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북동에 위치한 정릉은 태조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의 능이다. 원래 덕수궁 부근 정동에 있었던 정릉은 태종 이방원이 '왕자의 난'으로 등극하면서 미움을 받아 현재의 위치로 옮겨지면서 방치되었다가 조선후기 현종대 복권되면서 현재와 같은 왕릉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태조는 정릉을 조성하면서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1397년 170여칸에 이른 큰 사찰을 짓고 흥천사라 명하였다. 정릉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진 이후에도 흥천사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세웠기때문에 도성 안에 있는 큰 사찰로서 유지될 수 있었다. 조선중기로 넘어가는 연산군대에 큰 화재로 가람 대부분이 소실되면서 흥천사는 대찰로서 위상을 잃어버리고 급격히 쇠퇴한다. 연산군의 할머니인 인수대비가 불교를 크게 지원했던 인물인데 이에 대한 반발로 연산군이 원각사를 비롯하여 도성내 큰 사찰들을 없애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또한 성종대 이후 유학자들인 사림들이 주류세력으로 등장하면서 불교를 배척했던 당시의 사회분위기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선조대에는 다른 곳으로 절을 옮겨짓고 신흥사로 이름을 고치기도 했으며, 정릉이 복구된 이후 정조대에 정릉과 가까운 현재의 위치에 크게 중건하였다고 한다.
흥천사가 정조대에 크게 중건되기는 했지만, 현재 남아 있는 불전들은 대부분 구한말인 철종과 고종대에 지어진 것으로 구한말 사찰건축의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흥천사는 북악산 동쪽편 자락 언덕에 가람을 조성하고 있는데, 경내 마당을 넓지 않은 편이다. 가람배치는 기존 사찰에서 강당과 요사채 기능이 합쳐전 구한말에 크게 유행했던 '대방'이라는 건물이 앞쪽에 배치되어 있고 그 뒷편에 주불전인 극락보전, 좌.우에 지장전과 관음전이 배치되어 있다. 흥천사는 구한말 왕실의 비호를 받았던 사찰로 흥선대원군이 지원하여 '흥천사'라는 이름을 되찾을 수 있었다. 사찬래에는 대원군이 쓴 현판, 영친왕 쓴 글씨가 남아 있고, 한국전쟁 당시 마지막 왕비인 수정효황후가 이곳으로 피난했다고 한다.
흥천사 연혁
1396년에 조선 태조 고황제 5년에 태조후비 강씨 신덕왕후꼐서 승하함으로 능지를 한성부서부 황화방(지금 중구 정동)에 정하고 1월에 창봉함에 있어서 환후에 원찰을 건립하기 위하여 그해 12월에 능지 동편에 개기하여 1398년 7월에 170여칸에 대찰을 준공하여 흥천사라 명명하였다. 1492년 7월에 신덕황후를 추모하기 위하여 높이 2.8m의 대종을 본 사에 주조하다. 1504년 12월(연산군10)에 한성부 서부 황바방 소재 본사를 소실하였으며 1508년에 정능을 숭화방 사아리로 봉하고 본사는 구지에 두고 사아리 능방에 소암을 신축하고 신흥사라 하다. 1669년에 신흥사가 능실에서 너무 구근하므로 우문외 창립 정유지로 이건 하였으나 건물이 극히 초초하야 1794년 9월에 본사주지 산경화상과 민경화상이 사아리로부터 돈암동 현위치로 이건하다. 1910년 덕수궁 근처에 흉폐된 신덕왕후 무덤 근처에 흥천사 5층 사리탑을 이재하다. 1747년(영조23)에 흥천사의 대종을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으로 옮겼던 것을 후에 다시 덕수궁으로 옮겨 놓았다. 1846년 계장화상이 칠성각을 창건하다. 1865년 운현궁 흥선대원군의 주호에 의하여 대방과 찰사를 재건 대찰의 면모를 갖추고 본명을 복활하다. 1934년 독성각을 시시시 원명화상이 재건하다. 1942년 종각을 주지 운월화상시 화옹스님이 중건하다. 1969년 용화전을 주지 일우화상시 화주 운파화상이 중건하다. 1970년 연화대를 일우화상시에 신축하다. <출처: 흥천사>
서울의 주산이라 할 수 있는 북악산 동쪽 자락 언덕에 세워져 있는 흥천사. 원래 덕수궁 부근 정동에 있었던 것으로 여러 곳을 옮겨 다니다 정조대에 정릉 입구와 가까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흥천사 일주문
흥천사 입구 부도와 비석군
흥천사르를 들어서면 'H'자형으로 생긴 한옥건물이 보인다. 구한말 수도권지역 사찰에서 크게 유행했던 건물로 '대방'이라고 부른다. 사찰을 찾은 신도를 잠시 쉬거나 불법 강론이 열리던 강당 건물과 요사채 건물이 합쳐진 형태의 건물이다.
대방 건물에 '흥천사'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구한말 명필이었던 흥선 대원군이 '흥천사'라 적힌 현판을 썼다고 한다.
뒷편에서 본 대방. 중앙에 넓은 대청마루가 있는 강당이 있고, 양쪽 날개채를 종무소를 비롯한 요사채 건물로 사용하고 있다.
흥천사 극락보전, 서울 성북구 돈암동, 1853년(철종4) 건축
극락보전은 1853년(철종4)에 세워진 것으로, 극락세계를 주관하는 아미타불을 모신 흥천사의 주불전이다. 태조는 1397년(태조6)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을 조성하고 곁에 흥천사를 지어 원찰로 삼았다. 하지만 1409년(태종9)에 능을 다른 곳으로 옮긴 후 없어졌다. 1669년(현종10)에 정릉을 수리하고 근처 암자를 옮겨 신흥사라고 했으나, 1794년(정조18) 현재 터에 다시 지은 뒤에 흥선대원군의 후원을 받으면서 이름을 되찾았다. 극락보전은 다포로 공포를 짠 팔작지붕집이며, 규모는 정면3칸 측면 3칸이다. 판벽에는 불교 고사를 가득 그렸는데 반야용선도가 눈에 뛴다. 꽃문살과 기둥 위에 장식한 용머리 조각은 조선말기 건축에 나타나는 장식의 경향과 구조적 특성을 보여준다. 조선 후기 서울 근교 사찰에는 대방이란 건물을 짓는 경향이 등장한다. 이는 염불당과 주지실, 부엌과 누마루를 결합한 건물인데, 흥천사 대웅전 앞에도 대방이 있다. <출처:서울시청>
흥천사 주불전인 극락보전. 앞면 3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이다. 구한말인 철종대에 지은 건물로 당시의 건축양식이 남아 있다.
흥천사 극락보전 문살 장식
흥천사 명부전, 서울 성북구 돈암동, 1855년(철종6) 건축
1855년(철종6)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하는 지장보살을 모시기 위해 지은 건물로 1894년(고종31)에 고쳐 지었다. 지장신앙은 아미타신앙과 함께 조선시대에 널리 유행하여, 많은 사찰에 명부전이나 지장전이 세워졌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기둥 위에 다포와 익공을 절풍한 공포를 짜고 맞배지붕을 덮었다. 기둥머리에는 용 모양으로 조각한 부재를 끼워 장식을 더하였는데 이는 대웅전을 만든 건축방식과 비슷하다. 내부에는 지장보살상을 중심으로 시왕을 비롯한 여러 권속을 배치하고, 벽에 시왕도를 걸어 명부임을 나타냈다. 이에는 조선후기 사찰의 건축 특성이 드러나 있다. 흥천사는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를 위한 원찰로 도성 안의 정릉 옆에 지어졌다. 도중에 터를 한번 옮겼다가 1794년(정조18)에 지금 자리로 옮겨졌다. 철종대에 다시 지으면서 대웅전과 명부전을 세웠고, 고종대에 흥선대원군 등 왕실의 지원을 얻어서 절의 모습이 새로워졌다. 당대의 명필로 이름 높았던 흥선대원군이 만세루에 걸려 있는 흥천사 현판 글씨를 썼다. <출처:서울시청>
극락보전 오른편에 있는 명부전. 극락보전과 함께 철종대에 지은 건물이다.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지장전 뒷편에 있는 미륵불입상
극락보전 왼편에 위치한 관음전
관음전 왼편에 있는 연화대
요사채 건물
흥천사 입구에 있는 종각. 원래 흥천사에 걸려 있던 범종은 덕수궁 마당에 전시되어 있다.
원래 흥천사가 있었던 곳과 가까운 덕수궁 마당에 있는 흥천사종. 보물 1460호로 지정된 흥천사종은 태조가 신덕왕후를 위해 만든 것으로 '흥천사'라는 명문이 적혀 있다. 고려말 중국종의 특징이 반영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범종이다.
원래 있던 오층석탑을 대신하여 세운 것으로 보이는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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