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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산성_읍성)

연천 은대리성(사적469호), 한탄강과 지천이 만나는 지점에 쌓은 고구려군 요새

younghwan 2012. 8. 31.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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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천군 전곡읍 선사유적지 동쪽편에 위치한 은대리성은 삼국시대 고구려군이 쌓은 요새이다. 연천 호로고루, 당포성과 임진강을 건너는 주요 도하지점에 쌓은 강안 평지성으로 주민들이 거주하는 주변지역을 관리하기 행정의 중시지인 읍성은 아니고, 전략적 요충지에 쌓은 군사적인 성격의 요새라 할 수 있는 곳이다. 연천 은대리성은 한탄강의 지류인 차탄천이 한탄강과 만나는 지점에 형성된 삼각형의 하안단구 위에 축성된 것으로 군사들이 임진강을 걸어서 건널 수 있는 주요 도하지점을 관리하고, 서울과 함경도 지역을 연결해주는 교통로인 3번국도 주변을 통제할 수 있는 군사적 거점이라 할 수 있다.

 한탄강과 지천인 차탄천이 만나는 하안단구 위에 축성된 은대리성은 동쪽을 제외하고는 절벽이 자연 성벽 역할을 하고 있으며, 실제로 고구려군은 동쪽에서만 성벽을 축조하고 있다. 은대리성의 전체규모는 동서 400m, 남북 130m, 둘레 1.5km 정도이다. 성에는 성문터 3개, 건물터 1개, 치성 2개가 확인되었다. 실제로 쌓은 성벽인 동벽은 돌과 흙을 같이 사용하여 축조한 성벽으로 내부는 토축으로 바깥쪽은 잔돌을 사용하여 석축을 쌓고 있다. 석축을 쌓는 방법은 연천 호로고루나 당포성과 큰 차이는 없으나 이곳에 많은 현무암을 잘게 다듬어 석축을 쌓았다. 은대성을 쌓은 시기는 고구려가 남하하여 백제가 충돌하던 5세기 후반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호로고루와는 달리 신라가 한강을 장악한 후 고구려와 충돌하던 시기에는 신라가 함경도 지역을 장악했기때문에 크게 중요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연천 호로고루, 당포성과 함께 삼국시대 임진강을 중심으로 삼국이 세력을 다투던 시기의 모습을 보여주는 유적이라 할 수 있다.

4세기말 고구려의 남진이 본격화되자 연천과 전곡일대는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의 전략적 요충지가 되었다. 고구려군이 한탄강을 건너서 한성으로 진출할 수 있는 통로였기때문이다. 이후 두나라는 임진강과 한탄강을 경계로 서로 대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5세기 전반에 고구려가 전곡 일대에 진출하였던 흔적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후 475년 장수왕이 백제의 한성을 점령할 무렵 은대리성 주변은 완전히 고구려의 영향권에 포함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고구려군의 일부가 은대리성을 전지 기지로 삼아 동두천과 양주를 거쳐 백제 한성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출처:연천군청>



한탄강과 지류인 차탄천이 만나는 지점에 형성된 강안단구에 세워진 연천 은대리성. 한탄강이 흐르는 남쪽은 높을 절벽이 성벽 역할을 하고 있으며, 북쪽과 서쪽 또한 경사진 지형을 이루고 있어 천혜의 요새이다.


연천 은대리성으로 들어가는 길. 은대리성은 연천 전곡리선사유적지 부근에 있는 연천군의료원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다.

은대리성의 구조
은대리성은 외성과 내성으로 이루어진 이중구조의 성이다. 서쪽 문루 꼭지점 부분에 언덕을 중심으로 내성을 쌓고 그 외부에 다시 성벽을 쌓아 외성을 만들었다. 전체 규모는 동서 400m, 남북 130m, 둘레는 1,005m이며, 면적은 26,479㎡이다. 평면 형태는 삼각형이고 외성 안에 내성을 갖고 있는 것은 당포성과 같다. 문지는 북벽에서 2개소의 문지가 확인되었고 남벽에서도 1개소가 확인되었다. 제일 규모가 큰 문지는 북문지로 북벽과 내성벽이 만나는 곳에 있다. 이곳은 성북톡의 장진천 쪽으로 통하는 한탄강을 건너는 길과 연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벽에도 한탄강으로 내려가는 작은 문지가 있다. 동벽에는 통행에는 편리하나 방어에 취약한 곳이서 문을 만즐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성의 중앙부에는 대형 건물지가 있다. 남벽에 접하여 긴 돌무무더기 외부를 감싸고 있다. 그 안에 서는 건물지 벽체에 사용되었던 불에 탄 진흙이 확인되고 있다. 기와편은 발견되지 않았고 발굴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아 축조시기를 판단할 수 없다. 대형건물지 동쪽의 넓은 평지에도 여러가지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시굴조사 결과 시설물이 있었던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 경작지로 조성하는 과정에서 원 지형이 없어지고 유적도 함께 사라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연천군청>


은대리성은 한탄강과 지천이 만나는 지점에 형성된 강안단구 평지에 세워진 요새로 동쪽을 제외한 삼면이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실제로 성벽은 동쪽에만 쌓아 놓고 있다.


동벽은 흙으로 쌓은 토축성에 석축을 쌓은 형태로 임진강변에 위치한 호로고루나 당포성과 비슷한 축성방법을 보이고 있다. 동쪽은 은대리성으로 들어오는 출입통로이자 방어상 취약한 지점으로 은대리성 동벽에는 출입문을 두고 있지 않다.

은대리성 동벽
은대리성의 동벽은 성내부로 진입이 가능한 동쪽 방변을 차단하는 방어시설이다. 성의 중심부는 흙을 다져 쌓았고 그 외부에 석성을 쌓아 올린 토심석축의 구조이다. 이런 형태의 축성법은 연천호로구루나 연천당포성의 동벽에서도 관찰되고 있다. 단지 호로고루나 당포성은 잘 다듬은 석재를 이용한 반면, 은대리성의 동벽은 막자른 현무암을 사용한 것이 다르다. <출처:연천군청>


은대리성 동벽. 고구려 요새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성벽이다. 흙을 다진 토축 기단 위에 토축으로 성벽의 중심부를 쌓고 바깥쪽에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현무암을 잘게 쪼개어 석축을 쌓고 있다.


성벽 내부는 경사를 완만하게 하고 있다.

은대리성 외성의 구조와 축조방법
성벽(동벽)은 석재와 흙을 같이 사용하여 축조한 성벽이다. 기초는 원래 지표층을 파서 평탄하게 정리하고 그 위로 황갈색 점토를 20~50cm 정도 다져 조성하였다. 성벽은 3중 구조로 축조되었다. 성벽 중심부는 현무암을 잘게 부수어 점토와 섞은 후 이를 차고차곡 다져 눌렀다. 이 다짐층 양쪽 바깥쪽으로는 막자른 현무암을 이용하여 막히게 하였다. 석축으 두께는 내벽쪽이 외벽쪽에 비하여  더 두껍다. 내벽 쪽 경사를 완만하게 하거나 성벽뒤로 통행로를 만들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석축 바깥과 위로는 다시 모래와 점토를 섞어서 약 30~50cm 이상 덮어 마무리 하였다. 내벽쪽에서는 최소한 2차례 이상 성벽을 보수한 흔적도 보이고 있다. 처음 축조한 성벽을 붕괴한 후 그 위에 석잰나 점토를 덧씌우거나 석축 외부에 새로운 석재를 덧쌓아 올렸던 흔적이 있었다. 내벽 기초부에서는 빗물을 처리하기 위한 도랑도 출토되었다. 도랑 내부의 퇴적토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다량의 고구려 토기가 출토되어 성벽의 축조시기를 추정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토성은 기초부 2~3단의 석재를 놓고 그 위로 점토를 다시 올리거나 흙을 성토하는 방식이다. 반면에 은대리성은 석축돠 토축을 병행하고 토축에 점토와 잔돌을 섞어서 다져 쌓은 것이 특징이다. 이는 단기간에 성벽을 축조하거나 양질의 석재를 구하기 어려운 환경적 요인에서 나타난 특수형태로 추정된다. <출처:연천군청>


은대리성 입구에 위치한 연천군의료원


한탄강이 지나가는 남벽은 강안의 절벽이 성벽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 위에 목책을 두어 성내부가 보이지 않게 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남벽에서 내려다 보이는 한탄강. 상당히 높은 절벽위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남벽 위에 재현해 놓고 있는 목책


은대리성 내부. 이곳에는 기와편은 출토되지 않고 백제와 고구려의 토기들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기와편이 없는 것으로 볼 때 큰 건물은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요새로서 군사들의 숙영지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이곳에는 남쪽과 북쪽에 3개의 성문터와 건물터 등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은대리성 출토유물과 축조시기
은대리성에서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 토기이며 기와는 출토되지 않았다. 토기는 백제토기와 고구려토기로 구분되며 신라토기는 출토되지 않았다. 백제토기는 수량도 적고 작은 파편으로 출토되어 그 성격을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다른 지역에서 출토된 백제토기와 비교할 때 대체로 4세기 후반에서 5세기초의 것들로 추정된다. 고구려토기는 남한지역에서 출토된 고구려토기 양식과 큰 차이가 없다. 바탕흙은 고운 점토를 사용하였지만 호로고루나 아차산 출토 토기보다 거칠다. 표면 색조는 회색이나 흑색, 황색 등도 있다. 대부분 항아리 종류가 많지만 동이류나 시루도 섞여 있다. 은대리성 출토 고구려토기의 특징은 표면에 여러 종류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토기가 많다는 점이다. 이러한 종류의 토기는 몽촌토성에서도 출토되었다. 남한지역 출토 고구려 토기 중 가장 빠른 시기에 속하며 대체로 5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은대리성은 일부 지역에 대한 시굴조사만 이러어져 축조시기와 성격이 분명하지 않다. 다만 현재까지 조사 결과로 대략적인 축조시기를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현재까지 조사 결과를 종합하면 은대리성을 축조하고 사용한 나라는 고구려로 추정된다. 출토 토기와 역사적 상활을 고려하면 처음 축조된 시기는 대체로 5세기 후반 경으로 추정되며 후에 조사가 더 이루어지면 보다 정확한 축성시기와 사용기간이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출처:연천군청>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는 은대리성에서 한탄강과 지천이 만나는 지점에서 망루와 같은 역할을 했던 전망대로 들어가는 길.


은대리성 동쪽끝 전망대. 한탄강과 지류가 만나는 지점이 내려다 보이는 절벽 위에 위치하고 있는 곳으로 임진강을 도하할 수 있는 여울목을 감시할 수 있는 망루 역할을 했던 곳으로 보인다.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한탄강.

연천 전곡 일대는 철원방향에서 화산이 폭발하여 천천히 용암이 흘러내려오다 식어서 만들어진 용암대지이다. 한탄강은 오랜 시간 용암대지를 침식하고 흐르면서 강 양쪽에 절벽을 만들었다. 그 때문에 한탄강은 대부분 지역이 강을 건너 통행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지류가 흘러드는 곳은 지류에 의하여 침식된 부분이 강으로 내려가는 통로의 역할을 함으로 비교적 통행이 수월하다. 이중에서도 강의 수심이 얕고 여울이 발달한 곳은 걸어서도 건널 수 있다. 군대가 진군할 때 병사들이나 말이 배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군사적 활용 가치가 아주 높다. 은대리성, 당포성, 호로고루 등이 바로 이러한 지형에 위치하고 있다. <출처:연천군청>


한탄강변에서 보이는 은대리성


은대리성 앞을 흘러가는 한탄강. 연천 전곡일대는 철원지역에서 화산이 폭발하여 흘러내린 용암대지로 한탄강은 용암대지를 침식하면서 강 양쪽에 절벽을 만들고 있다. 은대리성이 있는 이곳은 한탄강과 지류가 만나는 곳으로 강의 수심이 얕아서 군사들이 걸어서 도하할 수 있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점 중 하나이다.


연천군 전곡리 일대를 지나서 한탄강으로 흘러드는 지천인 차탄천과 한탄강이 만나는 지점의 강안단구 평지에 은대리성이 위치하고 있다.


연천 전곡지역을 흐르는 차탄천


차탄천에서 보이는 은대리성

연천 은대리성, 사적 469호, 연천군 전곡읍 은대리
연천은대리성은 한탄강과 차탄천의 합류지점에 형성된 삼각형의 하안단구 위에 축조된 삼국시대 성곽으로 한탄강과 합류하는 곳이 삼각형의 꼭지점을 이루고 이곳에서 동쪽으로 가면서 점차 넓어지는 형태이다. 한탄강과 차탄천의 합류지점에 형성된 마여울은 수심이 낮아 강을 쉽게 건널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인데, 은대리성은 이곳을 통제하는 고구려성이다. 남벽과 북벽은 각각 자연 절벽을 그대로 성벽으로 활용하였으며 동벽은 동쪽에 형성된 개활지를 가로질러 축조되었다. 성의 규모는 동서길이 400m, 남북길이 130m로 총길이 1,005m정도이다. 연천은대리성은 연천호로고루, 연천당포성과 함께 임진강과 한탄강이 지류와 만나 형성되는 삼각형의 대지 위에 조성된 독특한 강안평지성으로 삼국시대 고구려의 남진경영과 관련된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출처:연천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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