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처가람(七處伽藍)은 삼국시대 경주에 신라 불국토설의 일환으로 신성시 여기던 7곳의 숲에 세워진 사찰들을 말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에 불교를 전한 아도(我道)는 경주에 전불시대(석가모니를 포함한 과거칠불) 7곳의 절터가 있으니 불교를 전파하라는 당부를 받는다. 그곳에 세워진 칠처가람으로는 경주 동쪽 분황사(芬皇寺)와 황룡사(皇龍寺), 남쪽 낭산 사천왕사(四天王寺), 서쪽 오릉 주변 영흥사(永興寺), 영묘사(靈廟寺), 담엄사(曇嚴寺), 흥륜사(興輪寺)가 있다. 칠처가람 중 천경림 흥륜사, 삼천기 영흥사, 사천 끝 영묘사의 위치에 대해서는 출토유물이나 문헌, 지리적 위치 등을 고려하여 다양한 의견이 있으며, 경주공고 주변과 흥륜사지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칠처가람은 법흥왕의 불교공인 후 귀족층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당시 그들이 신성시 여기던 숲에 세웠던 혁명적인 조치라 할 수 있다. 특히 신라 시조인 박혁거세의 능이 있는 오릉 주변에 많았다는 것은 불교 공인을 반대한 세력을 박씨들이 대표한다고도 볼 수 있다. 칠처가람설은 7, 8세기에 신봉되었으며 오대산신왕 등과 함께 신라가 불국토였다는 신념을 불어넣어 불교에 귀의하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통일신라 때 세워진 불국사(佛國寺)는 신라 불국토사상의 절정판이라 할 수 있다.
칠처가람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것은 법흥왕 (재위 514~540) 14년(527)의 일입니다. 법흥왕의 불교 공인은 귀족들의 반발을 이차돈의 순교로 잠재웠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왜 귀족들은 반발하였던 것일까요? 이차돈이 천경림에 절을 지은 것에서 귀족들이 반발한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천경림은 불교 유입 이전에 신라 사람들이 신성시하던 곳으로 하늘에 제사지냈던 곳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이곳에 절을 짓는다는 것은 각 부족마다 다른 신앙으로 자기의 기득권을 가지고 있다가 그것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흥륜사를 비롯한 7곳의 전불시대 절터가 있는데, 영흥사, 황룡사, 분황사, 사천왕사, 영묘사, 담엄사 등 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불국토는 저 멀리 있는 곳이 아니라 바로 신라 땅이라는 신라 사람들의 자신감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 절들이 들어선 곳은 신라에서 전통적으로 신성시되던 곳이라는 점과 불교 공인 후 얼마 되지 않아 절들을 그 곳에 세운 점으로 보아 얼마나 빨리 신라가 불교국가가 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1년)
금교(金橋) 동쪽 천경림(天鏡林) 흥륜사
신라 시조 박혁거세 무덤이 있는 경주 오릉 북쪽편에 위치한 흥륜사는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후 처음으로 창건(664년) 되었다. 이곳은 미추왕대에 고구려 승려 아도가 천경림에 처음을 절을 지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흥륜사는 이차돈 순교 이후에 절을 짓기 시작하여 진흥왕대에 완공하였다고 한다. 진흥왕은 말년이 스스로 이 절의 주지가 되었다고 할 정도로 왕실과 관련이 깊었던 절이다. 선덕여왕때 승상 김양도가 조성한 미륵삼존불상이 모셔진 오당과 아도, 이차돈 등 신라십성을 그린 벽화가 있는 금당이 있었다고 한다. 황룡사, 사천왕사와 함께 경주를 대표하는 큰 절이었으며, 조선시대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다가 화재로 소실된뒤 폐사되었다.
절터 주변에서 '신라의 미소'로 잘 알려진 얼굴무늬수막새가 출토되었으며, '흥'자가 적힌 기와와 '영묘사'라고 적힌 기와가 출토되어 이 곳에 있었던 사찰의 존재가 '영묘사'인지 '흥륜사'인지 확인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흥륜사 절터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석조는 신라에서 만들어진 현존하는 것으로 가장 큰 규모라고 한다. 석조에 조선 인조대에 경주부윤이 이 석조를 흥륜사에서 경주읍성으로 옮겼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현재 절터에 있는 흥륜사는 1980년대에 새로 지어진 사찰이다.
삼천기(三川岐) 영흥사
영흥사는 최초의 비구니 사찰로 알려져 있으며 삼국유사 기록에 법흥왕비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영흥사에 살다가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영흥사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곳은 경주 남천, 서천(형산강), 충효천이 만나는 지점 부근에 위치하고 있어 삼천기(三川岐)에 해당하는 곳으로 추정되는데 흥륜사가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현재는 경주공업고등학교가 자리하고 있어 옛 절터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출토된 석조유물들이 학교내 정원과 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경주공업고등학교 일대에서 큰 절터가 확인되었으며 출토유물들은 경주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석조유물에는 건물 터에 초석들이 많이 남아 있고, 석탑의 지붕돌을 비롯하여 기단을 이루고 있던 석재 등 다양항 형태의 유물들이 있다. 상당히 큰 규모의 사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용궁 남쪽 황룡사
황룡사는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인 이후 신라인이 신성시여겼던 7곳의 숲에 세워진 칠처가람 중의 하나로 동궁(임해전) 동쪽편에 위치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진흥왕 때 월성 동쪽에 궁궐을 지을려고 하다고 사찰로 고쳐지면서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진평왕대에 금당을 비롯한 주요 건축물들과 금당에 모셔진 삼륙존상이 조성되었으며, 선덕여왕대에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의 건의로 9층목탑을 세워졌다. 삼국시대 불교는 국가를 통해 전래되었으며 국가 중심적인 종교가 되었으며 왕실을 보호하고 발전을을 비는 호국신앙이 강했다.
황룡사는 25,000여평의 넓은 부지위에 세워진 사찰로 중문, 목탑, 3금당, 강당이 나란히 배치된 1탑 3금당의 가람배치를 하고 있으며, 사찰경내는 회랑으로 둘러져 있다. 중문터는 앞면 5칸 건물이 들어설 수 있는 초석이 놓여 있고, 초석 크기로 2층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제일의 보물이었던 황룡사 구층목탑은 선덕여왕 12년(643) 당나레서 유학한 자장의 권유로 지었다고 한다. 목탑을 세운 내력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데 출토된 목탑의 조성경위를 기록한 찰주본기에 적힌 내용과 큰 차이가 없다고 한다. 백제 장인 아비지가 주도로 건축한 이 목탑은 높이가 80m나 되는 거대한 건축물로 현재 기준으로 30층 정도의 높이라 한다. 찰주본기에 따르면 경문왕 13년(873)에 크게 중건된 것으로 비롯하여 몽고군에 의해 완전히 불타버릴때까지 여섯차례에 걸쳐서 중수되었다고 한다. 목탑건물터에서는 찰주본기가 적혀 있는 사리함을 비롯하여 큰 건물을 세울 때 땅의 기운을 누리기 위해 묻은 지진구도 함께 발견되었다.
황룡사 목탑 찰주본기는 심초석 사리구멍 안에 있던 사라갖춤 중 내함에 해당하는 것으로 1964년에 도굴된 것을 되찾았다고 한다. 탑을 조성한 경위와 871년에 중수한 내용을 새겨놓고 있다. 구층목탑을 세운 경위는 삼국유사와 큰 차이가 없으며, 삼국유사의 신빙을 더해 주는 유물이다.
현재 남아 있는 황룡사 절터는 1탑, 3금당의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황룡사 금당에는 신라 삼보로 일컬어지는 장륙존상이 모셔져 있었는데, 지금도 금당터에는 불상이 있었던 석조대좌가 남아 있다.
황룡사 절터에는 무려 3만여점에 이르는 기와가 출토되었는데 만든 시기도 삼국시대 진흥왕대부터 고려 고종대까지 다양하다. 이는 황룡사가 여러차례 중수를 거치면서 몽골에 의해 불타버릴때까지 존속했음을 보여준다.
용궁 북쪽 분황사
분황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634년)에 창건된 사찰로 신라 칠처가람 중 한곳이다. 분황사에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분황사 모전석탑(국보 30호)를 비롯하여 솔거가 그렸던 관음보살상 벽화, 웅장한 약사여래상이 모셔졌던 사찰이다. 원효대사가 머물면서 불법을 가르쳤다고 하여 법성종 근본도량으로 여겨졌다. 분황사는 중문, 석탑, 3금당, 강당. 회랑을 갖춘 큰 사찰이었는데 몽고의 침입과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전각 대부분은 소실되었다. 현재 분황사 경내에는 모전석탑을 비롯하여 원효대사비를 세웠던 화쟁국사비부, 당간지주, 석정 등이 남아 있다.
분황사는 삼국시대 신라인들이 신성시 여겼던 숲에 세웠던 칠처가람 중 한곳이다. 신라를 건국했던 6촌장 중 고야촌(明活山) 설(薛)씨와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원효대사의 속성(俗姓)은 설(薛)이며 한국 유학(儒學)의 시조로 여겨지는 설총(薛聰)이 그의 아들이다.
분황사 절터에 남아 있는 모전석탑(국보 30호)은 신라 선덕여왕 때 세워졌다. 자연석을 쌓은 기단 위에 1층 탑신을 크게 쌓고 그 위에 낮게 탑신을 쌓아 올렸다. 1층 몸돌에는 4면에 감실을 만들고 입구에 인왕상을 새겨 놓고 있다. 이 인왕상은 이 석탑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인데 조각상이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넘친다. 기단부 모서리에는 부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사자상이 세워져 있다.
분황사 절터에 남아 있는 모전석탑(국보 30호)은 신라 선덕여왕 때 세워졌다. 자연석을 쌓은 기단 위에 1층 탑신을 크게 쌓고 그 위에 낮게 탑신을 쌓아 올렸다. 1층 몸돌에는 4면에 감실을 만들고 입구에 인왕상을 새겨 놓고 있다. 이 인왕상은 이 석탑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인데 조각상이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넘친다. 기단부 모서리에는 부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사자상이 세워져 있다.
분황사지석탑 옆에는 원효대사를 위한 비석인 화쟁국사비 받침돌이 남아 있다. 고려 명종 때 원효대사를 위한 비석이나 시호가 없음을 애석하게 여긴 왕이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우도록 하였다. 추사 김정희가 절근처에서 발견하여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통일신라 때 분황사 금당에는 거대한 약사여래상을 모셨다고 하는데 현재 보광전에는 조선후기에 조성한 금동약사여래 입상이 모셔져 있다.
사천(沙川)의 끝 영묘사
영묘사는 선덕왕때 창건되었다고 하며, 개구리가 3,4일 운다는 소리를 듣고 백제 복병이 여근곡에 숨어있었음 감지했다는 일화로 유명한 사찰이다. 영묘사는 사천왕사와 함께 통일신라시대 유명한 예술가이 양지스님이 작품이 많았던 사찰로 금당에 모셔졌던 장륙삼존불, 천왕상과 목탑, 기와 등을 만들었다고 한다. 영묘사에서 출토되었다고 하는 기와 등에서 화려한 조각수법을 찾아 볼 수 있다. 이 절터에서는 신라를 대표하는 '신라의 미소'로 잘 알려진 얼굴무늬수막새, 생동감 넘치는 조각수법이 돋보이는 도깨비 얼굴 모양의 기와 등이 출토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성덕대왕신종이 이 곳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도깨비기와는 '신라의 미소'라 불리는 영묘사터에서 발견된 수막새와 함께 신라를 대표하는 도깨비문양이 새겨진 기와이다. 신라 최고 조각가이 양지스님의 흔적이 남아 있는 사실적이고 힘찬 표현이 돋보이는 유물이다.
이 종은 경덕왕이 부친 성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들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아들인 혜공대(771년)에 완성되었으며 성덕대왕 신종이라 불렀다. 이 종은 원래 성덕왕의 원찰이었던 봉덕사에 매달았는데, 절이 폐사되고 영묘사로 옮겼다가 조선시대에는 경주읍성 남문 밖에서 성문을 여닫는 시간을 알려주는 종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유림(神遊林) 사천왕사
사천왕사(사적 8호)는 경주에서 신성한 숲으로 여겨졌던 신유림(神遊林)에 세운 칠처가람 중 하나이다.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 처음 지은 사찰로 당나라의 침략을 막기 위해 명랑법사의 권유로 창건되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선덕여왕이 죽으면 도리천에 묻어줄 것을 유언했다고 하며, 사천왕은 불교에서 수미산입구를 지키던 천왕들로 선덕여왕릉이 있는 낭산이 수미산임을 상징하는 의미를 갖고 있고, 그 예언이 실현시켜준 사찰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천왕사는 건물은 없어지고 남북 105m, 동서 73m의 절터만이 남아 있다. 통일신라 사찰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쌍탑식 가람배치를 한 첫번째 사찰이다. 건물은 금당을 중심으로 남쪽에는 중문지, 북쪽에는 강당지가 있고, 금당 앞에 목탑터 2곳이 남아 남아 있다. 절터 입구에는 머리가 없어진 귀부 2기와 당간지주가 남아 있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을 위해 지었던 사찰로 볼 수 있으며, 이 사찰에 있던 문무왕 비(碑) 상단부가 최근에 경주의 주택 마당에 발견되어 화제가 되었다.
사천왕사는 금당을 중심으로 그 앞에 2개의 목탑이 조성된 쌍탑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감은사, 불국사 등 통일신라시대에 많이 조성되었던 쌍탑식 가람배치를 처음 시도했다고 한다. 뒷편에는 제단이 있던 건물터가 있는데 주술적인 밀교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목탑은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로 가구식기단을 사용했다. 목탑터에는 건물 구조에 맍게 주춧돌이 놓여 있으며 가운데에 사리를 보관하는 심초석이 있다. 절터에서는 목탑 기단부를 장식하고 있던 녹유사천왕상이 출토되었는데 출토 유물중 가장 인상적인 유물이다. 동시대에 활약한 조각가 양지스님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절터 입구에는 거북모양을 하고 있는 2기의 비석받침돌이 남아 있는데 태종무열왕릉에 남아 있는 거북받침돌과 비슷한 형태이다. 사천왕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문무왕 비(碑)는 조선후기 조선 정조 20년(1796)에 경주부윤 홍양호가 발견하였으며 최근 주택가에서 문무왕비 상단부로 추종되는 유물이 출토되었다.
서청전(婿請田) 담엄사
담엄사(曇嚴寺)는 칠처가람 중 가장 늦은 7세기 신문황 때 창건되었다고 추정되고 있다. <삼국유사> 등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를 건국한 박혁거세 무덤이 있는 경주 오릉(五陵) 남쪽으로 추정된다. 담엄사는 고려시대까지 중요한 사찰이었으나 조선전기에 폐사되었다. 담엄사가 있던 자리는 일제강점기에 도로를 개설하면서 없어지고 절터에 있던 팔부중상이 새겨진 석탑 부재를 비롯하여 석조유물들은 경주박물관 등에 보관되어 있다. 조선초 이곳에 박혁거세를 모시는 숭덕전을 세우면서 석재로 많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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