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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_향교_사당

인천향교, 인천도호부 청사와 함께 있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향교

younghwan 2010. 9. 19.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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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향교는 인천 문학경기장 맞은편에 위치한 인천도호부청사와 같이 있는 향교이다. 조선시대 인천의 규모는 도호부가 있을 정도로 크거나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은 아니었지만, 세조의 비인 자성왕후의 외향이기때분에 도호부로 승격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곳 인천향교는 인천도호부 관할 구역이 크지 않았던 까닭에 건물의 규모도 크지 않고 학생 수용인원도 많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향교는 대체로 문을 굳게 걸어잠그고 있어 외지인이 방문하기는 쉽지 않으나, 이 곳 인천향교는 관리인이 상주하고 있으며, 관광지겸 역사체험장으로서 도호부청사가 유지되고 있는 까닭에 방문객이 향교를 쉽게 둘러볼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특히 관리인이 상주하는 까닭에 건물이 깨끗하다고는 볼 수 없으나, 항상 사람이 오가는 살아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는 향교 건물이다.




인천도호부 청사 서쪽편 언덕에 나란히 자리잡은 인천향교. 출입문으로 홍살문이 있고, 정문인 태극무늬가 있는 삼문이 있다.




인천향교의 강학공간인 명륜당. 인천향교는 전학후묘의 공간배치로 강학공간인 명륜당이 앞쪽에 있다. 경치가 좋은 언덕에 위치한 서원이나 향교의 경우 대부분 강당을 앞쪽에 두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평지에 있는 성균관은 전묘후학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인천향교 명륜당은 앞면 5칸으로 중앙 3칸에 문을 열면 강당에서 언덕아래 경치를 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향교는 서원과는 달리 경치좋은 곳에 자리잡는 것이 아니라 지방관청 주변에 두고, 고을 수령이 수시로 드나들 수 있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인천향교 명륜당 내부. 이 공간을 문묘제례를 위해 수시로 사용하는 것을 보인다. 옷이 걸려있고, 마루에는 자리가 깔려있다.


강학공간 중 인천향교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이 머물던 기숙사인 동재.서재



공자를 비롯한 선현들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 좌.우의 동무.서무와 함께 배향공간을 이루고 있다. 일반적인 대형 향교의 경우 강학공간과 배향공간이 담과 삼문으로 분리된 경우가 많은데 비해 이 곳에서는 같은 마당을 쓰고 있다.


대성전 좌.우에 위치한 작은 사당인 동무.서무

 
향교 강학공간이 명륜당 오른쪽으로는 제사 준비를 하는 재실과 이 곳 향교에서 상주하는 사람들이 기거하는 공간이 있다.



인천향교 삼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출입문, 서쪽편에 명륜당, 동쪽편에 재실을 볼 수 있다.

인천향교가 언제 건립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최항의 중수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세조 이전에 설치된 것으로 추측된다. 주요 건물로는 공자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대성전을 비롯하여 우리나라와 중국 성현의 위패를 모신 동.서무, 교육생들의 강당인 명륜다, 유생들의 처소인 동.서재 등이 있다. 건축양식은 팔작지붕인 명륜당을 제외한 나머지 건물들은 모두 맞배지붕 형식을 취하고 있다. <출처:인천시청>

조선시대에는 1392년(태조 1)에 여러 도(道)와 안찰사(按察使)에 명하여 학교의 흥폐로써 지방관고과(地方官考課)의 법으로 삼고 크게 교학의 쇄신을 꾀하였다. 여기에서 부·목·군·현(府牧郡縣)에 각각 1교씩 설립하고 점차 전국에 이르게 되었다. 향교에는 문묘(文廟)·명륜당(明倫堂) 및 중국·한국의 선철(先哲)·선현(先賢)을 제사하는 동서양무(東西兩廡)·동서양재(東西兩齋)가 있다. 동서양재는 명륜당(강당)의 전면에 있으며 동재에는 양반, 서재에는 서류(庶流)를 두고 보통 내외 양사(兩舍)로 갈라진다. 내사에 있는 자는 내사생(內舍生)이라 하고, 외사에는 내사생을 뽑기 위한 증랑생(增廣生)을 두었다. 유생의 수는 부·목에 90인, 도호부(都護府)에 70인, 군에 50인, 현에 30인으로 정하고, 직원으로는 교수(敎授)·훈도(訓導) 각 1인, 소군(小郡)에는 훈도만을 두었으며, 또 교예(校隸)가 속하고 있었다. 또한 독서와 일과(日課)를 수령(守令)이 매월 관찰사에 보고하여 우수한 교관에게는 호역(戶役)을 양감(量感)하여 주었다. 향교에는 그 공수(公需)를 위하여 정부에서 학전(學田) 7결 5결을 지급하고 그 수세(收稅)로써 비용을 충당케 하였으나, 지방민으로부터 징수 또는 매수 등에 의한 많은 전지(田地)를 소유한 곳도 적지 않았다. 이들 향교는 중앙의 사학(四學)과 같으며 여기에서 수학한 후 1차 과거에 합격자는 생원(生員)·진사(進士)의 칭호를 받고 성균관에 가게 되며, 다시 문과시에 응하여 고급관위(高級官位)에 오르는 자격을 얻었다. 그러므로 중기 이후의 향교는 과거의 준비장이 되고 서원(書院)이 발흥하게 되자 점차 쇠미하여졌다. 1894년(고종 31) 말에 과거제도의 폐지와 함께 향교는 완전히 이름만이 남아 문묘를 향사(享祀)할 따름이었다. 이후 교육제도의 확립에 따라 각종 교육기관은 정비되었으며, 향교는 1911년 조선총독부령에 따라 문묘직원(文廟直員)을 명예직으로 두어 부윤 혹은 군수의 감독하에 두고 문묘를 지키고 서무(庶務)에 종사케 하였다. 학전, 지방 유림의 구림(鳩林) 등 향교재산은 대한제국 정부 학부(學部)의 소관으로 1900년(융희 4) 4월에 향교 재산관리규정을 정하고 부윤·군수로 하여금 정리케 하고 그 수입은 부·군내의 공립학교 또는 지정하는 학교의 경비 또는 문묘의 수리·향사비로 충당케 하였다. 1918년 조사에 따르면 향교의 총수 335, 소관 토지 48만 평이었다. 그 후 재산 관리규정은 폐기되어 공립학교의 경비에 사용되지 않고 문묘의 유지와 사회교화 사업의 시설에만 충당케 하였다. <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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