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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산성은 임진왜란 중에 있었던 3대 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의 현장으로 우리에게 아주 가까히 있는 유적지입니다. 산성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남한산성처럼 돌로 쌓은 성곽은 볼 수 없지만, 북쪽편에는 토성의 흔적이 일부나마 남아 있습니다. 아마도 서울을 방어하는 입장에서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둔 곳입니다.
행주산성은 일산으로 가는 자유로변에 자리잡고 있는 유적지로 눈에 보이는 때는 많지만 잘 들어가지는 않게 되는 곳입니다. 하지만 나름대로 경치도 좋고 임진왜란 당시를 한번 되새겨보기에 좋은 장소입니다.
행주산성의 이름을 널리 알린 행주대첩의 영웅 권율장군의 동상이 산성입구에 우뚝 서 있습니다. 70년대 유적지 성역화 사업에 따라 조성된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공 있습니다.
행주대첩 전쟁의 모습을 묘사한 부도입니다. 관군, 의병, 승병, 행주치마의 주역인 부녀자를 주제로 한 4개의 부도가 권율장군 동상 뒷편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행주산성 출입문인 대첩문입니다.
행주산성 내부에서 본 입구인 대첩문입니다.
행주산성 입구 주차장
행주산성 답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
행주산성 입구인 대첩문에서 행주산성을 오르는 길입니다. 70년대 성역화 사업에 따라 조성된 길이 지금은 30년 이상이 흘러서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산책을 하기에 적당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습니다.
행주산성 오르는 길에서 보이는 입구인 대첩문입니다.
1592년(선조 25) 7월 권율은 금산군(錦山郡) 이치(梨峙:배재)에서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의 일본부대를 무찌르고 그 공으로 전라도순찰사가 되었다. 그뒤 명나라의 군대와 합세하여 서울을 수복하기 위해 북상하다가 수원 독왕산성(禿旺山城)에서 일본군을 무찔렀다. 그리고 조방장 조경(趙儆)을 시켜 서울을 탈환하기 위한 진지를 물색하도록 하여, 1593년 2월에는 서울 서쪽 20리에 있는 행주산성으로 진을 옮겼다. 이곳에는 권율의 부대 외에 승장 처영(處英)의 의승군(義僧軍)이 집결하여 병력은 모두 1만여 명이었다. 이들은 활·칼·창 외에 화차(火車)·수차석포(水車石砲) 등 특수무기를 만드는 한편, 조총에 대비하여 토제(土堤)를 쌓고 재(灰)가 들어 있는 주머니를 허리에 차고서 적의 침공에 대비했다. 또한 조도사(調度使) 변이중(邊以中)은 행주산성과 금천의 중간에서 서울의 적을 견제하며 권율의 부대를 돕고 있었다. 한편 일본군은 평양싸움에서 크게 패한 후 총퇴각하여 서울에 집결해서 총대장 우키타[宇喜多秀家]를 중심으로 대규모의 병력을 정비하고 반격을 기도했다. 2월 12일 새벽 일본군은 3만여 명의 대군을 7개 부대로 나누어 고시니[小西行長]·이시다[石田三成]·구로다[黑田長政]·요시가와[吉川廣家] 등으로 하여금 지휘하게 하여, 성을 포위·공격했다. 성 안의 관군과 의승군은 화차·수차석포·진천뢰(震天雷)·총통(銃筒) 등을 쏘아대며 용감히 맞섰고, 권율은 직접 물을 떠서 나누어주며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화살이 다 떨어지자 차고 있던 재를 뿌리고 돌을 던지며 싸웠고, 관과 민, 남과 여를 가리지 않고 모두 참여했다. 부녀자들도 긴 치마를 잘라서 짧게 만들어 입고 돌을 나르는 등 투석전을 벌이는 군사들을 도왔다. 마침 경기수사(京畿水使) 이빈(李蘋)이 화살을 가지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일본군의 후방을 칠 기세를 보이자, 이미 큰 피해를 입은 일본군은 사방의 시체를 불태우면서 도망하기 시작했다. 관군은 도망하는 적들을 추적하여 130여 명의 목을 베고 우키타·이시다·요시가와 등 일본군 장수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갑옷·창·칼 등 많은 군수물자를 노획했다. 이 싸움은 진주대첩·한산도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이다. 권율은 이 공로로 도원수(都元帥)에 임명되었고, 이후 일본군은 다시 서울 이북에 출병하지 않고 철수를 서둘렀다. <출처: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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