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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박물관] 조선통신사, 일본 에도막부에 파견되었던 사절단

younghwan 2013. 7. 8.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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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신사란 조선시대 일본에 파견되었던 외교사절로 왜구가 창궐하던 고려말에 이에 대한 대책을 요구하기 위한 필요성으로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일본 막부와의 협상 창구에서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조선 태종대인 1403년 일본 아사카정권이 명나라와 외교관계가 성립되자, 이듬해  조선과 일본은 상호 외교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사절을 파견하면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전기까지는 통신사의 규모가 크지 않았으며 그 명칭은 보빙사.회례사 등 다양한 이름이 쓰여졌다. 조선전기에는 세종, 세조, 성종대에 통신사가 파견되었다가 그 이후 임진왜란 직전까지 중단되었는데, 이는 일본이 오랜 기간 내전이라 할 수 있는 전국시대였기때문에 집권세력이 불투명하여 외교에 신경쓸 여유가 없었기때문이라 할 수 있다. 조선전기에 일본을 다녀간 대표적인 인물로는 세종.세조대의 문신인 신숙주로 <해동제국기>라는 저서를 남겨 후대 대일관계를 끌어가는 지침이 될 수 있도록 했다.

 현재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일본에 파견된 대규모 사절단이라 할 수 있는 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 이후 1607년부터 1811년까는 250여년간의 기간 동안 12회에 걸쳐서 파견된 사절이라 할 수 있다. 조선통신사는 대체로 일본막부의 요청으로 파견되었는데 에도막부의 새로운 쇼군이 취임할 때 축하사절로서 쇼군의 권위가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것을 일본 내부에 널리 알리기 위함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에도막부는 당시 지방세력인 다이묘를 통제하기 위해서 다양한 수단을 강구하였는데, 그 중 하나는 다이묘들을 에도에 머무르게 하여, 그들이 에도에서 생활하는 동안 많은 비용을 소요하게 하여 경제적으로 어렵게 하는 것이었다. 조선통신사는 약 500여명의 인원으로 구성되는데 이를 접대하고 호위하기 위해서 일본내에서 많은 인원과 배들이 동원되었으며 조선통신사를 접대하는 비용 또한 막대하였다고 한다. 이런 경비들은 지방 다이묘들이 조달하여 집행하였는데 이를 통해 다이묘세력을 약화시키고자 했던 에도막부의 의도가 있었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통신사 일행이 지나가던 지역이었던 큐슈지방 부근 사람들이 막부에 반감이 많았고 이들이 막부를 뒤엎은 메이지유신의 주역이었기때문에 이후 일제감정기를 거쳐 오늘날까지 반한감정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이곳 지역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부상록, 1617년. 석문 이경직이 1617년(광해군9)에 회답겸쇄환사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오며 쓴 일기이다. '부상'이란 '해 돋는 곳'이란 뜻으로 일본을 카리키며, 1617년 7월부터 11월까지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경직은 중추부동지사 유간의 아들로 영의정을 지낸 이경석의 형이며 반곡 이덕성의 조부이다. 이항복과 김장생에게 글을 배웠으며, 1601년(선조34)에 진사시와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이후 1605년(선조38)에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에 들어간 뒤 1607년(선조40) 처음으로 파견된 회답겸쇄환사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이어 1617년에도 회답겸쇄환사의 정사인 오윤겸의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왔으며, 인조반정 후 의주부윤, 수원부사, 경기도관찰사, 도승지, 호조판서.도승지.강화유수를 역임하였다. 회답겸쇄환사는 임진왜란으로 중단된 국교의 재개를 요구해온 일본측에 대응해 조선에서 파견한 국가사절단으로, 일본이 보낸 국서에 응대하고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끌려간 포로들을 귀환하는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1607년.1617년.1624년 등 총 3차에 걸쳐 파견되었으며, 1636년(인조14) 제4차 사절단부터는 '회답겸쇄환사' 대신 '통신사'란 이름으로 바뀌어 불렸다. 이 일기는 일본에 끌려갔던 조선인 포로들의 어려운 처지와 이들을 데려오기 위해 노력했던 사절단의 모습, 그리고 사행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 등을 싣고 있어 임진왜란 직후 조선과 일본의 외교관계를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출처:부산박물관>

조선통신사는 정삼품 당상관이 정사, 상삼품 당하관인 부사를 비롯하여 종사관 등 관리들과 통역을 담당하는 왜학관을 비롯한 역관들, 의원, 일행을 호위하는 군관을 비롯하여 행렬을 이끌면서 공연을 하는 악사와 풍악수, 승마술을 하는 마상재, 배를 모선 선장과 선원 등 많은 인원이 포함되었다. 통신사 일행은 서울을 출발하여 용인, 충주, 문경, 안동, 경주, 울산 등을 거쳐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출항하였으며, 일본에서는 큐슈를 거쳐 오사카까지는 배를 이용해 이동하였으며, 오사카에서 쿄토를 거쳐 에도까지는 육로를 이용했다고 한다. 당시 조선통신사 일행의 호위와 접대는 통신사 이동 경로에 있던 지방영주인 다이묘들이 담당하였으며, 많은 경비와 인원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조선통신사 행렬
통신사는 조선시대 일본의 막부장군에게 파견하였던 조선 국왕의 공식적 외교사절로 총 400~500명 가량의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대규모 사신단이었다. 통신사는 최고책임자인 삼사(정사.선장.연주자), 중관(기수.시종.하급통신관.요리사.나팔수), 하관(격군)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 모형은 1711년 파견된 통신사를 그린 행렬도 중 청도기.형명기.국서.정사.나팔수 부분만 모형으로 제작한 것이다. <출처:부산박물관>


조선통신사 행렬 중 뒷편 나팔수와 정사를 태운 가마


통신사 정사를 태운 가마 앞으로는 국서를 실은 가마와 국서형명기와 청도기를 든 기수가 행렬을 이끌고 있다.


조선통신사 행렬도 중 행렬 앞부분.


행렬 가운데 부분. 국서를 실은 것으로 보이는 가마 등을 볼 수 있다.


행렬 뒷부분에 나팔수, 기수 등 의장행렬이 따르고 있다.


통신사입에도성도, 1636년, 조선왕조는 임진왜란 뒤 에도에 새롭게 막부를 수립한 일본과 단절되었던 국교를 다시 회복시키고, 통신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통신사는 500여 명에 이르는 인원으로 구성되었고, 여기에 1천여 명 이상의 호행왜인까지 참여했기 때문에 쓰시마에서 에도 사이를 왕래한 이들의 행렬은 일대 장관을 이루었다. 이 그림은 통신사 일행이 에도에 입성하는 광경은 번화한 시가지의 모습을 배경으로 곁들였다. <출처:부산박물관>

임진왜란 이후 12회에 걸친 조선통신사의 일본 방문은 양국간 많은 문화적 교류를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 에도막부가 대외적인 위상을 자국민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초빙했다고 할 수 있는 조선통신사는 그 규모가 상당히 컸으며, 일본내 방문기간 또한 6개월 이상 소요되었고 많은 지역을 방문하면서 환대를 받았기때문에 다양한 인적교류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은 전국시대를 끝내고 지배계층이라고 할 수 있는 사무라이계층이 관료화되어 가던 시기로 그들은 지적인 소양을 갖추고자 다방면으로 노력했기때문에 조선통신사의 방문을 통해 시와 학문을 교류하고 했다. 당시 조선은 유교사회로서 선비들은 유학에 정통하고 시문에 능했기때문엔 조선통신사 뿐 아니라 청나라를 방했던 사신들 또한 그곳 선비들과 많은 교류를 했고 청나라나 일본에서 조선 선비들의 글과 글씨를 많이 남겼다고 한다. 

통신사의 환대
통신사는 새로 즉위한 막부장군을 대외적으로 축하하는 사절이었다. 일본에서는 국가의 중대한 행사로 여겨져 막부장군에서 최하층민에 이르기까지 행렬을 맞이할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통신사가 지나가는 지역의 영주들은 많은 인부와 말, 접대비용을 무상으로 제공하였다. 길을 깨끗하게 정돈하고 모래를 깔아 놓고, 집 밖으로 빨래를 널지 못하게 하는 등 거리 청소는 물론이고, 통신사의 숙소.음식.연향.선물 등도 일본 최고의 격식으로 준비하였다. 대규모의 화려한 통신사 행렬은 일본인에게 대단한 볼거리였다.

"구경하는 사람이 길을 가득 메웠고 화려함으로 바라볼 때마다 눈이 부셨다. 정신이 현란하여 거리를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가 없다. 길은 편편하고 곧고 티끌이 없으며, 길 양쪽의 집에는 구슬로 된 발고 그림 장막이 처져 있었다. 1719년 오사카를 지나면서..." - 신유한의 '해유록' 중에서 -  <출처:부산박물관>


조선통신사병풍, 조선


다채백자조선통신사문접시, 19세기. 화조도 병풍 우측에 깃발과 나팔을 가진 두 사람의 통신사와 아침해가 떠오르는 후지산을 그린 다채 대형접시이다. 통신사와 후지산은 일본의 통신사 관련 유물의 문양으로 자주 등장하는 도안이다. 접시의 뒷면 가장자리에는 청화당초문이 둘러있고, 바닥 중앙에는 '부귀장춘'이라는 명문이 있다. 명치시대 아리타사산으로 추정된다. <출처:부산박물관>


남가몽도. 일장춘몽식의 대표적인 중국 고사 '남가몽'을 소재로 하고 있다. 나무 아래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자고 있는 모습의 남자와 그의 오른쪽에 깃발을 들고 가마를 나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희미하게 그려져 있어 그의 꿈에 나타난 통신사를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남가몽' 고사에 인용된 이국의 이상세계를 조선통신사일행의 모습으로 표한한 것으로 당시 일본인들의 통신사에 대한 이미지를 엿볼 수 있다. <출처:부산박물관>


신사헌립장, 18~19세기. 이 기록은 연형.보력.문화년간에 파견된 통신사 일행이 쓰시마 및 오는 도중에서 각지의 번으로부터 접대 받은 향응의 상황과 쓰시마번의 통신사에 대한 영접을 기록한 것이다.


조선통신사내빙기록, 일본 나고야성박물관 소장

통신사의 문화교류
일본인들과 우리나라 사절들의 문화교류는 고려말 일본에 간 정몽주의 시나 조선전기 사절들의 문집에서도 확인된다. 하지만 조선 전기까지는 소규모로 이루어졌고 일본인들도 당대 지식인인 승려층에 한정되었다. 그런데 임진왜란 후 일본에서도 시를 잘 짓는 것이 문인의 교양으로 중시되었다. 때문에 통신사와의 문학교류에 대한 열의가 대단히 높았다. 이에 1682년 통신사부터 문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을 제술관으로 뽑아 파견하여, 양국 문인들간의 교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통신사 악대의 연주는 일본에 조선음악이 소개되는 좋은 기회였다. 또 통신사가 사용한 의복.깃발.물품 등 조선문물이 소개되었다. 1764년 통신사 정사인 조엄은 당시 일본이 보유한 기술문명 등에 관심을 보이면서 배우려고 하였으며, 쓰시마에서 고구마를 들여왔다. <출처:부산박물관>


마상재도권, 17~18세기, 통신사일행 중에는 마상재라는 승마곡예를 하는 인물도 있었다. 통신사일행 중에 마상재가 포함된 것은 1636년 제1차 통신사행부터이다. 이 마상재도권에는 말 위에 거꾸로 서기, 옆으로 타기, 쌍마 등 8종류의 승마곡예를 하고 있다.


설봉 김의신이 쓴 글씨. 17세기 중반, 김의신은 호가 설봉이며 본관은 김해이다. 인조 15년(1637) 정축 별시 병과에 급제하였다. 글씨를 잘 써서 중부참봉에 제수되었고, 1643년(인조21)과 1635년(효종6) 두 번에 걸쳐 통신사의 사자관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관감록 부동사록, 17~18세, 나고야성박물관 소장, 장수로서 임진왜란 전후에 활약했던 박의장, 1596년 회답겸쇄환사의 부사로서 일본에 건너간 박홍장 형제의 내력을 17세기 후반 ~ 18세기 초에 박씨의 일족이 편집한 것이다. 동사록은 회답겸쇄환사의 부사로 일본에 건너간 박홍장의 수행원이 기록한 일기로서 부본으로 포함되어 있다. 히젠 나고야성의 천수각과 성 아래, 포구 등의 상황이 기술되어 있다. <출처:부산박물관>


교린수지, 17~18세기. 교린수지는 에도시대 중기부터 메이지시대 전반까지 사용된 조선어 교과서로, 이웃과 교류함에 있어 반드시 알아야 된다는 의미에서 붙여졌다. 모두 4책이며, 천문부터 시각까지 70개의 항목으로 나눠졌으며, 한자로 쓰여진 단어의 발음과 설명이 한들고 독해되어 있다. <출처:부산박물관>


조선통신사 행렬 그림, 조선 19세기


진동익이 쓴 글씨, 19세기, 진동익은 자가 직재, 호는 정동이며, 본관은 퐁기이다. 조선후기 역관으로 순조 9년(1809) 증광시 역과에 왜학으로 합격하여 1811년 통신사행 때 차상판사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조선 역관행렬 그림, 복제, 19세기, 일본 게이오대학 소장


변지한이 그린 <꽃과 새>, 19세기

국서의 전달
통신사가 에도(지금의 도쿄)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일본 관료와 함께 국서를 전달하는 의식과 날짜 등을 논의하였다. 국서를 전달하는 날, 행렬 제일 앞에는 화려한 깃발을 든 기수들이 행진하였으며, 악대가 뒤를 따랐다. 근엄한 무관들이 나아가고 그 뒤를 국서 가마가 따랐다. 국서는 은장식과 붉은 옻칠을 하고 금색으로 용을 그린 화려한 국서함 안에 소중히 보관되었다. 국서 가마 뒤로 정장을 한 통신사 행렬이 따랐다. 에도성 9겹의 문을 지나 삼사와 최고위 역관만이 정전 안으로 들어갔다. 막부장군에게 조선국왕이 보내는 국서와 예단을 전달하였다. 막부장군에게 주는 예단은 말과 말안장, 호랑이 가죽 등 동물 가죽, 종이, 인삼, 각종 비단, 모시, 삼베, 꿀, 매 등이었다. 국서와 예단를 전달하는 절차가 마치면 연회가 있었다. 의식과 연회가 끝나면 일본 관료들의 전송을 받고 숙소로 돌아왔다. <출처:부산박물관>


사로승구도, 17~18세기, 부산에서 에도까지의 외해.내해의 기항지, 육로의 각 지역의 풍경과 오사카, 교토 등지의 경관을 아주 정성껏 묘사한 기록화이다. 현재는 30도가 2권의 두루마리로 기록되어 있다.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불분명하지만, 통신사에 수행했던 화원 이성란이 그렸다는 의견이 있다. <출처:부산박물관>


국서루선도, 17~18세기. 국서를 받들고 요도가와를 운항하는 도쿠가와막부의 누선을 그린 그림으로 국서선에 이어 정사가 타는 부사선, 다시 사신들을 태운 누선들이 차례로 뒤따랐다. 통신사 일행은 난바다리에 상륙, 오사카의 사관에서 해상여정의 피로를 푼 뒤 교토 남쪽의 요도를 거쳐, 육로로 에도에 이르렀다. <출처:부산박물관>

통신사를 수행한 부산사람들
500명에 이르는 통신사와 100명에 가까운 문위행에는 많은 부산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1763.1764년 통신사에는 사공과 격군 등을 제외하고 이름을 알 수 있는 사람 가운에 29명이 부산사람이었다. 이들은 동래, 부산진, 좌수영, 초량 네 곳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이 가운데 변박은 동래부 소속의 군인이자 화가였는데, 기선장으로 일본에 갔다. 변박은 부산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있는 '사처석교비'를 쓴 사람이다. 그가 옮겨  그린 '동래부순절도'와 '부산진순절도'는 보물로 지정되어 육군박물관에 있고 '초량왜관도'는 당시 왜관의 구체적인 모습을 그린 작품으로 유명하다. 변박과 함께 일본에 갔다가 죽음을 맞은 사람도 있었다. 소동(하급실무직)으로 간 김한중은 배가 거친 풍랑을 만나 바다에 빠졌다. 그는 치료를 하였으나 끝내 22세로 사망하였다. 지금 오사카 죽림사에 그이 묘비가 서 있다. <출처:부산박물관>


향보신사기록, 18세기, 일본에서 향보 시기는 1716~1735년에 해당하며, 향보신사는 1718.1719년 도쿠카와시무네의 막부장군 직위 계승을 축하하기 위해 일본에 간 통신사를 가리킨다. 이때 통신사는 정사 홍치중, 부사 황선, 종사관 이명언 등 500명으로 구성되었다. 통신사의 여정, 의식, 생활 전반에 대해 쓴 일본측의 기록이다. <출처:부산박물관>


청화백자용두선문사각접시, 19세기, 내면의 용두선 모양이 돋보이는 장방형의 접시이다. 배 안에 타고 있는 살마의 복식이나 깃발 등이 다소 이국적이기는 하나 문양의 중심소재인 용두선이 조선인도해선지에 등장하는 통신사 배와 같은 모양이므로 이것은 통신사 일행의 배를 표현하고자한 기본적 의도를 가지고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본 아리타산으로 추정된다. <출처:부산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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