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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산성_읍성)

[서울성곽] 장충동에서 남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성벽길

younghwan 2013. 5. 22.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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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왕산 성벽과 함께 조선태조때 처음 쌓은 한양도성 18 km 구간 중 그 보존상태가 양호한 남산 동쪽편 능선을 따라서 쌓은 성곽이다. 남산순환도로 건설로 일부 구간이 끊어져 있기는 하지만 서울 도심 녹지 공간으로 그 보존상태가 양호한 남산 동쪽편 경사진 지형에 위치하고 있었기때문에 성곽이 허물어지지 않고 원형을 잘 보존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는 숙종대에 한양 도성을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해 대대적인 증측을 하였던 성곽의 모습을 잘 볼 수 있다. 한양도성과 수원화성을 제외한 대부분의 산성이나 읍성은 성문주위나 평지를 제외하고는 조총의 공격에 대비한 여장을 설치않았던데 비해 한양도성은 평지에서 남산 정상부까지 성벽에 여장을 설치하고 있다. 남산 동쪽 성벽 탐방은 장충동 신라호텔 뒷편을 따라서 이어지던 성곽이 도로의 개설로 끊어진 국립극장 부근에서 출발하여 남산순환도로와는 달리 경사진 능선을 따라서 이어졌는데 길이 험한 편이라서 지금은 목재데크를 설치하여 쉽게 탐방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성벽을 남산 동쪽편 통신시설이 있는 봉우리 아래에서 끊어지는데 그곳에서는 성벽을 효율적을 방어하기 위한 치성을 살펴볼 수 있다. 끊어졌던 성벽은 남산순환도로에서 다시 시작하여 정상부에 위치한 남산타워까지 이어진다.

서울성곽, 사적 10호
이 성곽은 1396년(태조5)에 쌓아서 만든 것으로, 조선시대 수도인 한양을 에워싼 도성이다. 1422년(세종4)에 흙으로 쌓은 부분을 모두 돌로 바꾸고 여장을 쌓아 성벽을 더 높게 만드는 보수공사를 하였다. 1704년(숙종30)에는 취약한 부분을 튼튼하게 고쳤고, 영조때에는 동쪽 성곽에 적을 쉽게 방어하고 감시할 수 있는 치성을 쌓았다. 성곽은 둘레 약 18km에 높이는 약 12m 가량으로 한양을 둘러선 북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의 능선을 이었다. 불규칙한 지형때문에 약간씩 틀어졌지만 사방에 대분을 내고, 그 사이에 소문을 열었다. 4대문은 동쪽 흥인지문, 서쪽 돈의문, 남쪽 숭례문, 북쪽 숙청문(후에 숙정문으로 개칭)이고, 4소문은 동북 홍화문(혜화문으로 개칭), 동남 광희문, 서북 창의문, 서남 소덕문(소의문으로 개칭)인데, 흥인지문 앞에만 옹성을 두었다. 태조, 세종, 숙종 때 쌓은 성벽은 그긋을 만든 방법과 돌모양도 각각 달라 시대 변화에 따른 기술의 변화를 살필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근대 도시화가 이루어지면서 성벽과 성문은 훼손되고 겨우 일부만 남았으나 해방 이후 현재까지 제 모습을 찾으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출처:서울시청>


장충동 국립극장 부근에서 남산 정상부까지는 경사진 언덕으로 공략하기 쉽지 않은 구간이다. 산책로가 많은 남산일대에서도 산책길이 형성되어 있지 않고, 최근에 목재데크를 설치하여 서울성곽을 탐방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서울 성곽길 안내
남산 자락의 성곽을 확인할 수 있는 구간입니다. 남산 순환로가 만들어지면서 끊어졌지만, 좌우로 조선 태조 때 축성된 성곽의 모습을 잘 볼 수 있습니다. 곳곳의 끊어진 성곽은 그곳에 성곽이 있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바닥에 성곽이 있었던 자리를 표시해 놓았습니다. 남산은 해발 265m 되는 산으로 서울 중구와 용산구의 경계에 있습니다. 북쪽의 북악산, 동쪽의 낙산, 서쪽의 인왕산과 함께 서울의 중앙부를 둘러싸고 있는 내사산 중의 하나입니다. '신동국여지승람'에는 목멱산은 곧 도성의 남산인데, 인경산이라고도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남산은 도성의 남쪽에 있는 산이라는 일반되된 이름이고 고유명은 목멱산.인경산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밖에 우리말로 '마뫼'라 불리기도 하고 '중남산'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출처:서울시청>


장충동 신라호텔 뒷편 능선을 따라서 이어지던 서울성곽은 장충동 타워호텔 앞 고갯길에서 잠시 끊어졌다가 국립공원 부근에서 다시 시작된다. 이곳은 자동차로 남산정상을 오를 수 있는 남산순환로가 시작되는 길이기도 하다.


남산타워호텔 앞 도로에서 남산순환로까지 이어지는 성벽길. 낮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성벽이 높은 편이며 여장이 설치되어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에도 성벽시설을 제대로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석축의 형태가 한양도성을 처음 쌓았을 때나 세종대에 증축했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한양도성은 성벽 안쪽. 조선시대 전형적인 성벽 축성 방식인 안쪽은 자연지형을 이용하거 흙으로 쌓고, 바깥쪽에 돌을 쌓는 석축성의 형태를 하고 있다.


남산으로 오르는 자동차길인 남산순환도로. 길이 평이하여 산책로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남산성곽은 경사진 능선길을 따라 축성되었기때문에 길이 험한 편으로 성벽바깥쪽에 목재데크를 설치하여 편안하게 서울성곽을 탐방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서울성곽은 조선시대 조선의 수도 한양을 지키는 도성으로 오랜 세월동안 그 기능을 유지하였으며, 수시로 보수되어 왔던 성곽이다. 조선 태조때 성벽을 처음 쌓은 이후 세종대에 크게 증축하였으며, 조총이 등장한 임진왜란 이후 숙종대에 여장을 설치하는 등 다시한번 크게 보강하였다. 시대별로 다른 축성방법을 볼 수 있다. 


태조 5년(1396년)에 쌓은 성벽은 비교적 작은 돌을 사용하여 성을 쌓았으며 성벽의 구배를 넓게 잡았다. 세종 4년(1422년)에 쌓은 성벽은 아래에는 큰 돌을 반듯하게 다듬지 않고 둥글둥글한 모습으로 쌓았고, 위는 태조 때 사용되었던 작은 돌을 그대로 쌓았다. 서울 성곽 대부분은 세종대에 쌓은 것을 조금씩 보수하면서 사용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숙종30년(1704)에 쌓은 성곽은 정사각형으로 다듬어 벽돌 쌓듯이 반듯하고 가지런하게 쌓아 올렸다.


숙종대에 크게 보강한 성벽 시설인 여장. 조총공격을 막기 위해 돌로 난간을 쌓은 형태이다. 조총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적이 공격한 화살을 재활용하기 위해 여장을 설치하지 않고 성벽위에 목책을 주로 설치했는데, 조총의 등장 이후 변화된 형태라 할 수 있다.


성벽을 쌓은 구간 중 지형적으로 방어에 취약하거난 암문이 설치된 곳에 설치되는 치성을 볼 수 있다.


성벽을 쌓으면서 기록으로 남겨놓은 글씨들


서울 성곽 탐방로는 성벽 바깥쪽에 목재데크를 설치하여 성벽을 살펴볼 수 있게 하고 있다.


성곽길 중간쯤에서 내려다 보이는 남산타워호텔. 장충동 성곽 안쪽에 신라호텔을 비롯하여 자유센터 등이 들어서 있다.


서울성곽 오르는 길


능선을 따라서 이어지는 성벽. 대부분 세종대에 쌓은 성벽이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남산 동쪽 통신시설이 있는 봉우리 아래에 2곳의 치성이 설치되어 있다. 성곽탐방로는 이곳에서 끊어지고 목재데크로 설치한 탐방로를 따라 성곽 안쪽으로 들어간다.


치성부근에 설치된 연결통로


치성 내부. 성벽을 바깥쪽으로 약간 돌출시킨 형태로 주변 적을 공략하기에 용이하다.


치성에서 내려다 보이는 남산 동쪽 능선길을 따라 이어진 성벽


위쪽에 있는 치성


여장이 설치된 성벽 내부


남산 정상으로 연결되는 탐방로


치성 주변의 성벽


멀리 보이는 남산정상에 세워진 남산타워


남산순환도로와 연결되는 남산 산책길


성벽은 남산 봉우리들을 연결하는 능선을 따라 이어지고 있다. 이곳으로 남산순환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남산순화로 바깥쪽 성벽. 대부분 세종대 축성한 석축으로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산책하는 남산순환로.


남산순환로에서 볼 수 있는 서울성곽 성벽의 여장


남산 정상부 아래 버스승차장에서 남산으로 오르는 길에서 볼 수 있는 성벽


남산 정상부 부근 성벽


도로 개설로 끊어진 성벽


남산타워 입구의 성벽에 설치된 여장


남산타워 동쪽편에서 끊어진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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