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지역은 삼국시대 이래로 벼농사가 발달한 지역으로 우리나라에서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지역이다. 김제 벽골제를 비롯하여 논농사와 관련된 유적지가 있고, 구한말 동학혁명의 주요 무대였던 곳이기도 하다. 특이한 점은 넓은 평야와 풍부한 물산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에는 중요한 정치세력이 배출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김제관아는 넓은 김제평야 중심에서 가장 높다는 해발 40m의 성산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어며, 약 100m 거리 이내에 향교, 관아 건물이 몰려 있으며, 관아의 동헌과 내아가 온전히 남아 있어 조선시대 지방행정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하여 사적 482호로 지정되어 있다.
김제동헌은 김제군수가 업무를 보던 건물로 '근민헌'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앞면 7칸, 옆면 4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웅장한 건물로 조선후기 현종 때 세워진 건물이라고 한다. 이 건물에 쓰인 부재나 장식이 다른 관아에 비해서 좋은 것을 사용해서 그런지, 건축연대에 비해서 깨끗하고 튼튼해 보인다. 전국에 있는 동헌이나 객사건물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경우는 보통 건물을 읍사무소로 사용했던 경우가 많은데 김제동헌 역시 일제강점기 이후 읍사무소 건물로 사용해왔다고 한다. 현재 문화해설사의 설명에 따르면 최근까지는 식당 겸 결혼식장으로 사용했다고 하는데, 김제관아가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식당과 임대계약을 해지하느라고 상당히 애를 먹었다고 한다.
김제평야 중심의 낮은 언덕에 세워진 김제관아는 동헌인 근민헌, 작은 정자인 피금각, 지방수령의 살림집인 내아가 남아 있다. 근처에 김제향교가 있으며, 최근에 사적으로 지정된 이후 관아건물들이 있었던 부근을 정비하고 있다.
김제동헌 건물은 앞면7칸, 옆면4칸의 규모가 상당히 큰 건축물로 앞면은 전체적으로 똑같은 모양의 문짝을 달고 있으며, 건물내부에서 방들이 구분되는 것으로 보인다. 툇마루가 없고 건물은 전체적으로 지방관아의 동헌보다는 중앙관청의 건물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조선후기에 세워진 건물이지만 기둥이 온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상당히 좋은 자재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동헌에는 '근민헌'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 동헌의 이름은 원래 근민헌이었다가 숙종때부터는 사칠헌으로 불렀다고 한다. 현재의 현판은 2000년대에 김제관아가 사직으로 지정된 것을 기념하여 만든 것이하 한다.
문짝을 들어서 이 고리에 걸면, 전체적으로 개방된 느낌을 주게된다. 이 고리는 생긴모양새에 따라 돼지코라고 부른다고 한다.
팔작지붕이 보이는 김제동헌 옆면.
김제동헌 뒷쪽. 이 건물은 전체적으로 직사각형으로 단순한 형태를 하고 있다.
건물 서쪽편 2칸에는 온돌시설이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뒷쪽에서 본 김제동헌
김제동헌 근민헌
이곳은 조선시대 김제 고을의수령이 업무를 맡아보던 청사로 동헌이라 하였다. 김제동헌은 조선 현종 8년(1667)에 세원 근민헌이라 칭하여 오다 숙종 25년(1699)에 동헌을 고쳐지어 사칠헌으로 개명하였다가 일제강점기부터 1960년대 초까지 김제읍사무소로 사용되었다.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형태로 기둥.처마.지붕에 쓰인 부재나 장식이 장중하여 건물의 높은 품격과 관아의 위계를 볼 수 있다. 현조하는 관아 중 동헌과 내아가 함께 보존되는 경우가 매우 드문 예로서 역사적.학술적 가치를 높게 평가 받아 1007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근민헌이란 편액은 백성에게 가깝게 있는 관청이란 의미로 사적 지정을 기념하여 제작되었다. <출처:김제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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