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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산성은 한강 하류 북쪽편 낮은 야산인 덕양산에 자리잡고 있는 산성이다. 주변은 넓은 평야지대를 이루고 있으며 한강과 고양시를 관통하고 있는 창릉천이 천연해자를 이루고 있다. 행주산성은 한강유역 쟁탈전이 극심했던 한성백제기에서 신라가 한강유역을 장악한 이후 삼국통일이 될때까지는 한강하구 수운을 장악하기 위한 중요한 요새였지만, 비교적 안정된 시기였던 조선시대에는 크게 중요시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다른 산성과는 달리 석축을 별도 쌓지 않고 삼국시대에 쌓은 토성을 보완하고 있다. 넓은 평야을 통제하기 위해 천연요새같은 지형에 쌓은 전형적인 삼국시대 산성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임진왜란때 이 곳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렀기때문에 유명해진 곳이다. 행주산성의 토성은 요즘 도시 근교의 작은 산에 많이 조성된 산책로처럼 보이기도 하기때문에 행주산성에서 토성을 찾아서 성벽위를 걷다면 토성이 어딘지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행주산성
임진왜란(1592) 때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으로 널리 알려진 곳으로, 흙을 이용하여 쌓은 토축산성이다. 성을 쌓은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험한 절벽을 이용하면서 펼쳐지는 넓은 평야를 포함하고 있는 것은 삼국시대 전기의 산성 형식과 같다. 산꼭대기를 둘러싼 작은 규모의 내성과 골짜기를 에워싼 외성의 2중구조를 하고 있다. 남쪽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동남쪽으로는 창릉천이 산성을 에워싸고 돌아, 자연적으로 성을 방어하는 구실을 하고 있다. 이 지역은 삼국시대 초기에 백제의 땅이었으며, 서해안과 연결된 수로의 거점지역으로 남북 교통의 요충지대이다. 성 안에서는 삼국시대의 토기조각을 비롯하여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이 많이 나오고, 물고기뼈무늬를 새긴 기와조각도 발견되고 있어서 고려시대까지도 사용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행주대첩은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로, 선조 26년(1593)에 왜병과의 전투에서 성 안의 부녀자들이 치마에 돌을 날라 병사들에게 공급해 줌으로써 큰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부녀자들의 공을 기리는 뜻에서 행주라는 지명을 따서 ‘행주치마’라고 하였다고도 한다. 이 산성은 한강 유역에 있는 다른 산성들과 함께 삼국시대 이후 중요한 방어요새의 역할을 한 곳으로, 현재 1603년에 세운 ‘행주대첩비’가 남아 있으며, 권율 장군을 모시는 충장사가 있다. <출처:고양시청>
행주산성
행주산성의 성벽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돌로 쌓은 석축이 있는 것이 아니라 흙으로 쌓아 올린 토성과 경사진 언덕을 이용한 산성이다. 왜구의 침입과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많은 산성들은 석축을 쌓아 방어력을 강화했지만 행주산성은 조선시대에는 전략적으로 크게 중요하지 않아 삼국시대에 토성을 보완해서 사용했다.
2009년 봄
흙으로 쌓은 토성으로 지금은 산책로처럼 느껴진다. 토성을 따라서 내려가다가 성벽이 어딘지 찾다보면 산성아래로 내려가게 되어 있다.
행주산성 토성에서 내려다 보이는 고양시 일대. 행주산성은 남쪽으로 한강이 흐르고 동쪽으로 창릉천 흘러 해자역할을 하고 있으며, 경사가 심하다. 반면에 북쪽과 서쪽은 비교적 경사가 완만하면서 평지와 연결되어 있어 토성은 주로 이 방향으로 쌓아 놓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북쪽과 서쪽 토성주변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행주산성 동쪽에서 한강으로 흘러드는 창릉천이 천연해자 역할을 하고 있다.
먹거리촌이 형성된 행주산성 북쪽과 연결되는 능선. 행주산성은 일부만 성벽의 형태로 토성을 쌓고 전체적으로는 경사진 언덕을 천연의 장애물로 삼고 이 곳에 많은 목책을 세워두고 방어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흙으로 쌓은 토성을 따라서 내려오면 행주산성 아래로 내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경사진 언덕에 쌓은 토축
2009년 봄
행주산성 성문 부근. 행주산성 남쪽으로는 한강이 흐로고 있고 낭떠러지가 있기때문에 토성이 거의 필요없기때문에 이 지점에서 언덕까지 약간의 토성이 남아 있습니다.
토성문지,
이곳은 행주산성의 출입문이 있던 문턱이다. 학술발굴조사 결과 문터의 서벽 아래에 문을 세우기 위한 두께 50cm 가량의 통일신라시대 성토증이 확인되었다. 문의 폭은 7m 가량이며, 지면 아래서 확인된 생토암반을 파고 들어간 배수로는 산성의 자연배수로 역할도 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출처:고양시청>
삼국시대 토성을 쌓았던 흔적이 발굴된 성문터. 이곳에서 임진왜란 때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2009년 봄
행주대첩 전투지
이곳은 행주산성의 주 출입구(성문)이 있던 곳으로 가장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지역이다. 행주산성의 토성 중 현재까지 복원된 구간 중 가장 낮은 곳에 해당하며 산성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가장 완경사를 이루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점이다. 기록에 의하면 권율 장군의 조방장 조경이 목책을 쌓아 행주산성의 약점을 보완하였으며 전투경험이 풍부한 승군 등이 이 부근에 배치되어 치열한 전투 후 대승을 거둔 곳으로 여겨진다. 전략적인 위치상 아군과 적군 사이에 가장 많은 피해가 발생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이곳에서 당시 나라사랑의 뜻을 새겨보길 바란다 <출처:고양시청>
행주대첩 격전이 벌어졌던 성문터. 여기서부터 토성을 따라서 올라갈 수 있습니다.
행주산성 토성이 복원되어 있는 북서쪽 언덕. 행주산성에서는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지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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