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18년 고구려 세력중 온조를 중심으로 한 집단이 남하에서 한강 이남 위례성에 자리를 잡은 것으로 나타나며, 중국 사서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따르면 한반도 서남부에 자리잡은 마한 54국 중 하나인 백제국으로 기록되어 있다. 초기 백제의 실체에 대해서는 두 기록이 다르기는 하지만, 대체로 부여계통의 세력이 마한의 토착세력과 결합한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는 한강유역의 초기 철기시대의 발달된 문화와 농업생산력을 바탕으로 마한연맹체에서 그 세력을 확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마한 54국 연맹체 중의 하나였던 백제는 3세기 마한세력과 낙랑.대방군과의 전쟁으로 마한의 주도세력이었던 목지국 세력이 약화된 시기에 주변국을 제압하고 마한지역의 주도세력으로 자리잡은 것으로 여겨진다. 주로 고이왕대에 그 세력을 상당히 넓혔으며, 안성.성환 등 경기남부와 충청지역, 서해안 지역을 장악하면서 고대국가로서의 토대를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백제가 고대국가의 기반을 갖추게 되면서 충남 지역의 토착세력들은 4~5세기를 거치면서 대부분 백제에 흡수되었다. 당시의 토착세력들이 살았던 모습들은 금강 하구지역의 서천 봉선리. 금산 수당리, 서해안 지역의 서산 부장리, 금강 중류 지역의 공주 수촌리, 청양 학림리 등의 유적을 통해서 살펴 볼 수 있다. 이런 유적지에 출토된 유물들을 살펴보면 마한 54국 시절에 비해서 크게 바뀐것은 없는 것으로 보이며, 유사한 형태의 토기와 무기류, 구슬 등의 장신구 등이 있다.
백제, 마한으로 진출하다.
한강 유역에서 마한 54개 소국 둥의 하나로 시작된 백제는 점차 주변의 마한 세력을 통합하여 3세기 중후반에 고대국가로 성장하였다. 충남 지역의 토착집단이었던 마한의 여러 세력들은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후반에 대부분 백제에 흡수되어 갔다. 서천 봉선리.금산 수당리. 서산 부장리. 공주 수촌리. 청양 학암리 등의 유적을 통해 충남지역 토착세력과 중앙세력과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출처:부여박물관>
짧은목항아리(논산 표정리), 곧은목항아리(서천봉선리), 백제
장군, 곧은목항아리, 서천 봉선리, 백제
세발토기, 논산 표정리, 백제
긴목항아리(서천 봉선리, 백제), 굽다리접시(아산 갈매리, 마한)
재갈(Bit), 논산 모촌리, 백제
청동 종방울(Bronze bell with clapper), 부여 합송리, 마한
살포(Iron spade), 금산 수당리, 백제
민고리자루칼(Sword with ring pommel, 서천 봉선리), 고리자루칼(천안 청당동), 마한
쇠도끼(Iron axe, 금산 창평리), 백제
쇠투겁창(Iron socketed spearhead), 서천 한성리, 마한
살포(Iron spade), 논산 표정리, 백제
쇠낫(Iron sickle, 서천 봉선리, 마한), 따비(Iron weeder, 부여 함양리백제)
금동귀걸이(Gilt-bronze earing), 청양 장승리, 부여 가증리, 서천 추동리, 백제
구슬, 서천 봉선리, 마한
마한 토실, 집이 마치 무덤과 같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에는 "마한인은 지붕을 풀로 덮은 토실에서 사는데, 가옥의 형태는 무덤과 같고 그 출입구는 위에 있다. 토실 속엣 온 집안 식구가 함께 살기 때문에 어른.아이와 남녀의 분별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계단을 두고 출입해야 할 정도로 외부 지면과 2~3단의 차이를 둔 토실을 만든 이유는 겨울철의 추운 외부 공기를 차단시켜 실내 기온을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출처:부여박물관>
가락바퀴, 완(Bowl), 깊은바리, 바리, 공주 장선리, 마한,
마한, 구슬을 제일 보배로 여기다.
<후한서>와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의 기록에 따르면 "마한인들은 금은이나 보배, 비단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구슬만을 제일 소중히 여겨 옷에 매달아 장식하여 입기도 하고 목에 달아 내려뜨렸다"고 한다. 구슬은 유리.마노.벽옥.수정 등의 재료로 만들어졌으며, 비취색.남색.녹색.황갈색 등의 색깔이 확인된다. <출처:부여박물관>
유리 거푸집(Bead mold), 진천 산수리, 대전 용계동, 마한,
마노 구슬, 천안 청당동. 특히, 마한인들은 유리구슬을 상당히 귀하게 여겼다고 기록에 남아 있는데, 이는 마한 뿐만 아니라 김해지역의 유물에서도 비슷한 경향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금제 장신구를 상당히 중요시 여겼던 신라와는 다른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유리대롱옥(부여 합송리), 곱은옥(천안 청당동), 마한
* 자료참조: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2. 부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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