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story Traveling

고려 조선 유적_왕릉

구리 동구릉(사적 193호), 24대 헌종의 경릉과 20대 경종 비 단의왕후의 혜릉

younghwan 2012. 11. 28. 14:44
반응형


 구리 동구릉(사적193호)은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 무덤을 중심으로 후대 왕들이 무덤이 계속 조성된 대표적인 왕릉이다. 동구릉에는 태조의 능인 건원릉을 중심으로 총 9곳의 왕릉이 조성되어 있다. 이곳은 태조가 죽은후 풍수지리설에 따라 하륜이 이곳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이후에도 5대 문종을 비롯하여 선조, 영조 등 여러 왕과 왕비들이 계속해서 이곳에 능을 조성하였다. 시기에 따라서 동오릉, 동칠릉 등으로 불리다가 철종대에 헌종의 능이 조성됨으로서 9곳의 왕릉이 있는 동구릉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에 왕릉의 터를 잡는 것은 넓은 지역을 능역으로 조성하고, 풍수리지리상 길지가 적합한지는 이론적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고, 후대에 경쟁 정파의 공격을 받기 쉬운 까닭에 상당히 까다롭고 어려운 일이었다. 동구릉에 많은 왕릉이 조성된 것은 이런 원래 풍수지리학상 길지였던 까닭도 있지만 별도로 능역을 조성할 필요도 없고, 선대 왕릉이 터를 잡고 있어서 반대 정파의 공격도 많지 않기때문이다. 동구릉에 왕릉이 조성된 왕은 대체로 왕권이 약했던 왕이었거나, 국가적으로 큰 행사를 치르는데 어려움이 있었던 시대적 상황이 있었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동구릉 가운데 작은 하천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18대 헌종과 명성왕후를 모신 숭릉과 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를 모신 혜릉, 24대 헌종과 효현왕후, 효정왕후를 모신 경릉이 자리잡고 있다. 18대 헌종은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세력과 허목을 중심으로 한 남인세력간 당쟁이 심했던 시기로 특히 장례절차 문제로 정권이 교체되기도 하였다. 이런 까닭에 헌종의 능은 논쟁을 피하기 위해서 태조의 능역인 이 곳 동구릉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24대 헌종은 구한말 세도정치가 절정에 이르렀던 시기였기때문에 왕권이 상대적으로 미약하여 왕릉조성 절차를 간소화하기 위해서 이곳에 능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동구릉 입구. 구리에서 서울로 진입하는 태릉.구리간 도로와 외곽순환도로가 만나는 지점에 동구릉이 위치하고 있다. 구리시에 위치한 동구릉에서 서울 태릉사이에는 육군사관학교를 비롯하여 옛 서울공대, 서울여대, 태릉선수촌 등 많은 공공시설들이 들어서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에는 넓은 지역이 하나의 능역으로 조성되어 있던 곳에 일제강점기 이후에 공공시설들이 들어섰던 것으로 보인다.


동구릉 입구의 홍살문. 홍살문은 왕릉의 들머리임을 알려주는 건축적 장치로 이곳을 지날때는 몸과 마음가짐을 엄숙히 하고 여기에 모셔진 분들에게 경건한 예를 갖추라는 뜻으로 세워진 것이다. 혹은 홍전문이라고도 한다. 동구릉에는 안쪽의 아홉 곳의 능마다 약간 작은 규모의 홍살문이 설치되어 산릉의 참배나 제례가 시작되는 곳을 다시 한번 알려주고 있다.


동구릉 들어가는 길. 다른 왕릉과 마찬가지로 동구릉도 소나무를 비롯하여 다양한 수목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어서 산책하기에 좋다.


동구릉 가운데를 흐르는 작은 개천


동구릉 입구에서 조금 들어오면 왕릉 제사를 준비하는 재실이 마련되어 있다. 재실 앞 개천 다리를 건너면 동구릉 남쪽편에 조성된 숭릉, 혜릉, 경릉으로 연결된다.


동구릉 남쪽편에 조성된 혜릉과 숭릉으로 들어가는 길.


재실에서 길을 따라 조금 들어가면 갈림길이 있는데, 남쪽으로는 숭릉과 혜릉이 있고, 북쪽으로 경릉을 비롯하여 다른 왕릉들과 연결된다.

현종.명성왕후 숭릉
제18대 현종(1641~1674)과 그의 비 명성왕후(1642~1683)가 안장되어 있는 숭릉은 동구릉에서 네 번째로 조성된 왕릉이다. 현종 숭릉의 특이한 점은 숭릉 정자각에는 양쪽에 벽이 없는 익랑이라는 공간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양식을 가진 왕릉은 숭릉을 비롯하여 인경왕후 익릉, 장렬왕후 휘릉, 경종 의릉까지 4기가 있다. 이 중 숭릉 정자각 지붕은 유일하게 화려한 팔작지붕이다. 또한 숭릉 석물은 1659년 효종 영릉에서 사용하였던 석물을 다시 사용하였다. 효종 영릉은 본래 동구릉에 있다가 1673년(현종14)에 경기도 여주군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 전에 사용하였던 석물을 모두 묻어 두었는데, 이듬해에 현종 숭릉을 조성하면서 효종 영릉의 석물을 꺼내어 다시 사용하게 된다. 이 내용은 숭릉이 만들어진 과정을 기록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숭릉산릉도감의궤>에 남아 있는데, 숙종과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가 석물을 새로 만들게 되면 백성의 노고가 가중될 것을 염려하여 다시 쓸것을 명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출처:문화재청>



숭릉과 혜릉이 있는 동구릉 남쪽편 언덕으로 들어가는 숲속길


동구릉에서 제일 남쪽편에 위치한 숭릉은 지금 일반에 공개하지 않고 있다. 숭릉은 18대 현종과 왕비의 쌍릉이다. 현종대에는 송시열의 서인과 허목을 중심으로 한 남인간의 복상논쟁이 치열했던 시기였기때문에 논쟁을 피하기 위해 태조의 능이 있는 이곳에 왕릉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단의왕후 혜릉
단의왕후(1686~1718)는 조선 20대 왕인 경종의 첫번째 비로서, 1686년(숙종 12)에 탄생하여 1696년 경종이 세자였을 당시에 세자빈이 되었다가 경종이 왕위에 오르기 2년 전인 1718년(숙종 44)에 돌아가셨다. 단의왕후는 비록 살아서 왕후로 책봉되지는 못하였지만 1720년 경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왕후로 추봉되었다. 그리고 1722년(경종2)에 세자빈묘로 소박하게 조성되었던 무덤을 능의 격에 맞추어 석물을 추가로 제작하였다. 경종은 기존의 단의빈 묘를 단의왕후 혜릉으로 높이면서 능에 난간석, 무석인, 석양, 석호, 석마 등 석물을 추가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혜릉의 표석은 훗날 영조대에 이르러 세우게 되었다. 영조는 1746년(영조 22) 인근에 있는 현종 숭릉 표석을 본보기로 삼아 혜릉 표석을 제작하였다. 표석 앞면의 글씨는 당시 명필인 판충주부사 유척가가 쓰고, 뒷면의 글씨는 여선군 이학이 썼다. <출처:문화재청>



조선 20대 경종의 원비인 단의왕후의 능인 혜릉이다. 단의왕후는 조선후기 당쟁이 극심했던 숙종대에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과 함께 세자시절을 보냈던 세자비로서 어려운 시절을 보내다 경종이 즉위하기 전에 죽었다. 세자비 시절에 인품이 좋게 평가받은 것으로 보이며, 사후에 왕비로 추증되었다.


혜릉은 20대 경종의 원비 단의왕후 심씨를 모신 단릉이다. 경종과 계비의 능은 서울 석관동 의릉에 모셔져 있다.


혜릉 정자각.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연결되는 박석을 깔아 놓은 신도


정자각 월대. 다른 왕릉의 정자각에 비해서 월대가 약간 낮아 보인다.


정자각에서 내려다 본 신도와 홍살문


정자각 오른편 비석이 있는 비각.


건물터만 남아 있는 수복방. 원래 제사를 준비하던 장소였지만, 현재는 재실에서 제사준비를 하기때문에 필요가 없어졌다고 볼 수 있다.


경릉으로 연결되는 숲속길


동구릉에서 제일 동쪽편에 위치한 경릉 입구.

헌종.효현왕후.효정왕후 경릉
경릉은 조선 24대 왕 헌종과 두분의 비가 모셔진 능으로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세개의 봉분이 이어진 삼연릉 형식의 능이다. 헌종(1827~1849)은 1834년 어린 나이에 왕이 되어 15년 동안 임금 자리에 있었다. 효현왕후는 1837년(헌종3) 왕비가 되었고 1843년에 돌아가셔서 현 경릉의 첫 주인이 되었으며, 6년 뒤 현종이 돌아가시자 쌍릉 형식으로 능을 조성하였다. 이후 헌종의 두번째 비인 효정왕후가 1903년에 돌아가시자 삼연릉 형식으로 조성하게 되었다. 경릉에는 표석이 하나 있는데, 이는 1908년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이 진종, 헌종, 철종을 황제로 올리면서 제작한 비이다. 따라서 경릉 비석에는 '대한'과 '황제'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이 글자는 기존의 정릉 표석을 깎아서 다시 새긴 것이다. 표석의 전면과 후면에 새긴 글은 규장각 대재학 김학진이 지었고, 글씨는 당시 명필인 윤용구가 썼다. <출처:문화재청>



경릉은 조선 24대 헌종과 2왕비를 함께 조성한 능으로 조선왕릉 중 유일한 삼연릉이다. 헌종은 구한말 세도정치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를 보냈던 왕으로 어린 시절에 왕위에 올라 권문세가에 시달렸던 대표적인 왕이다. 후사가 없어 강화도령이라 불렸던 철종이 왕위를 이었으며, 당시 왕권이 얼마나 약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별도의 능역을 조성하지 않기 위해서 이곳 동구릉에 왕릉을 조성한 것으로 보이며, 계비의 능 또한 그런 사유로 같이 이곳에 조성한 것 같다.


경릉은 왕과 2명 왕비의 봉분이 함께 있는 삼연능으로 외관상으로도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 당시 세도정치를 휘둘렀던 세력들이 비친 왕의 위상이라 할 수 있다.


왕릉 입구의 홍살문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연결되는 박석을 깔아 놓은 길. 다른 왕릉과 달리 길 양쪽에도 박석을 깔아 놓고 있다.


왕릉에서 제사를 모시는 정자각


정자각 오른편 비석이 있는 비각


주춧돌만 남아 있는 제사를 준비하던 수복방 건물터


조선 24대 헌종을 모신 경릉. 동구릉에서 마지막으로 조성된 왕릉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