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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 중기 이후에는 무신정변으로 인해서 내부적으로 상당기간의 혼란기를 보내다 최충헌이 혼란을 종식시키고, 독재체제를 확립하였다. 무신 정권기의 혼란을 종식한 최씨정권은 이전에 비해서 유학자들을 발굴하여 행정능력을 갖춘 문신들도 과거를 통해서 등용되기도 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는 불교 개혁 운동인 불교 결사운동이 활발히 진행되어 지눌을 중심으로 수선결사 운동과 무신집권층의 후원하에 백련결사 운동이 일어났으며 선종의 성격이 수선결사 운동은 오늘날 불교의 주도세력인 조계종의 성립으로 나아갔다.


무신정권
12세기 들어 고려사회는 귀족적인 문화가 무르익는 한편의로 농민의 유망과 이자겸의 난,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등이 이어지며 그 모순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문벌을 견제하려던 의종이 측근에 치우쳐 향락과 실정을 거듭하자, 평소 차별받던 무신들과 군인전을 지급받지 못한 군인들의 불만이 무신정변으로 폭발하였다. 중앙에서 권력을 잡은 무신들이 서로 권력 투쟁을 벌이는 사이에 지방에서는 악화된 민생으로 농민과 천민이 대규모로 봉기하였다. 최충헌은 이러한 혼란을 종식시키며 무신정권을 최씨 가문에 의한 독재체제로 확립하였고, 그 아들 최우 역시 13세기 초에 강력한 사병을 키우며 사저에서 인사를 좌지우지하는 등 독단적으로 정치를 운영하였다. 다만 최우 때에는 행정 능력을 갖춘 문인들이 적잖게 등용하면서 무신 일변도의 정치를 일부 보완하기도 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최충헌 가족을 위한 호신용 경전과 경갑(소자본불정심관세음보살대다라니경합각), 보물 691호, 최씨 일가가 들고 다니던 휴대용 다라니경. 고려 최씨 무신정권의 최고 권력자 최충헌(1149~1291)과 그 두 아들 최우.최항을 위해 만든 휴대용 불경과 경갑이다. 불경은 이들 최충헌 부자가 자신들의 호신과 재난 예방을 위해 사가판으로 간행한 것으로, 은 바탕에 금을 입힌 경갑에 넣어 끈으로 매어 차고 다니도록 하였다. 불경 맨 끝에 발원문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고려 중기에 펴낸 것으로 권 상·중·하 3권이 병풍처럼 펼쳐서 볼 수 있는 형태로 되어있으며, 펼쳤을 때의 크기는 세로 5.3㎝, 가로 275㎝이다. 권 상·중·하 뒤에는『일자정륜왕다라니』,『자재왕치온독다라니』,『관세음보살보문품』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은에다 금을 입혀 만든 세로 5.3㎝, 가로 3.5㎝, 두께 0.5㎝의 상자에 책을 넣고 이를 다시 세로 13.8㎝, 가로 12.8㎝, 두께 6㎝의 나무상자에 넣어 보관하였다. 은합 윗부분에 고리가 좌우에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들고 다니기 위한 일종의 장신구였음을 알 수 있다. 책의 끝부분에 적혀 있는 기록을 보면 최충헌과 최우, 최향 3부자가 당시 겪고있던 어려운 난을 빨리 해소하고 장수를 누리기 위해 새긴 것임을 알 수 있다. 윗부분이 약간 잘려지고 새겨진 글자들과 면이 깨끗하지 못하여 읽기 어려운 것으로 보아 나중에 다시 찍은 판본으로 여겨진다. <출처:문화재청>


장양수의 과거 합격증(장양수 홍패, 복제품), 국보 181호, 고려 희종 1년(1205),
최충헌 정권이 확고하던 희종 1년(1205)에 장양수에게 발급된 과거 급제 증명서로서, 현존 과거 관련 문서 중 가장 오래되었다. 지공거와 같은 고시관 대신 재신들이 기록된 점 등으로 볼 때, 국자감시의 급제첩일 가능성이 크다. 맨 뒤에 기록된 재신들 중 "판병부어사대사 최"는 다름 아닌 최충헌이다. 최충헌은 후에 자신을 죽이려 한 희종을 왕위에서 축출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이 문서는 고려 희종 원년(1205)에 진사시에 급제한 장량수에게 내린 교지이다. 크기는 가로 88㎝, 세로 44.3㎝로 황색 마지 두루마리에 쓰여져 있다. 장량수는 울진부원군 문성공 장말익(張末翼)의 8세손으로 추밀원부사, 전리판서 등을 역임하였으며 고려 개국공신 장정필의 12세손이다. 조선시대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에게 내린 홍패(紅牌), 백패(白牌)와 같은 성격의 교지이다. 앞부분이 없어져 완전한 내용을 파악할 수 없으나, 고시에 관여했던 사람의 관직과 성이 기록되어 있다. 문서의 형식은 중국 송나라 제도에서 받아들인 듯하며, 지금까지 전해지는패지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고려시대 과거제도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출처;문화재청>



죽은 아들과 함께 묻은 젓가락과 먹(제숙공처 명 청동 저,단옥오 명 묵), 13세기, 청주시 명암동 고려무덤 출토
청주 지역의 고려 토광묘에서 출토된 청동 젓가락으로, 제숙공의 부인이 죽은 아들을 위해 만들었다는 내용의 글이 점각되어 있다, 동반 출토된 중국 동전 등으로 볼 때, 무덤의 주인공은 13세기 전반 고위 품관을 역임한 사람의 아들로 추정된다. 고위 관료의 가족이 청주에 묻혔다는 점에서 종래 개경 인근에 조성되던 품관층의 무덤이 지방으로 확산된 사례이거나, 무신집권기에 중앙정계에서 밀려나 퇴거한 경우로 추정된다. 먹은 "제숙공처"명 청동 젓가락과 함께 출토된 것으로, 현존 유일의 고려 먹이다. 먹집게로 집은 흔적이 있고 아래쪽이 갈려 있어서, 생시에 쓰던 먹임을 알 수 있다. 파도무늬로 둘러싸인 가운데 '단산오(옥)"이라 양각하였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단양의 특산 먹 중 최상품을 '단산오옥'이라 한다고 적혀 있는데, 이 먹의 출토로 '단산오옥'이란 이름이 고려시대부터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군사 지휘관 "행군만후"의 청동도장 (행군만호 명 청동 인), 강종 2년(1213), 충북 중원군 가금면 출토
도장 면과 옆면에 각기 "행군만호방자호지인"이라 새겼고, 윗면에는 "숭정2년3월"이라 새겨 놓았다. 숭정2년(1213, 강종2)은 도장이 제작된 해일 것이다. 만호는 그동안 충렬왕(재위 1274~1308) 때 설치된 직임으로 보아 왔으나, 그보다 훨씬 앞선 13세기 초 최충헌 집권 시절에 이미 만호라는 직임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출처:중앙박물관>

불교결사운동
무신정권 하의 불교계는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나 지방민을 비롯한 많은 이들의 호응을 얻었다. 지눌의 수선사로 대표되는 결사 운동이 그것이다. 이는 종래의 불교가 불교 본연의 실천이나 지방사회의 현실과 멀어진 데에 대한 자기반성의 움직임이었다. 결사 운동을 선도한 지눌은 경전 공부와 참선이 본래 하나라는 정혜쌍수론, 깨달움 이후에도 꾸준히 수행해야 한다는 돈오점수론 등을 말하면서, 모든 승려가 독경과 선 수행, 노동에 두루 힘써야 한다고 주장하엿다. 그의 여러 주장은 선종을 바탕으로 교종을 통합하는 조계종의 성립으로 나아갔다. <출처:중앙박물관>


수선사 제2조 혜심이 지은 공인집이다. 혜심은 불경이나 산문 조사의 어록에서 공안 1,125측을 뽁고 그 강령의 요지를 제시한법과 찬송을 붙여 이 책을 만들었다. 초간본은 전하지 않으며, 몽골과의 전쟁으로 그 초판이 불탄 뒤 817측을 더하여 고종 31년(1244)에 대장도감 남해분사에서 새로 펴냈다.
* 공안: 선종 불교에서 깨달음을 위한 수행 과정에 모법이 되거나 깨치고 못 깨침을 판정하는 규범을 말한다. <출처:중앙박물관>


수선결사의 본거지인 순천 송광사와 백련결사의 본거지인 강진 백련사


고려 무신정권 때의 문신, 양택춘의 묘지,
고려 무신정권 때의 문신 양택춘(1172~1254)의 묘지명이다. 60에 가까운 나이에 온수군 감무가 되어 처음으로 벼슬하였다. 뒤늦게 영화를 누렸지만 물러날 때를 잘 알았다. 양택춘으 아들 5명 중 3명은 승려가 되었는데, 원우국사 내로는 그의 큰아들 천영이다. 그는 평생 말을 거짓되게 하지 않고 행동을 꾸미지 않았으며 너그럽고 따뜻한 성품을 지녔다고 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석관
통일신라시대 이후 유행하기 시작한 불교식 화장은 고려시대에 들어서면서 상류층에 널리 퍼졌다. 이때 유골을 모식 위해 석관이 많이 사용되었다. 이들 석관에는 바깥면에 사신이나 십이지신, 비천 등을 주로 새기고, 안쪽 면에는 꽃이나 새 등의 동식물, 북두칠성을 비롯한 별자리 등을 많이 선각하였다. 간혹 석관 주인공의 묘지명을 안쪽 면에 새기기도 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사방의 수호신을 새긴 석관(사신문 석관)
죽은 이의 유골을 담은 석관이다. 뚜껑의 바깥면에 비천과 꽃을, 안쪽 면에 카시오페아와 북두칠성을 새겼고, 바닥의 안쪽 면에 격자무늬를 베풀었다. 또 4개의 측면 판석에는 바깥 면에 사신(청룡.백호.주작.현무)을 양각하였고, 안쪽 면에는 꽃과 꽃병을 선각하였다. 사신이 둘러 지키고 꽃이 흐드러진 석관 내부에서 죽은 이는 안실을 누렸을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사신 중 동.서 방위를 나타내는 청룡과 백화


남북 방향을 나타내는 주작과 현무


석관뚜껑에 새겨진 비천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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