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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China)

[북경 명13릉] 정릉(딩링), 명나라 신종 만력제의 능과 지하궁전

younghwan 2010. 7. 10.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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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경 팔달령 만리장성 남쪽에 위치한 명13릉 중에서 현재 능 내부가 개방된 3곳 중 하나로 다른 능에 비해서 규모가 커 보이는 정릉(딩링)의 봉분(?)과 지하궁전 내부의 모습이다. 중국 황제의 능은 조선의 왕릉과는 달리 봉분을 쌓아서 만든 것이 아니라, 원형의 작은 동산 형태를 하고 있다.

 이 곳 정릉(딩링)은 무덤의 모습의 자금성처럼 하나의 지하 궁전을 구현 놓았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능 전체를 높은 성벽으로 두르고 있으며, 입구에는 문루를 두고 그 안에는 수장자의 일생을 적은 비석을 세워 놓고 있다.

 현재 정릉(딩링) 내부는 발굴이 완료되어 일반에 공개되고 있는데, 문루가 있는 성벽을 계단을 따라서 걸어올라 능의 뒷편으로 돌아가면 지하궁전 내부로 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지하궁전 내부에는 여러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방마다 궁전의 방처럼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여러가지 집기들을 두고 있다.

 내부는 생각보다 크고 넓으며, 제일 뒷편에 황제의 관이 있었던 자리가 있는 방이 있으며, 앞쪽으로 여러가지 제기와 집기들이 있었던 여러개의 방이 있다. 벽화와 같은 장식은 거의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정릉(딩링) 문루 양쪽으로는 문루로 오를 수 있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 길을 통해 능의 지하궁전으로 들어갈 수 있다.


계단을 올라서면 중국 성곽의 일반적인 모습인 마차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넓은 통로가 있고, 병사가 이 곳을 지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성 바깥쪽으로 여장이 설치되어 있다.


계단 이외에도 능역 안쪽으로 들어올 수 있는 넓은 통로가 있다.


만력제의 지하궁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이 능 뒷편으로 들어가는 길. 능은 봉분이 아니라 작은 동산처럼 생겼으며, 그 위에는 향나무를 심어 놓고 있다.


향나무 숲 너머로 보이는 비석이 있는 문루


만력제의 정릉(딩링) 뒤쪽편. 능은 원형으로 성곽을 쌓은 구조로 되어 있다.


만력제의 지하 궁전으로 들어가는 길


만력제의 지하궁전 뒷쪽편에 해당하는 방으로 아마도 관이 이 곳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 돈을 던지며 복을 빌고 있다.


만력제 지하궁전 중앙에 위치한 방으로 각 방들과 연결되어 있다.


이 가운데 방에는 도자기로 만든 제기들과 황제가 앉는 의자가 마련되어 있다.


만력제 지하궁전 왼쪽편에 있는 방. 여러가지 기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만력제 지하궁전 오른쪽편 방.


만력제 지하궁전 출구. 이 곳을 개방하면서 만든 길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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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주익균(朱翊鈞), 묘호는 신종(神宗), 시호는 현제(顯帝). 만력제는 일종의 은둔자였으며 국정에는 태만했다. 그결과 중앙과 지방 관료들의 전횡과 부정부패가 날로 심해지고, 재정은 위기에 봉착했다. 특히 '만력 3대정(三大征)'으로 발생한 재정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만력제는 환관을 전국에 파견하여 광산을 열고 상세(商稅)를 징수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를 위해 파견된 환관의 가렴주구가 극에 달해 이른바 '광세(鑛稅)의 화(禍)','직용(織庸)의 변(變)'과 같은 민란이 전국적으로 발생했다. 또한 태자 책봉문제를 둘러싸고 동림당(東林黨)과 비동림당(非東林黨)의 당쟁이 격화되어 정치적 혼란도 더욱 심해졌다. 정치적·사회적 혼란을 배경으로 산시 성[陝西省]을 비롯한 북부 여러 성에서 농민반란이 발생했으며, 지방에는 유적(流賊)과 난민(亂民)이 대량으로 생겨났다. 이러한 현상은 만주족의 침입에 호조건으로 작용하여 마침내 만주족은 청(淸:1644~1911)을 건국하고 중국으로 쳐들어와 중국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한편 만력제 시기에는 서양 선교사들의 중국 진출이 눈에 띈다. 서양 선교사들은 그 이전부터 여러 차례 중국 진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1601년에 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만력제로부터 거주와 포교의 허가를 받음으로써 비로소 중국 진출에 성공했다. <출처: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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