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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박물관

[부여박물관] 성왕과 사비도성

younghwan 2012. 5. 28.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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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성은 부여읍 지역에 있었던 백제시대의 성으로 좁게는 부소산성을 말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백제의 수도였던 시기에 쌓았던 읍성 형태의 백제 나성과 백제의 마지막 수도를 일컫는 말이다. 백제는 지형이 방어에 용이한 공산성을 중심으로 한 웅진이 주변에 넓은 벌판이 부족하고 협소하여 넓은 벌판을 배후로 하고 사방에 크고 작은 산성이 있는 부여로 천도한 것은 성왕 16년(538)이다. 사비성은 백마강이 자연적인 성벽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부소산성 남쪽인 관북리에 궁궐과 지배층의 거주지가 형성되어 있었으며, 부소산성에서 동쪽 능산리 고분군과 남쪽 궁남지 아래쪽까지 산과 평지를 연결하는 나성을 쌓았으며, 이를 사비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사비지역은 웅진이 수도였을때부터 배후도시로서 기능을 하고 있었으며, 이를 보여주는 사례로 부여의 정동리 가마터에서 웅진기의 고문들에 사용된 연꽃무늬 전돌과 글씨가 새겨진 전돌들 발견되고 있는 점이다. 부여박물관에서는 공주송산리와 정동리가마터에서 출토된 전돌을 같이 전시하고 있어서 서로 비교해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또한 부소산성은 사비성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로서 상당히 많은 무기들이 저장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획도시 사비, 천도는 언제부터 준비되었는가?
성왕은 538년(성왕16) 웅진에서 사비로 수도를 옮긴다. 사비를 수도로 선택한 이유는 백마강과 산맥에 둘러싸여 방어에 유리한 자연적 조건과 넓은 평야를 기반으로 한 경제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비지역은 웅진시기인 동성왕대부터 여러 차례 수렵을 나가거나 가림성을 쌓는 등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 왔던 곳이다. 또한 사비지역이 웅진의 배후도시로서 기능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는 정동리 가마터에서 무령왕릉이나 송산리 6호분, 저석리 벽돌덧널무덤에 쓰인 연꽃무늬 전돌과 글씨가 새겨진 전돌, 무늬없는 전돌을 공급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출처:부여박물관>


글자와 무늬가 새겨진 전돌들. 웅진이 도읍이던 시기에 가마터였던 부여 정동리 가마터에서 구워진 전돌들도 있다.


'중방'이 새겨진 전돌, 연꽃무늬 전돌, 공주 송산리


'중방이 새겨진 전돌, '대방'이 새겨진 전돌, 연꽃무늬 전돌, 부여 정동리


청자조각, 중국남조


연꽃무늬 수막새, 부여 용정리사지, 고구려


'신부갑와', '대통', '정사', '전부갑와'가 새겨진 도장글씨 기와

사비에 성을 두르다, 나성과 부소산성
사비도성의 조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도성 방어시설의 정비로 부소산성과 나성이 가장 먼저 축조되었다. 부소산성은 부소산 전체를 감싼 포곡식 산성으로 판축공법을 사용하여 지어졌다. 부소산성은 왕궁의 대피성과 후원의 성격도 갖추고 있었다. 부소산성은 동문지에서 중국 남조 양무제의 연호인 '대통'이 찍힌 도장무늬 기와가 출토되어 527~528년 경에는 축조가 시작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나성은 도성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경계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북나성과 동나성이 확인되며, 서쪽과 남쪽은 백마강이 자연해자의 기능을 하였다. <출처:부여박물관>


부여 부소산성 출토 유물


세갈래 갈고리, 쇠낫,


쇠도끼, 갈고리창


비늘갑옷 조각, 마름새, 쇠살촉

부여 동나성 출토 유물,


세발토기, 뚜껑접시,
 

항아리, 


짧은목항아리, 숫돌


자배기(부여 청마산성), 굽다리 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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