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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산성_읍성)

이천 설봉산성 (사적423호), 한강 유역을 다투던 삼국시대 산성

younghwan 2013. 4. 5.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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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봉산성은 이천시 도심 서쪽에 위치한 해발 394m 설봉산 정상 동북쪽 능선, 칼바위 주변에 남아 있는 옛 산성터이다. 능선 주변에 석축을 쌓은 테뫼식 산성이라고도 하며, 계곡을 감싸고 있는 포곡식 산성이라고 한다. 삼국시대에 처음 쌓은 산성으로 성벽은 대부분 흙으로 쌓고 일부 돌로 쌓은 석축도 있는데, 원래의 모습을 찾기는 쉽지 않고 칼바위 부근에 복원한 성벽을 볼 수 있다. 산성 내부에는 주춧돌이 질서 있게 배치되어 있는 건물터와 봉수대가 있다. 이 성을 쌓은 축성연대는 백제시대 유물이 발굴되어 백제가 처음 쌓았다는 의견이 있으며, 백제.신라.고구려가 한강유역을 다투던 시기에 고구려군이 처음 쌓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설봉산은 경기도 내륙 남한강 이남 지역에서 비교적 농토가 넓고 질좋은 쌀 생산지로 유명한 이천지역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이천과 용인을 경계짓는 산줄기가 이어지고 있다. 이 지역은 지금도 청주.진천.음성을 지나 서울로 연결되는 중부고속도로와,  영남지방과 서울을 연결하는 3번국도가 충주.장호원.이천을 지나고 있는 교통의 요지이다. 이 지역은 특히 신라의 지방군사조직인 십정 중 하나인 남천정이 설치되었던 통일신라시대에 한강 이북지역을 견제하는 중요한 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군사적 중요성이 크게 줄어들어서 산성으로서 역할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설봉산은 해발394.4m로 높이는 그리 높지 않지만 이천시 서쪽에 자리잡고 있는 진산으로 여겨진다. 이천지역에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정상부근에는 삼국시대 한강유역을 다투던 시기에 쌓은 설봉산성이 있다.


설봉공원에서 출발하여 설봉산성으로 오르는 등산로


칼바위가 있는 능선 부근에서 최근에 복원한 옛 성벽이 보이기 시작한다.


설봉산 등산로

이천 설봉산성, 사적423호, 경기도 이천시 사음동
설봉산성은 관고리성지 또는 무안산성이라고도 불리며, 설봉산의 정상부에 쌓은 테뫼식의 돌로 쌓은 산성이다. 설봉산성은 관고동의 일명 기치미 고개에서 중일리에 이르는 산줄기의 연봉에 위치하고 있어 북쪽과 남쪽은 물론 주변지역을 넓게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산성의 전체 둘레는 1,079m이고 삼국시대의 성중에는 비교적 큰 규모에 속하는 산성으로 전면을 다듬은 화감암 성돌을 이용하여 바른층 쌓기를 하였으며, 쐐기돌은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성문은 어긋문 형태로 된 서문과 북문, 동문이 있으며,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돌출시킨 치성은 4개가 확인되고 있다. 장대는 성내의 가장 높고 지휘관측이 용이한 칼바위 부근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현재 노출된 건물의 규모는 정면5칸 측면2칸 정도이다. 우물은 동무지 뒤편 평탄한 곳에 1개소가 있으며, 물통로는 북쪽과 동쪽에 각각 1개씩 설치하였다. 단국대학교에 의한 발굴조사결과 칼바위 부근의 토광과 서문지 하부에서 백제 토기가 다수 출토되어 지금까지 발견된 최초의 백제 석성일 가능성에 대한 견해가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반면 동문지 상단 및 성내 전역에서는 단각고배류와 인화문토기 등이 출토되었으며, 함통6년(865) 명의 벼루가 출토되어 이 산성이 삼국시대에 축성되어 9세기 중엽까지도 사용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부성은 규모가 각각 532m와 362m인 석축성으로 성내에 건물지와 치성, 문지 등의 유구가 확인되었으며, 삼국~통일신라기의 기와, 토기, 철기류가 출토되었다. <출처: 이천시청>


원래 설봉산성은 흙으로 쌓은 토축성이 많은 편이며, 석축은 산성 전체에서 일부라고 한다. 경사진 능선 아래에 석축을 쌓아서 공략하기 쉽지 않아 보인다.


복원된 성벽의 석축은 중간크기의 잘 다듬은 화강석으로 쌓은 신라 산성의 축성법을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잘 다듬은 화강석으로 쌓은 석축


성문은 복원하지 않고 출입문 형태만 유지하고 있다.


건물터 등이 남아 있는 칼바위 부근으로 연결되는 성벽길


성문 주변 성벽


건물터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는 길. 토축성의 형태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건물터가 있는 설봉산성 능선. 이 부근이 능선 중에서 약간 평탄한 편이며, 이천시가지를 비롯하여 주위가 한눈에 들어온다.

남장대지
장대는 장수의 지휘소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장대는 전투시 군사 지휘가 편리하고 산성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장소를 골라서 세웠다. 남장대지는 설봉산성에서 가장 높고 산성전체가 내려다 보여서 전투시 군사의 지휘가 편리한 곳이다. 현재 이곳에는 초석 15기가 노출되어 있다. 초석의 형태는 일정하지 않으며 윗면과 옆면만 약간 다듬었다. 초석의 아래쪽에는 다듬지 않고 고인돌을 놓아서 수평을 맞추었으며, 초석의 배치 상태로 보아 남장대의 규모는 정면5칸, 측면 2칸으로 동서 14.3m, 남북 5.7m로 추정된다. 발굴조사시 기간, 담장, 온돌 등의 시설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건물은 누각 형태로 사방이 트여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축조연대는 통일신라 말기의 건물로 추정된다. <출처:이천시청>


건물터로 추정되는 주춧돌이 발견된 남장대지. 조선시대에는 설봉산성이 유지되지 않았고 주로 통일신라시대에 이 산성이 중요한 역할을 했기때문에 통일신라시대 건물터로 추정된다.


'함통육년'명 벼루, 865년, 이천 설봉산성


설봉산성 내 이정표가 되는 칼바위


봉화대, 산봉에 어떤 경축이나 신호로 놓는 불. 난리를 알리는 불로써 초저녁에 올리는데 평상시에는 한번, 적이 나타나면 2번, 국경에 접근 3번, 침범 4번, 접전 5번 낮에는 토끼똥을 태워 연기를 사용하였다.

사직단
사직은 원래 주신인 사신과 오곡의 어른이 되는 곡을 말하는 것으로 제사를 모시는 단을 만들어 사직단이라 하였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이후 천.지.인의 삼위일체 사상이 점점 발달되면서 사와 직을 하나로 합하여 토지와 곡물을 관리하는 신으로 받들어 이때부터 천자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친히 사직에 제사를 올리는 중요한 국가행사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때에 전국의 명산에 국가적으로 제를 받드는 관습이 있었으며 이러한 제사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에서 시행되었고 주로 국가 또는 지방에서 주관하였다. 이곳 팔각제단은 그간의 발굴출토된 각종 유물로 보아 4세기 백제를 비롯하여 삼국이 이용한 것으로 추정되며 특히 우리고장은 통일신라가 남천정을 설치한 군사적 요충지인 것으로 보아 이곳 설봉산성이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적임을 나타내는 제단시설이다. <출처:이천시청>


남장대 건물터 아래에 최근에 설치한 것으로 보이는 제단이 있다. 제단 너머로 이천지역의 넓은 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설봉산성 서쪽편 성벽


건물터 남쪽편 성벽


설봉산 정상 이어지는 능선


등산로 중간 작은 쉼터


능선 중간쯤에 위치한 연자봉이라는 작은 봉우리


설봉산 정상부로 들어가는 길


설봉산 정상


숲 사이로 보이는 설봉산 북쪽 곤지암 방향


설봉산 동쪽 이천시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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