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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단은 종묘와 더불어 조선의 정신세계를 아우러는 중대한 두개 축 중에 하나이다.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아주 중요한 유적지이지만 종묘와는 달리 이해 당사자가 존재하지 않은 관계로 일제에 의해서 공원으로 격하된 장소이다. 사직단 정문은 규모의 크기나 형태의 화려함이 없어서 소흘히 지나치기 쉽지만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로 유교의 격식에 맞게 단정하고 소박한 느낌을 주게 만든 정문이다.
광화문에서 서쪽으로 가는 도로변에 있는 사직단의 정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평범한 문으로 보이지만 임진왜란 후 지은 사직단의 정문으로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입니다. 사직단은 종묘와 함께 조선의 정신체계를 이루는 두개 축 중에 하나로 아주 신성시 되던 장소입니다.
지금도 사직단 정문은 특별한 감흥없이 지나치기 쉬운 문화재로 화려함을 배제하고 유교의 격식에 맞추어서 만들어진 문으로 문화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생각된다.
사직단 정문에는 장식의 거의 없고, 종묘와 마찬가지로 신이 다니는 문이 가운데 문에는 작은 틈을 만들어 놓고 있다.
사직단 내부에서 본 사직단 정문.
사직단 정문으로 들어서면 담장으로 둘러싸인 사직단을 볼 수 있다. 사직단은 사방으로 출입문이 있는데 동쪽에 있는 문이 주출입문으로 생각된다.
사직단이란 나라와 국민 생활의 편안을 빌고 풍년을 기원하며 제사 지내는 곳으로 사(社)는 땅의 신을, 직(稷)은 곡식의 신을 말한다. 또한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나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든 때에 의식을 행하기도 하였다. 이 문은 사직단의 정문으로 태조 3년(1394) 사직단을 지을 때 함께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버렸다. 그 뒤 숙종 46년(1720) 큰 바람에 기운 것을 다시 세웠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으로 미루어 임진왜란 후에 새로 지은 것으로 짐작한다. 지금 있는 자리는 1962년 서울시 도시 계획에 따라 14m 뒤쪽으로 옮긴 것이다. 건물의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장식구조는 새부리 모양의 부재를 이용해 기둥 위에서 보를 받치고 있다. 전체적으로 소박한 기법과 튼튼한 짜임새를 갖추고 있어, 사직단 정문의 법식과 넉넉한 느낌을 주는 건축 문화재이다. <출처:문화재청>
사직단 정문 우측편에 있는 작은 건물. 원래 이 곳에는 사직단을 관리하는 관청이 사직서가 있던 자리인데 정면에 보이는 건물은 사직서 부속 건물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사직서터 안내표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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