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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산성_읍성)

[수원 화성] 동남각루와 남수문터

younghwan 2010. 3. 16.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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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룡문에서 시작한 수원화성 동쪽편 성곽 걷기가 끝나는 지점인 동남각루이다. 성곽위에서 보면 작은 누각하나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성곽 아래에서 보면 웅장하고 위압적인 곳에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남각루는 지금은 없어진 남공심돈과 마주보고 있으며, 수원화성에서 방어에 제일 취약한 지역인 남수문을 지키던 방어시설로 특별은 시설로서 적을 제압하는 것이 아니라 치성이 점하고 있는 위치의 장점으로 그 기능을 다하던 시설이다. 평지를 걷는것 같던 수원화성 성곽길은 동남각루에서 경사진 길을 내려와 수원화성 상업의 중심지인 팔달문과 지동시장, 남수문터로 내려온다. 상업의 중심지답게 팔달문과 남수문터 사이의 성곽 시설은 지금은 없어져 버렸다.


수원화성 동남각루는 치성위에 작은 누각을 올려놓고 있는 형태로 공심돈과 같은 벽돌로 쌓은 방어시설은 만들어 놓지 않고 있다. 하지만 경사진 언덕위에서 팔달문 주변을 엄호하고 있는 지형적 이점으로 남공심돈과 함께 수원화성에서 중요한 군사시설로 여겨졌을 것으로 보인다.

각루는 성곽의 비교적 높은 위치에 세워져 주변을 감시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으며 비상시 각 방면의 군사지휘소 역할을 하는 곳이다. 동남각루는 화성의 4개 각루 중 성 안팎으로 시야가 넓은 곳으로서 남수문 방면의 방어를 위하여 남공심돈과 마주보며 군사를 지휘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출처:수원시청>


수원화성 동남각루 주변 성곽길


동남각루에서 본 팔달문과 팔달산을 따라오르는 성곽길


동남각루 주변 수원화성 바깥쪽 성벽


수원 팔달문 부근 남수문터에서 성곽길은 잠시 끊어진다.


수원화성을 남북으로 흐르는 수원천이 끝나는 지점에 남수문터가 있다. 북수문과 달리 남수문은 9개의 수문과 수백명의 군사를 배치할 수 있는 요새같은 포사가 설치되었던 곳은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팔달문과 동남각루 사이가  가장 많은 병사와 화력, 시설이 배치되었던 곳이지만 도시화로 제일 먼저 없어진 곳이기도 한다.

남수문은 수원천이 화홍문에서 곧장 750보를 흘러내려와 화성과 다시 만나는 지점에 만든 수문으로 위치는 남공심돈의 북쪽으로부터 남수문의 서쪽까지 73보, 수문의 동쪽으로부터 동남각루 아래까지 30보 거리아디. 1794년 2월 28일 공사에 착수하여 한동안 공사를 중단했다가 1795년 11월 공사를 재개하여 1796년 1얼 16일 수문의 구조를 이루고 3월 25일 준공되었다. 남수문의 크기는 다리의 길이가 95척, 넓이 19척이다. 남수문은 수원천의 수량이 불어나는 것에 대비하여 북수문보다 2개 더 많은 9개의 수구를 만들었다. 수문 위로는 문루 대신 벽돌을 쌓아 긴 포사늘 만들었는데 화성의 성곽 가운데 가장 취약한 부분임을 고려한 조처였다. 포사는 사방에 벽을 치고 한가운데만 터서 출입하였는데 비상시에 수백명의 군사를 배치 할 수 있는 요새였다. 포는 수문의 2/3를 차지하고 나머지 부분을 다리로 이용하였다. 수문에는 바깥쪽에 포혈 57개를 뚫어 놓았으며 9개의 수문마다 1개씩의 둥근 담이 수문위로 만들어졌다. 동서 양쪽 가장자리에 성가퀴를 설치하여 성벽에 접속시켰고, 작은 홍예문을 만들어 포로 통하게 하였다. 남수문 바닥의 석축은 안쪽 길이 6부, 바깥쪽 길이는 각 9보로 하천바닥을 깊이 파서 단단하게 다쳐 기초를 튼튼하게 하였다. 남수문은 1922년 7월 대 홍수로 유실된 이후 아짂까지 복원되지 못하였으며, 수원시 남수동의 동명은 이 수문에서 유래되었다. <출처: 수원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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