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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월드컵경기장인 문학경기장 맞은편에는 옛 인천지역을 관할하던 인천도호부청사가 남아 있다. 최근에 정비가 완료되어서 예전의 건물의 그대로 남아있는지, 아니면 대대적으로 보수.복원을 했는지 구분하기가 좀 힘들정도로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다. 지방수령이 관장하던 교육의 중심인 인천향교와 객사, 동헌이 나란히 있으며, 지방수령의 숙소인 내아는 남아있지 않다.
도호부는 고려시대부터 설치된 관청으로 군사적으로 중요하거나 변방의 점령지 등에 설치한 군사적 성격이 강한 지방관청이었지만, 조선시대에는 일반관청과 비슷하게 변화하였다. 도호부 수령인 부사는 종3품으로 정3품인 목사보다 한단계 낮은 단계이다. 그래서 목이 설치된 전주나 나주의 객사에 비해서 그 크기가 작지만, 현단위 고을의 객사보다는 크게 지었다.
인천도호부 객사. 앞면 9칸 건물인 정당이 3칸, 좌.우익랑이 3칸씩으로 되어 있다. 건물칸수는 지방 수령의 직위와 관계없이 보통 9칸으로 구성되나, 그 크기는 직위에 따라서 다른 것으로 보인다.
객사 가운데 건물인 정당은 좌.우익랑보다 지붕이 높으며, 임금의 궐패를 모시고 있다.
지방수령이 객사 정당에 모셔진 국왕을 궐패에 예를 올리는 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다. 보름과 초하루에 지방수령은 국왕을 향해 망궐례를 올렸다고 한다.
좌.우익랑에는 중앙에서 방문한 관리난 외국 사신이 머물렀으며, 숙식을 하는 방과 연회 등을 하는 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서울 이북 고을 중 중국과의 교통로에 있는 지방의 객사에는 중국을 오가는 우리나라나 중국 사신들이 많이 머물렀다고 한다.
인천도호부 객사 부속건물인 공수.
공수는 객사의 부속건물로써 부엌.곳간.온돌방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기능으로는 객사를 관리하는 인원과 중앙 사신을 수행한 수행인력들이 유숙하고, 객사에 필요한 물품을 보관하던 곳이다. 이들 업무를 주관하는 곳이 공수청이다. <출처:인천시청>
인천도호부 객사 출입문인 삼문
인천도호부청사 입구
객사는 임금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건물로서 수령의 집무실인 동헌보다도 격이 높았으며 그런만큼 관아 시설 중에서 규모가 제일 크고 화려하며 전망이 가장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객사는 신성한 건물로서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 설계되었는데, 가운데 채가 좌우 채보다 한 단 높은 솟을대문 양식의 독특한 지붕이다. 전패를 모시고 있는 가운데 채가 전청이며, 부사가 정기적으로 임금에 대한 충성을 다집하는 곳이었다. 좌우의 익사는 중앙에서 내려온 사신의 접대와 숙소로 이용되었다.
조선시대의 기본적인 지방 행정기구는 도(道)이다. 경기도의 경우, 3개의 목(牧)과 8개의 도호부(都護府), 10개 군(郡)과 12현(縣)이 있었고, 8개의 도호부 가운데 인천도호부와 부평도호부가 포함되어 있었다. 인천이 도호부로 승격된 것은 조선 세조 5년(1459)으로 세조의 비(妃)인 자성왕후 윤씨의 외향(外鄕)이기 때문이었다. 인천도호부청사의 건축 시기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객사를 보수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지붕의 기와에서‘강희 16년’이라는 명문(銘文)이 나온 것을 볼 때 숙종 3년(1677)에 중수된 것임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인천도호부의 건물 구성은 《인천부읍지(仁川府邑誌)(1899)》를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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