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까지 과천과학관에서 열렸던 '신비의 파라오 투탕카멘' 특별전에 전시되었던 내용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보았다. 이 전시는 20세기 고고학 최고의 발굴이라고 평가받는 이집트 룩소르 서안 왕가의 계곡에서 발견된 신왕국 파라오였던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발굴된 내용을 재현해 놓은 전시회였다. 실제 유물을 전시하는 것은 아니고 무덤에서 발굴된 유물될을 원본에 가깝게 복제하여 실제 유물들이 어떻게 생겼느지, 무덤은 어떤 형태로 되어 있는 지을 잘 보여주는 유물이다.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와 카나번 경을 중심으로 1917년 봄 룩소르 서안 신왕국 파라오들의 무덤들이 모여 있는 왕가의 계곡에 5여년의 발굴작업을 통해 1922년에 투탕카멘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왕가에 있는 대부분 왕들의 무덤은 당시 도굴꾼들에 의해 도굴되어 현재 대부분은 벽화들이 그려진 묘실들만이 남아 있는데 비해 투탕가멘의 무덤에서는 많은 보물들을 비롯하여 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 미이라 등이 원래의 상태 그대로 남아 있었다. 현재는 미이라와 황금마스크를 비롯한 보물들은 이집트 카이로의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전시되고 있다. 실제 발굴된 유물들을 카이로 고고학박물관에서 볼 수 있지만, 전시회에서는 원래 유물을 아주 세밀하게 복제하여 실제와 마찬가지로 자세히 투탕카멘의 보물들을 살펴볼 수 있게 해 주었다.
투탕카멘(Thtankhamun)은 이집트 18왕조의 파라오로 재위기간은 기원전 13612~1352년으로 18세의 어린 나이에 요절하였다. 실제 투탕카멘은 1922년 무덤이 발굴되기 이전에는 잘 아려져 있지 않았으며, 아비도스나 카르나크의 역대 이집트 파라오 목락 등에서 아버지인 아크나톤과 함께 제외되어 있다. 이집트의 기록에는 아메호테프 3세의 아들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 그가 태어난 시기로 볼 때 아크나톤의 아들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의 아저지 아크나톤은 테베의 신관세력들을 제압하기 위하여 다신교의 이집트 종교를 금지하고 태양신 아톤을 유일신으로 숭배하는 일신교를 도입하고 수도를 테베에서 아-아마르나 지역으로 옮기는 등 많은 변혁을 추구했던 왕이었다. 아버지 아크나톤과 삼촌이 스메크카레가 죽은 후 10세의 어린 나이에 파라오의 자리에 오른 투탕카멘은 아크나톤 사후 수구세력인 사제들의 아크나톤의 종교개혁을 되돌리려는 움직임이 활발했던 반동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실제 재위 2년차에 아크나톤의 신양은 철폐되고 기존 신앙으로 복귀하는 움직임이 공식화되었으며, 사제세력을 대표하는 행정관 호렘헵이 파라오를 보좌하면서 이런 움직임을 이끌었다. 실제 투탕카멘의 사후 파라오의 자리는 호렘헵이 계승하게 된다. 호렘헵은 아크나톤과 투탕카멘에 대한 모든 기록을 삭제하여 실제로 이집트의 기록에는 그들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2012년 2월 28일부터 5월13까지 과천과학관 특별전시실에서 "신비의 파라오 투탕카멘'이라는 제목의 특별전시가 열렸다. 이집트 카이로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룩소르 서안 왕가의 계곡 투탕카멘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아주 세밀하게 복제한 것들을 전시하고 있어 실제로 유물들을 직접 살펴보는 것과 똑같은 감동을 얻을 수 있었다. 전시관 입구는 이집트 신왕조 신전 입구에 있는 탑문과 투탕카멘의 마스크로 이집트 신전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실제 투탕카멘 무덤에서 발견된 유물들을 소장.전시하고 있는 이집트 카이로에 소재한 고고학박물관.
전시장으로 들어가는 입구. 무덤으로 들어가는 복도처럼 꾸며 놓고 있다.
전시관 입구에는 투탕카멘 무덤의 발굴 경위를 보여주는 영상자료를 상영하고 있다.
전시실 입구에 전시되어 있는 두상만 남아 있는 석상들
왕들의 계곡(The Valley of the Kings)
이집트 남부 지역은 '백개의 문의 테베(Thebes of the Hundred Gate)'가 있는 곳으로, 테베는 종교적 정치적으로 아주 중요한 도시였다. 이 곳에서는 수많은 신전이 아문 신에게 봉헌되었으며, 스핑크스가 줄지어 서 있는 도로가 도시를 가로 지르고, 신왕국 시대의 파라오들이 웅장한 궁전을 지었다. 지금이 룩소르인 고대 도시 테베를 지나면, 나일강 서쪽 기슭에 거대한 공동묘지가 나타난다. 이 곳에는 시민과 고위 관리의 무덤뿐 아니라 고대 이집트의 신성한 파라오들의 무덤도 있다. 오늘날 왕들의 계곡(Valleys of the Kings)으로 세계에 알려져 있는 이곳은 외딴 곳에 떨어져 있는 메마른 사막 계곡으로 서쪽에 있는 테베 언덕 사이로 길게 뻗어면서 완벽하게 감춰져 있다. 언덕 위에는 피라미드 형태의 산이 우뚝 솟아 있는 것이 인상적인데, 과거에는 '침묵을 사랑하는 그녀'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공동묘지 내의 성스런 곳으로 추앙받았다. 왕들의 계곡에 맨 처음 무덤을 만들라고 지시한 사람은 제 18왕조가 시작될 무렵의 (1470 B.C) 하트셉수트 여왕으로 추측된다. 이후 이 곳은 400년 동안 파라오들의 묘역이 되었다. 왕가의 일원이 아닌 소수의 사람들, 즉 고위 관리나 왕가의 유모 등만이 왕릉 내의 작은 방에 묻히는 영광을 얻었다. 하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접근이 어려운, 이곳 왕들의 계곡에서 죽은 통치자의 장례식을 치르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장례식을 위한 별도의 장례사원이 테베 언덕을 배경을 한 비옥한 경작지의 가장자리 평원에 별도로 건축되었다. <출처: 신비의 파라오 투탕카멘 특별전>
실제 이집트 룩소르 서안 왕가의 계곡. 이집트 신왕국 시기 건축물 중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 하트셉수트여왕의 장제전 뒷편 골짜기에 신왕조 파라오들의 무덤이 조성되어 있다. 상당히 많은 무덤들이 발굴되었는데 아직도 무덤 내부에는 당시에 그려진 수많은 벽화들이 남아 있다. 투탕카멘의 무덤은 이곳에 있는 많은 무덤들 중에는 규모가 상당히 작은 편이지만, 미이라와 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를 비롯하여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영원을 위한 무덤
초기 무덤드은 산기슭 틈 속에 숨겨져 있었던 반면, 후대에 지어진 무덤들은 커다란 입구를 가지고 있다. 지하 통로와 무덤 내의 방들도 세월이 흐르면서 변화했는데, 초기 무덤은 종종 구부러진 축과 가파른 계단이 특징인 반면, 람세스 시댕 이후의 무덤들은 복도가 일직선인데다 바닥의 경사가 완만하게 되어 있다. 고위 관리의 무덤과 달리, 왕릉에서 발견되는 벽화들은 현세에서의 일상 생활이 아닌 사후의 신성한 세계와 관련된 글과 이미지를 보여준다. 무덤의 장식은 모두 파라오가 지하의 모든 위험을 극복하고 신의 세계로 들어가도록 돕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예를 들어 암두와트(Amduat)는 지하 세계의 나일 강을 따라 12시간의 밤동안 태양신이 어떻게 이동하는 지를 나타내는 장례 문헌이며, '관문의 서(Book of Gates)'에는 밤 시간대에 죽은 자가 통과해야 하는 존재하는 여러 문들의 위험이 설명되어 있다. <출처: 신비의 파라오 투탕카멘 특별전>
룩소르 서안 왕가의 계곡에 산재에 있는 무덤들이 배치. 지금도 일부 무덤만 순차적으로 공개되고 있으며, 한번에 전체 무덤들을 돌아볼 수 없다.
무덤을 찾아기는 필사적인 작업
3000여 년 전 파라오의 인부들은 투탕카멘 무덤의 입구를 나중에 다른 무덤을 만들면서 나온 잡석들로 메우고 그 위에작은 돌 오두막을 지었다. 왕의 마지막 안식처는 하워드 카터가 천신만고 끝에 무덤을 찾아낼 때까지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잊혀진 듯 했다. 1917년 봄, 카터는 람세스 6세 무덤의 입구 아래를 파내려 갔다. 당시 그는 자신이 투탕카멘의 무덤 부근에 이르렀다는 시살을 꿈에도 알지 못했다. 수천년 동안 쌓여 있는 돌더미 아래, 인부들의 오두막 잔해에 이르렀을 때는 그는 더 이상 나올 것이 없다고 판단해 발굴 작업을 중단했다. 더구나 그는 이 작업으로 인해 여행객들에게 인기가 있는 람세스 6세의 묘지로 가는 길마저 깎아버릴 뻔 했다. 다음 발굴은 다른 장소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발굴이 지지부진하자 카터는 1922년 11월 1일, 인부들의 오두막 터를 다시 발굴하기 시작했다. 오두막의 잔해를 치우고 그 밑에 깔린 잡석을 제거하자 놀랍게도 투탕카멘의 무덤으로 항햐는 첫 계단이 나타났다. <출처: 신비의 파라오 투탕카멘 특별전>
발굴당시 투탕카멘 무덤의 모습을 모형으로 재현해 놓고 있다. 투탕카멘의 무덤 위에는 무덤작업을 하던 인부들을 위한 오두막이 있던 집터가 있었다고 한다.
낯선 무덤 구조
투탕카멘의 무덤은 '왕들의 계곡'에 있는 람세스 6세의 무덤 입구 아래 쪽 석회암 바위를 깎아 만들었다. 하워드 카터에 따르면, 무덤은 협소하고 단순했으며, 특히 다른 왕릉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복잡한 통로나 가파른 계단과 함정, 지하실, 네 개로 구성된 보물의 방 등은 찾아볼 수 없다. 여러가지 정황으로 볼 때 아마도 이 무덤은 본래 투탕카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왕족이나 고위 관리의 무덤으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열여섯 계단을 내려가면 복도가 나오고 끝까지 가면 벽과 마주 치는데 그 뒤로 작은 방이 나온다. 이 방은 왕들의 계곡의 바닥에서 약 7.1m 쯤 되는 깊이에 자리잡고 있다. 입구에서 대각선 방향으로 별실로 들어가는 통로가 있는데, 원래는 벽으로 막혀 있었으나 도굴꾼들에 의해 파손된 상태였다. 이방은 옆에 붙어 있는 전실보다 약 1m쯤 아래에 있었으며 바위를 깎아 만들었다. 입구 오른쪽에는 격벽이 있어 현실을 막고 있었으며 현실은 전실보다 1m 좀 안되는 아래에 위치해 있었다. 보물실은 현실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었으며, 약 16cm 낮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전실에서 작업을 마친 하워드 카터는 마침내 1923년 2월, 투탕카멘의 미라가 놓여 있는 현실을 열었다. 전실에서의 작업을 마친 하워드 카터는 마침내 1923년 2월, 투탕카멘의 미라가 놓여 있는 현실을 열었다. 1926년 겨울에는 보물실 작업에 착수했고, 1년 후에는 별실에서 작업을 이어나갔다. 1932년 무덤에서 나온 마지막 유물들이 카이로 박물관으로 이송됐다. <출처: 신비의 파라오 투탕카멘 특별전>
왕가의 계곡에 있는 투탕카멘 무덤 모형. 계단을 따라서 내려가면 투탕카멘이 사후에 사용할 물건들을 보관하고 있는 전실과 별실이 있고, 그 안쪽에 미이라가 보관된 현실과 보물의 방이 있다.
투탕카멘 무덤의 구조
투탕카멘 무덤 구조를 그린 스케치
투탕카멘 무덤 발굴을 주도한 하워드 카터와 카나번 경(Howard Carter and Load Carnarvon)
파라오의 인부들
왕의 무덤은 전문적인 장인과 숙련공들에 의해 건축되고 장식되었다. 인부들과 그 가족들을 위한 정착촌이 테베에 있었던 관리들의 매장지 근처에 세워졌다. 그러나 이들은 작업기간동안에는 왕들의 계곡에 지은 임시 오두막에 머물렀다. 인부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 각각 왕릉의 오른쪽과 왼쪽을 맡아 일했는데, 부드러운 석회석을 끌로 조각해 방과 통로를 만들었으며, 벽을 매끄럽게 다듬고 회반죽을 바르고 칠을 했다. 고대의 문자와 그림들을 통해 우리는 왕의 무덤이 어떻게 설계되고 축조되었는지를 알 수 있으며, 장인들의 일상생활, 가족 간의 논쟁, 질병 등에 대한 정보도 확인할 수 있다. 람세스 3세 때는 테베 서부 지역에서 이들 인부들에게 식량이 공급되지 않자 세계 최초의 파업이 일어나기도 했다. <출처: 신비의 파라오 투탕카멘 특별전>
도굴꾼들!
장례식이 끝나고 몇 주만 지나면 도굴꾼들은 파라오의 무덤에 묻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한 보물들을 훔쳐낼 계획을 짜기 시작한다. 이들은 귀금속과 보석, 황금 관과 비싼 목재로 만든 가구뿐만 아니라 향, 연고, 섬유, 비싼 포도주 등에도 관심을 나타냈다. 공동묘지를 지키는 경찰들도 있었지만, 약탈을 막기 위해 하는 일은 거의 없었으며, 오히려 도굴된 물품을 나누어 갖는 대가로 도굴을 눈감아 주기도 했다. '도굴꾼 파피리(Tomb Robber Papyri)'는 람세스 시대 묘지 관리청의 기록인데, 도굴꾼들이 약탈 행위를 하기 전에 고대의 관리들을 얼마나 매수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조사관들은 공동묘지를 순시하고 무덤 상태를 검사해야 했으며, 도굴 용의자들은 불려와 심문을 받고 매를 맞으며 자백을 강요당하기도 했다. 람세스 시대의 마지막 파라오인 람세스 11세는 공동묘지의 보안 문제가 심각한 상태에 이르러 왕들의 계곡에 자신의 무덤을 건설하는 것을 포기하고 다른 장소, 아마도 이집트 북부의 한 지역을 석택할 정도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러한 고대의 약탈 행위에 대해 고마워해야 할 필요도 있다. 실제로 이러한 행위로 인해 신왕국의 많은 파라오의 미라들이 보존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파라오들은 더 이상 무덤 도굴을 막을 수 없게 되자, 무덤을 깨끗이 치우고 미라를 집단 은익 장소로 옮겼다. 이후 19세기가 되어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되기까지 이들의 미라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다. 미란의 이전으로 통해 고대의 사제들과 관리들 또한 혜택을 봤는데, 왕의 귀중한 유물을 보호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무덤의 부장품 중 일부를 챙길 수도 있었던 것이다. <출처: 신비의 파라오 투탕카멘 특별전>
투탕카멘 조각상
거의 실물 크기이 이 조각상은 원래 카르낙의 아문신전에 있었던 한쌍의 조각상 중 하나다. 이 한 쌓의 조각상은 1902년부터 1904년에 걸쳐 프랑스의 이집트 학자인 조르쥬 로그방에 의해 신전 제7탑문 앞 지하 은닉장소에서 발굴했다. 이곳에는 석상 751개, 청동상 17,00개, 그리고 수많은 봉헌물들이 가득차 있었다. 그곳에 남겨졌던 수많은 봉헌물로 미루어보아 아문신의 사제들이 이 조각상들을 동시대에 묻은 섯으로 추정했다. 아마르니 시대 말기의 양식으로 만들어진 이 조각상은 여러 곳이 깨져 있었는데, 훼손했던 부분은 현재 복원된 상태다. 투탕카멘은 아문신의 숭배를 다시 강화할 목적으로 이 조각상을 만들었는데, 신의 경건한 숭배자로서 기도하는 자신의 못브을 담았다. 조각상의 허리와 받침대 부분에 새겨져 있는 투탕카멘의 이름은 그의 후대왕인 호렘헵으로 바뀌어 있고, 그의 이름은 뒤쪽 기둥에만 남아 있다. 호렘헵은 눈에 띄는 곳마다 선왕들의 이름을 지웠으며, 선왕들의 통치 기간을 자신의 재위기간에 포함시켜 버렸다. 아케나텐, 투탕카멘, 그리고 그의 후계자에 대한 모든 기록을 역사에서 지워버리고자 했다. <출처: 신비의 파라오 투탕카멘 특별전>
투탕카멘 석상(복제품). 이집트 룩소르의 카르나크 신전에서 발굴된 한쌍의 석상 중 하나이다.
투탕카멘 석상이 발견된 룩소르의 카르나크 신전에 남아 있는 투탕카멘 얼굴을 하고 있는 석상
룩소르의 룩소르 신전 입구에 세워진 투탕카멘의 석상
룩소르 신전 앞에는 얼굴만 남아 있는 투탕카멘 석상이 있다.
상형문자의 해독
'상형문자'란 단어는 그리스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성스런 조각품'을 뜻한다. 이집트의 고대 서사시에 따르면 이 문자를 발명한 이는 지식의 신 '토트(Thoth)'라고 한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최초의 상형 문자는 기원전 4000년 전 무렵 선왕조시대에 재화의 교환과 함께 발달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5세기 이후 수백 년이 지나면서 상형문자는 점차 사용되지 않아 자취를 감췄다. 학자들은 1799년 조제타스톤이 발견되기 전부터 상형문자를 해독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영국과 독일 학자들도 부분적으로 성과를 거두었지만, 역시 완벽한 해독에 성공한 사람은 프랑스인 상폴리옹이었다. <출처: 신비의 파라오 투탕카멘 특별전>
프톨레미와 클리오파트라의 카루투시.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방법을 설명해 주고 있다.
캄플리옹이 발견한 왕의 이름들은 카루투시(고대 이집트의 국왕신의 이름을 둘러싼 선이 긴 타원형 윤곽)라고 불리는 긴 타원형 안에 적혀 있다. 로제타 스톤에 프톨레미(왼쪽)의 카루투시에서 시작해, 캄폴리옹은 필라의 섬에 있는 오벨리스크에 적혀 있는 클레오파트라의 이름에서 같은 문자를 찾아냈다. 클레오파트라의 이름은 'C'(혹은 K)로 시작해야 하고 프톨레미 즉 '프톨레미이어스'는 'P'로 시작해서 'S'로 끝나야 한다. 나중에 같은 문자들은 그래픽선을 이용하여 확인할 수 있었다. 수년 동안에 걸쳐 캄폴리옹은 여러 문서의 기호들을 하나씩 설 비교하여 마침내 상형문자를 해독하였다. <출처: 신비의 파라오 투탕카멘>
이집트 신전 등에서 볼 수 있는 카루투시.
이집트에서는 관광기념품으로 이름을 카루투시로 적어주는 곳이 많다.
로제타스톤
로제타스톤에서 세 가지 언어로 새겨 있는 내용은 기원전 100년 프톨레미이오스 시대의 사제들이 반포한 칙령이다. 이 돌은 1799년 나일 강 삼각주에서 나폴레옹 군대가 발견했으며, 고대 이집트의 문자를 해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822년 프랑스인 장 상폴리옹이 이 세가지 언어를 비교 분석한 끝에 마침내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석하는데 성공했다. 로제타스톤의 상단부는 이집트 상형문자로 적혀 있으며, 돌 가운데에 같은 내용이 후기 이집트의 민용문자로 새겨 있다. 마지막으로 오른쪽 하단에는 이 텍스트를 해석하는 출발점이 됐던 그리스어 버전이 있다. 상폴리옹은 이 새언어로 쓰인 텍스트가 같은 내용임을 확인하고, 그리스어를 바탕으로 상형문자를 해독해 내는 데 성공했다. 진품은 런던 대영박물관에 있다. <출처: 신비의 파라오 투탕카멘 특별전>
로제타스톤(복제품)
런던 대영박물관에 전시중인 로제타스톤
"신비의 파라오 투탕카멘" 특별전이 열렸던 과천과학관.
'지역박물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비의 파라오 투탕카멘 특별전, 수많은 보물이 보관되어 있던 무덤의 여러 방들(전실, 별실, 보물의 방) (0) | 2012.11.06 |
---|---|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 간송 전형필이 수집한 많은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미술관 (0) | 2012.11.05 |
여수 진남관 임란유물전시관, 전라좌수영과 진남관 관련 유물을 전시해 놓은 작은 전시관 (0) | 2012.11.01 |
파주 오두산통일전망대와 북한전시관 (0) | 2012.10.31 |
인천 화도진전시관, 구한말 개항 과정을 보여주는 전시관 (0) | 2012.10.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