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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서문은 화성의 4대문 중 서쪽 대문으로 1896년 (정조 20면)에 완공된 성문으로 약 200년된 구조물이라 할 수 있다. 화서문은 축성당시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어 팔달문과 함께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화선문은 화성 남쪽 서해안 방향으로 연결되는 길이 출발하는 곳으로 그 중요도에 있어서 정문격인 팔달문보다 낮았던 것으로 보이며, 성문의 크기가 작아 보인다. 화서문 편액은 초대 화성유수이자 정조대왕의 최측인 채제공이 썼다고 한다.
팔달산 성벽길을 따라서 걸어 내려오다 서북각루에서 잠시 쉰 후, 평지에 도달하면 수원화성의 서쪽 출입문인 화서문과 화서문을 지키는 망루 역할을 하는 공심돈을 볼 수 있다. 화서문 부근을 보면 잘 알 수 있듯이 수원화성은 큰 돌을 쌓은 석성을 기본으로 하여 암문, 옹성, 흉벽 등에는 벽돌을 일부 사용하기도 한다. 중국의 경우는 대부분 벽돌을 이용해서 쌓은 전성이다.
서북각루에서 화서문으로 내려가는 성벽길
화서문 문루는 정면 3칸, 옆면 2칸의 일층건물로, 지금도 누각안에서 잠시 쉬면서 주위를 둘러 볼 수 있다.
다산 정약용과 함께 정조대왕의 최측이자 수원화성 유수를 지낸 채제공이 쓴 편액.
성곽의 배수시설인 석루조. 우리나라 성곽의 경우 자연지세를 많이 이용했기때문에 성문 부근을 빼고는 석루조를 많이 설치하지는 않는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 지은 성곽의 특징으로 옹성을 많이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수원화성의 경우도 옹성으로 성문을 보호하고 있는데, 당시 중국 북경과 주변 성곽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장안문이나 팔달문은 옹성 입구에 별도의 출입문이 있는데 비해 화서문과 창룡문은 출입 통로를 두고 있다.
화서문 옹성내부.
수원화성 안쪽에서 본 화서문
장안문을 가는 성벽길에서 본 화서문, 서북각루, 공심돈
망루라 할 수 있는 공심돈과 나란히 서 있는 화서문
수원성은 조선 정조 18년(1794)에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정조 20년(1796)에 완성한 성곽이다. 중국성의 모습을 본뜨기는 했지만 과학적인 방법으로 성을 쌓아 훨씬 발달한 모습을 하며 한국 성곽을 대표하는 뛰어난 유적이다. 화서문은 수원성의 서쪽문으로 문의 모든 시설과 크기는 동쪽의 창룡문과 거의 같은 구조로 되어있다. 네모 반듯한 큰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축대 위에 1층의 건물을 세웠는데,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기둥 사이는 모두 개방되어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 건물이고, 축대의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과 문의 앞쪽에 벽돌로 쌓은 반달모양의 옹성이 있다.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지키기 위한 구실을 하며 2중의 방어 효과를 갖는다. 또한 주위를 돌아가며 총이나 활을 쏘는 구멍이 뚫린 낮은 담을 쌓아 보호되도록 하였다. 옹성의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공심돈이 성벽을 따라서 연결되어 있다. 공심돈은 속이 텅 비었다는 뜻으로 지금의 초소 구실을 하던 곳이다. 안에는 계단을 따라 오르내릴 수 있고 층마다 바깥을 향해 총이나 활을 쏠 수 있도록 구멍이 있어 철저한 방어가 되도록 하였다. 한국의 다른 성곽 건축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시설로서, 구조도 특이하며 화서문을 중심으로 일대의 경치에 한층 더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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