 둘렀다. 전사청은 제사를 지내기 전날에 제수를 보관하던 곳으로 평상시에는 제기와 제구를 보관한다. 사당 오른쪽에 있는 경각에는 어서, 어필, 내사본, 퇴계수필, 각종 전적 등을 봉안하고 있다. 사당 왼쪽에 있는 것은 선조 10년(1577)에 세워진 이언적의 신도비각이다. 신도비의 비문은 고봉 기대승이 짓고, 글씨는 아계 이산해가 썼다. 건립 당시에는 이 서원 앞의 계곡에 있었으나 훼손을 막으려고 서원 안으로 옮겼다. <출처:옥산서원>


회재 이언적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는 제향공간의 출입문인 체인문과 담장. 출입문은 삼문의 형식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후대에 세워진 제향공간 중심 서원과는 약간 다른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회재 이언적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체인묘.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전형적인 사당 건물의 형태를 하고 있다. 그 옆에는 제사를 모시는데 필요한 제기등을 보관하는 전사청 건물이 있다.


사당 옆에는 앞면 3칸, 옆면 1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경각이라는 작은 건물이 있다. 이곳에는 삼국사기를 비롯하여 어서, 어필, 내사본, 퇴계수필, 각종 전적 등을 봉안하고 있었다. 지금은 별도의 건물에서 옥산서원 소장 전적류들을 보관.전시하고 있다.

문원공 회재 이언적 신도비
문원공 이언적(1491~1553)은 조선 중종 ~ 명종대를 대표하는 성리학자이자 사림파 관료로 동방오현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는 주자의 주리론에 근본을 두면서 당시 성리학의 거두였던 조한보와의 무극태극논쟁을 통하여 이선기후설과 이기불상잡설을 강조하였다. 이는 조선조 성리학사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논쟁으로 평가되었으며, 그의 이우위설은 이후 퇴계 이황에 의해 계승.발전되어 영남학파 성리학의 선구가 되었다. 이 신도비는 1577년 대학자 회재 이언적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후학들이 뜻을 모아 건립한 것이다. 비문은 호남의 거유였던 고봉 기대승이 짓고, 아계 이산해가 썼다. 한편 이 신도비는 건립당시에 옥산서원 앞 계류 옆에 있었으나, 훼손을 막기 위하여 서원 안으로 옮겨졌다. 비의 전체 높이는 320cm이며, 비신의 높이는 204cm이다. <출처:경주시청>


사당 옆에는 회재 이언적을 기리는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원래 신도비는 서원 앞 계곡 부근에 세워져 있었는데, 안전을 위해서 후대에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이 신도비는 1577년에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후학들이 건립한 것이라고 하며, 비문은 고봉 기대승이 짓고, 글씨는 아계 이산해가 썼다고 한다. 신도비의 이수부분에 색깔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신도비에 적혀진 글씨. 상당히 잘 쓴 글씨체이다.


신도비의 거북받침돌


강당 동쪽편으로는 상당히 큰 규모의 고직사 건물이 있는데 지금은 수리중이다.


수리중인 고직사 건물의 일부분. 고직사 건물에는 상당히 많은 방을 두고 있는데, 아마도 조선시대 경주지방을 방문하는 유력인사들이 이 곳 옥산서원을 찾았을 때 이곳에 잠시 머물수 있도록 건물을 크게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고직사 건물로 들어가는 작은 쪽문과 담장


지금도 서원 관리인이 머물며 살림집으로 사용하고 있는 포사라는 작은 건물과 고직사 건물


옥산서원 앞으로 흐르는 하천인 옥산천. 이 하천 주변으로 울창한 인공림을 조성하여 상당히 운치있는 계곡을 만들고 있다.


하천 옆에는 바위가 만든 상당히 넓은 공간이 형성되어 있다. 아마도 이곳의 경관이 원래부터 상당해 빼어나서 이곳에 옥산서원이 세워졌던 것으로 보인다.


옥산서원 입구의 유물전시관


유물전시관에서 옥산서원으로 들어가는 길



옥산서원, 사적 154호,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이 서원은 회재 이언적(1491~1553년)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자 세웠다. 이언적은 조선 중종 때의 문신으로 그의 성리학은 퇴계 이황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종묘에 명종의 공신으로 모셔져 있다. 그가 타계한지 20년 뒤인 1572년에 손자와 제자들의 뜻에 따라 월성부윤 이제민이 서원을 세웠으며, 1573년 선조에게서 '옥산서원'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고종 5년(1868)에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을 때에도 헐리지 않고 그대로 살아남은 47개의 서원과 사당 중 하나이다. 서원 건축의 역사로 보면 옥산서원은 초기의 건축물에 해당하는데, 당시에 지어진 서원들이 비교적 자유로운 구성을 따랐던데 비해, 이 서원은 틀에 짠 듯 질서 정연한 형식을 보이고 있다. 까다롭기로 유명했다던 이 서원의 원규(학칙)만큼 이 건축물에서도 긴장과 절제가 묻어난다. 정문인 역락문을 들어서면 누각인 무변루가 있고, 강당인 구인당과 양쪽으로는 동재와 서재가 있으며, 강당 뒤쪽에 서 있는 것이 회재를 모신 사당인 체인묘이다. 동재의 오른쪽으로 지어진 여러 건물들은 서원의 살림을 맡았던 곳이다. 이곳 고직사는 다른 서원에 비해 유난히 규모가 커서 예전의 재산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고직사 뒤에 있는 문집판각은 목판을 보관하는 곳이다. 옥산서원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이며, 그 현판 뒤에는 아계 이산해가 쓴 또 다른 현판도 걸려 있다. <출처:경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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