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릉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무덤인 건원릉을 중심으로 9개의 왕릉의 조성된 조선 최대의 능역이다. 서울과 태조의 출신지라 할 수 있는 함흥간 교통로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동구릉에는 태조를 비롯하여, 5대 문종과 왕후, 14대 선조와 왕후, 16대 인조의 계비, 18대 현종과 왕후, 20대 경종의 비, 21대 영조와 왕후, 추존 문조와 왕후, 24대 헌종과 왕후의 무덤이 한 지역에 모여 있다. 동구릉이 태조의 무덤이 있는 풍수지리상 명당이기는 하지만, 이곳에 왕릉을 조성한 왕은 영조를 제외하고는 강력한 왕권을 가지지 못했던 왕들이었으며, 대체로 당쟁 등이 심했던 시기의 왕들로 왕릉 조성에 대한 책임과 논란을 회피하기 위해서 이곳 동구릉에 왕릉을 조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구릉 안쪽에는 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능인 원릉과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의 능인 휘릉이 있다. 영조는 18세기의 절반인 52년을 재위했으며, 강력한 왕권을 휘둘렀던 왕으로 평가받기는 하지만, 그 또한 당쟁에 휘말려 아들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왕이다. 영조는 자기의 무덤자리로 숙종의 능이 있는 서오릉에 터를 잡았던 것으로 보이며, 영조의 정부인 정성왕후의 능을 그곳에 조성해 놓았다. 하지만 영조을 뒤를 이은 왕은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로 사도세자의 죽음때문에 선왕에 대한 섭섭함때문인지, 영조의 능은 이곳 동구릉에 조성했다. 이는 당시 나름 실세였던 정순왕후의 의사도 반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휘릉의 주인인 인조의 계비 장령왕후 또한 국왕 장례절차를 둘러싼 당쟁이 심했던 숙종대까지 왕실의 어른으로 있었는데, 능역조성의 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이곳 동구릉에 능역을 조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영조.정순왕후 원릉
조선 제21대 왕인 영조(1694~1776)는 조선시대 역대 왕 가운데 가장 긴 52년간 임금의 자리에 있었다. 1724년 제20대 왕 경종이 대를 이을 자식이 없이 일찍 돌아가시자 숙빈 최씨의 아들인 영조(연잉군)가 왕위에 올랐다. 영조는 임금의 자리에 있는 동안에 여러 방면에서 치적을 남기는데 정치적으로는 탕평책을 실시하여 노론과 소론이 융합하도록 노력하였고,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려고 균역법을 실시하였다. 영조의 비는 정성왕후와 정순왕후 두 분이 있다. 정성왕후는 1704년(숙종30)에 당시 연잉군이었던 영조와 혼인하였으며, 1757년(영조33)에 돌아가셔서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에 있는 홍릉에 안장되었다. 본래 영조는 정성왕후 홍릉 옆을 비워두어 자신이 안장될 터로 여겼으나 두번째 비인 정순왕후와 현재 지역에 안장되었다. 정순왕후(1745~1805)는 15세에 당시 66세인 영조와 가례를 올렸으며, 1800년에 정조가 돌아가시고 어린 순조가 임금 자리에 오르자 왕을 대신하여 3년간 나랏일을 돌보았다. 영조와 정순왕후 원릉은 1758년(영조34)에 완성된 <국조상례보편>의 내용을 충실히 구현하였으며, 원릉 비각에는 영조의 손자인 정조가 직접 쓴 표석이 남아 있다.<출처:문화재청>
조선후기 21대 영조의 능인 원릉이다. 영조는 숙종의 교령을 근거로 능제도를 정비하여 <국조상례보편>, <국조속오례의> 등을 펴내고 이를 자신의 능에 적용하였다. 원래 영조는 숙종의 아들임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의 능을 숙종의 능이 있는 서오릉에 조성하고 싶어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와 정조의 뜻이 반영되어 이곳 동구릉에 왕릉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동구릉 안쪽 헌릉에서 원릉으로 연결되는 숲속길
동구릉 가운데를 흐르는 작은 개울
원릉으로 들어가는 길
조선 21대 영조의 능인 원릉. 영조가 정리한 조선후기 능역제도를 반영한 왕릉이다.
원릉 정자각
원릉 앞에 있는 비각. 비각에는 3개의 비석이 있다.
비각에는 3개의 비석이 있는데, 첫번째 것은 원래 묘호인 영종, 2번째것은 대한제국 선포이후 묘호인 영조가 적혀 있으며, 나머지는 정순왕후의 것이다.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참도.
정자가 앞쪽에 남아 있는 수복방 건물터. 동구릉에 있는 수복방 등의 건물들은 지금은 동구릉 입구의 재실에서 일괄적으로 그 기능을 수행하고 현재 건물들은 남아 있지 않다.
원릉 앞에서 휘릉으로 연결되는 길
휘릉 옆을 흐르는 작은 개천과 개천을 건너는 다리
장렬왕후 휘릉
제16대 왕 인조의 두번째 비인 장렬왕후(1624~1688)는 1638년(인조16) 15세의 어린 나이에 왕비가 되었다. 장렬왕후는 제17대 효종과 제18대 현종, 제19대 숙종 대까지 살았으며, 1688년(숙종14) 창경궁에서 돌아가셔서 휘릉에 안장되었다. 장렬왕후가 4대에 걸쳐 왕실의 웃어른이 되면서 장렬왕후가 상복을 입는 기간에 대하여 논쟁이 두차례 일어났다. 1659년 효종이 돌아가시자 효종의 어머니에 해당하는 장렬왕후가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일어났고, 1년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한 서인이 실권을 잡았다. 1674년 장렬왕후의 며느리에 해당하는 인선왕후가 돌아가시 또다시 장렬왕후가 상복을 입는 기간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는데 이떄에는 남인의 주장대로 1년동안 상복을 입게 되었다. 이 두 차례의 논쟁은 예송논쟁이라고 하며 예를 둘러싼 논쟁이 정치 문제로 확산된 역사적 사례이다.. <출처:문화재청>
휘릉은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의 능이다. 장령왕후는 효종,현종,숙종대에 대비의 위치에 있었으며, 당시는 대비가 상복을 입는 기간을 둘러싼 엄청난 논쟁이 있었던 시기로 능역 조성과 관련된 논란을 피하기 위하여 현종의 능과 함께 이곳 동구릉에 능을 조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휘릉 정자각은 다른 왕릉의 정자각과는 달리 바깥쪾으로 1칸씩 달아내어 앞면 5칸을 하고 있다.
휘릉 홍살문
휘릉 참도
정자각 내부
휘릉 계단
정자각의 잡상
휘릉 앞 건물터
비각
휘릉 봉분과 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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