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story Traveling

조선 관아

평택 팽성읍 객사, 조선시대 객사의 전형적인 모습

younghwan 2010. 9. 21. 15:40
반응형


 팽성읍은 평택남쪽 안성천 주변 넓은 평야지대에 자리잡고 있는 지역이다. 팽성은 원래 초나라 항우가 도읍으로 정했던 곳과 같은 이름으로 중국 중원에서 물류의 중심이 되는 지역으로 이 곳의 성격이 그 곳과 비슷하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팽성은 원래 평택현의 별칭으로 일제강점기에 경부선 철도부설로 인해 행정기능은 철도역부근으로 이전하기 전까지는 평태이라고 함은 이 곳 팽성을 말하는 것이었으나 지금은 시골의 조그만 소읍으로 팽성읍이 남게 되었다.

 평택현 관아 건물 중에는 현재 팽성객사와 평택향교만이 남아 있으며, 이 곳 팽성읍객사는 일제시대 이후에 양조장, 주택 등으로 사용되었다가 1994년 현재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고 한다. 객사 건물은 동.서헌이 3칸씩, 가운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신 중대청이 3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규모와 형태가 전국의 객사 중에서 가장 평균적이고 평범한 모습이라고 한다. 동.서헌은 이 지역을 여행하거나 출장을 온 관리들이 머무는 곳으로 방1칸과 연회를 할 수 있는 마루2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서헌과 중대청으로 이루어진 팽성읍객사. 조선시대 객사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지역을 방문한 관리들이 머무는 숙소로 사용되었던 동.서헌은 작은 방 1칸과 넓은 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이 곳 마루에서 주로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가운데 중대청.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셔두고 관리들이 예를 올린다고 한다. 이 곳 팽성객사처럼 그냥 방이 아닌 형태가 있고, 규모가 큰 객사에서는 중대청도 동.서헌처럼 큰 방으로 꾸며두는 경우가 많다.


가운데 솟을 대문을 한 문간채. 좌.우에 여러칸의 행랑채를 두고 있다. 아마도 이곳을 방문한 관리를 수행하던 사람들이 머물던 곳으로 생각된다.


평택 팽성읍 객사



 팽성객사는 조선 성종 19년(1488)에 크게 지었으며, 그 후로 2번의 수리를 거쳤다. 일제시대에는 양조장으로 바뀌었다가 주택으로 사용되었는데, 1994년 해체·수리하면서 옛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현재는 대문간채와 본채가 남아 있다. 본채는 전체 9칸으로 가운데 3칸은 중대청이고 양 옆에 동·서헌이 각각 3칸씩 있다. 중대청은 안에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시고 관리들이 한달에 두번 절을 하던 곳이다. 이곳은 지붕도 동·서헌보다 높여 건물의 격식을 높였다. 동·서헌은 다른 지방에서 온 관리들이 머물던 숙소로 사용되었다. 중대청과 대문의 지붕 꼭대기 양끝에는 용머리조각을 놓아 관리청으로서의 위엄을 나타냈다. 팽성읍 객사는 규모가 그리 크지 않지만,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객사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