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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관아

고양 벽제관지, 옛터만 남은 조선시대 중국 사신이 마지막으로 머물던 역관

younghwan 2010. 9. 21.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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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중국에서 온 사신들이 마지막으로 예를 갖추면서 숙박을 하던 고양군청 역관 겸 객사인 벽제관 옛터이다. 지금은 벽제갈비로 유명한 이 곳은 일산을 포함한 대도시로 변모한 고양시의 행정중심지였던 곳이다. 지금은 일산과 원당에 밀려서 고양시에서 가장 한적하고 시골같은 장소로 바뀌었지만, 조선시대에는 서울과 의주로 통하는 대로변이었으며, 근처의 양주와도 연결되는 교통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옛터만 남은 벽제관지를 보면, 중국 사신이 머물던 곳이라 건물이 상당히 크고 많았을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실제 건물터를 보면 별로 큰 건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조선시대 법도에 맞추어 군수가 다스리던 지역의 객사 규모에 맞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거대한 객사 건물인 전주객사나 나주 금성관 등에 비해서 건물규모는 상당히 작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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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초석만 남아 있는 고양 벽제관 옛터. 건물은 일반적인 객사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으며, 중정 3칸, 좌.우익랑 3칸씩으로 이루어졌는데 건물터로 봐서는 건물규모가 크지 않았던 것을 보인다.


객사를 관리하던 하급관리가 업무를 보거나, 사신 수행원들이 머물던 작은 행각 건물터


벽제관 마당에는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향나무가 심어져 있다.


벽제관에 쓰였던 건축자재들



벽제관 뒷쪽으로는 낮은 야산이 있어 아득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 역관터로서 중국을 오가던 고관들이 머물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한양에서 중국으로 통하는 관서로에 역관이 10여군데 있었는데, 한양에 들어가기 하루전에 반드시 이곳 벽제관에서 숙박하고 다음 날 예의를 갖추어 들어가는 것이 관례였다. 또한 중국으로 가는 우리나라의 사신들도 이곳에서 머물렀다. 지금의 벽제관터는 인조 3년(1625년) 고양군의 관아를 옮기면서 지은 객관자리로 일제강점기에 건물의 일부가 헐렸고 한국전쟁 때 문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타버렸다. 그 후 객관의 문도 무너져서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건물은 중앙의 정사와 좌우의 익사로 구성되는데, 모두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 읍내마을에 위치한 '벽제관지'는 고양향교, 향교골 은행나무와 함께 이 지역의 오랜 역사를 보여주는 문화유산이다. 이곳 지명을 고향동이라 하는 것도 1625년부터 1914년까지 289년간 고양군청과 벽제관과 같은 중요한 공공기관이 있어 붙여진 것이다. 고양동은 파주, 양주, 고양지역이 만나는 곳으로 옛부터 교통의 중심지로 유명하다.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과 조선의 수도인 한양을 연결하는 곳이었고 중국의 사신과 우리나라의 고위관리 등이 자주 지나는 경의대로(연행로, 의주로, 관서대로)의 중심 건물이 벽제관이었다. 벽제관은 처음 이곳에서 3km 가량 떨어진 옷 고을에 지어졌다. 이후 임진왜란 등으로 훼손되고, 당시 고양군청이 1625년에 현재의 고양동으로 옮기면서 벽제관도 고양향교와 함께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게 되었다. 고양의 벽제관은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기록을 보면 세종 원년(1419년)에 중국 사신을 효령대군, 영의정 유정현 등이 영접했다는 내용을 시작으로 수십차례 기록에 보이는 중요한 장소였다. 그러나 벽제관은 사신영접의 기능 이외에도 고양 군수가 전패와 궐패를 모시고 임금께 예를 올리는 장소였으며 외부에서 온 관리나 손님이 머물렀던 공용의 숙박장소였으며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지방 소송에 대하여 재판하는 장소로 사용키도 했다. 특히 벽제관은 인근에 조선시대 왕릉이 있어 이 곳을 임시 궁궐인 행궁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출처: 고양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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