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란인은 다양한 방법으로 기록을 남겼는데 현재까지 가장 많이 남아있는 것은 각종 비석에 글자를 새겨서 업적을 남기고 있고, 그 기록 중에는 다양한 연도표시가 되어 있기도 하다. 대표적인 것이 진흥왕이 전국 각지에 남긴 순수비일 것이다. 경주 박물관에는 진흥황 순수비는 없지만 가장 유명한 것이 화랑정신을 새겨 놓은 임신서기석과 남산신성 축성 기록을 남겨 놓은 남산신성비이다. 비석 외에도 사리, 기와 등에서 한문으로 각종 기록을 남겨 놓고 있다.
신라 화랑에 대한 기록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임신서기석'이다. 자연석에 74자로 이루어진 글귀를 새겨 놓고 있는데 화랑정신의 실천을 다짐하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1934년 경주 석장동(錫杖洞)에서 발견된 것으로, 비석의 첫머리에「임신(壬申)」이라는 간지(干支)가 있고, 그 내용 가운데 충성을 서약하는 내용이 자주 보이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윗면이 조금 넓은 자연석에 화랑으로 보이는 청년 두 사람의 공부와 인격도야에 관한 맹세의 글이 새겨져 있다. 비문은 구획선 없이 다섯줄에 74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명문중의 임신년이라는 간지가 어느 해인지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비문 가운데에 화랑의 근본정신과 통하는 충도(忠道)의 실천을 다짐하는 내용이 보이므로, 화랑도가 융성했던 진흥왕(眞興王) 13년(552)이나 진평왕(眞平王)34년(612)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출처:문화재청>
경주 남산 신성을 쌓은 기록을 남겨 놓고 있는 남산신성비. 비문에는 성의 축조에 참여한 사람, 성을 쌓을 때의 상황 등 다양한 기록을 남겨 놓고 있다.
남산신성(南山新城碑)은 경주 남산 북쪽 산허리, 해목령(蟹目嶺)을 중심으로 여러 골짜기를 둘러싸고 있는 산성(山城)으로 그 둘레가 3.7km에 이른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진평왕(眞平王) 13년(591)에 경주의 남쪽을 방어하기 위해 남산신성을 쌓았으며, 그 뒤 문무왕(文武王)19년(679)에 다시 크게 쌓았음을 알 수 있다. 남산신성비는 1934년 제1비가 발견된 이래로 2000년도 까지 모두 10기가 발견되었다. 비문에는 성을 쌓을 때의 상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591년 성의 축조 당시 공사에 참가한 사람의 관직과 이름·출신지·맡은 구역과 함께, 3년 안에 성이 무너지면 어떠한 처벌도 달게 받고 다시 와서 쌓겠다는 맹세가 기록되어 있다. <출처:문화재청>
기와 파편 속에 새겨진 글자들
건물 기둥으로 보이는 곳에 많은 기록을 남겨 놓고 있다.
각종 생활용구 속에 새겨 놓은 글씨들.
태종무열왕릉, 흥덕대왕릉 등 각종 왕릉의 비석에는 많은 글자가 남아 있다.
사리함에 새겨 놓은 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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