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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관아

정읍 태인현 관아 동헌, 동학농민군이 마지막 결전을 벌이고 해산한 곳

younghwan 2010. 11. 21.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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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인현은 전북 정읍시 신태인읍과 태인면을 중심으로 주변은 면들을 포함했던 조선시대 고을 명칭이다. 지금은 작은 시골의 면소재지이지만, 통일신라시대 유학자 최치원이 이곳 태산군수를 지내는 등 유서깊은 고을이다. 태인현 관할 지역 중 칠보면에는 전북지역 유학의 중심지였던 신라의 유학자 최치원 선생을 모신 무성서원이 있고, 최치원 선생이 거닐던 연못에 세워진 호남제일의 누각이라는 보물 289호로 지정된 피향정이 있다.

 태인지역은 넓은 호남평아와 동쪽의 산악지역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헌 뒷편 성황산은 동학혁명에서 동학군이 마지막으로 진을 치고 집결한 곳으로 동학혁명의 마지막 격전지이기도 하다. 태인동헌은 동학혁명당시 농민군이 점령했던 곳으로 전봉준의 농민군 주력이 태인동헌 뒷산인 성황산전투에서 패하자, 이 곳에서 군대를 완전히 해산하였다고 한다.

 태인동헌은 조선 중종 때 처음 세운 건물이며 현존 건물은 구한말인 1816년에 지었다고 한다. 이 건물을 지은 목수는 전라감영 건물을 지은 유명한 목수였다고하며 현감을 꾀어 3천냥의 비용으로 자신의 솜씨를 발휘해서 잘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이 건물은 앞면 6칸의 크지 않은 건물로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단순하게 생긴 다른 지역의 동헌과는 달리 동쪽편 4칸은 대청마루로, 서쪽편 2칸은 온돌방으로 되어 있는다. 목수의 솜씨가 좋아서 그런지 건물의 크기에 비해서 웅장하고 궁궐 전각같은 느낌을 주는 건물이다. 조선시대 동헌 중 원형이 비교적 잘 보전되어 있다고 한다.


앞년 6칸의 이 건물은 조선시대 동헌건물의 원형이 잘 남아 있는 건물이라고 하며, 일제강점기부터 약 20여년전까지 태인초등학교 건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태인현 관아 건물 중에는 객사와 내아 등의 건물은 없어지고 동헌만 남아 있다고 한다.


태인 동헌 앞 마당은 구한말 동학농민혁명 당시 일본군과 관군에 패한 동학군이 마지막으로 군대를 해산한 현장이기도 하다.


태인 동헌에는 '청녕헌'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태인 동헌 건물 옆면을 보면 이 건물을 세운 목수의 솜씨가 잘 드러나 있는 동헌내 방에서 사용했던 다락방을 볼 수 있다.


동헌 건물에 세운 기둥도 솜씨있게 잘 가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붕을 받치는 공포가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세련되게 잘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헌출입문은 문루를 두고 있는 아문의 형식이 보통인데, 단순한 삼문의 형식을 하고 있다. 원래의 모습은 아닌듯 하다???


건물이 크지는 않지만 지붕과 천청을 약간 높게 만들어 다른 지방의 동헌보다는 웅장해 보인다.


동헌 뒷편에 있는 성황산은 전봉준 선생이 이끄는 동학군이 마지막으로 진을 쳤던 곳이며, 이 곳에서 일본군과 관군에 패하면서 동학혁명은 끝이 났다고 한다. 정면에 보이는 건물은 보물로 지정된 정자인 피향정이다. 이 피향정에는 탐관오리 조병갑이 백성들의 돈을 갈취해서 세운 그의 부친 조규수의 공덕비가 있다고 한다.


정읍 태인동헌

조선시대 태인현에 있던 관아 건물이다. 동헌은 현감의 사택인 내동헌과 공무를 집행하던 외동헌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보통 동헌이라 하면 외동헌을 말한다. 현재의 태인동헌은 중종(재위 1506∼1544) 때 건립되었고, 순조 16년(1816)에 수리한 것으로 보인다. 앞면 6칸·옆면 4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내부의 공간이 매우 다양한데, 오른쪽이 대청마루이고 왼쪽이 온돌방으로 되어 있으며 앞뒤로 퇴칸이 있다. 뒤쪽 퇴칸은 오른쪽 2칸을 대청보다 높은 마루로 꾸미고 나머지는 흙바닥으로 처리하였다. 이것은 동헌의 다양한 기능을 한 건물안에 모두 넣은 것으로 공간구성이 돋보인다. 이 동헌을 지은 사람은 1,000냥만으로 동헌을 지으려는 현감을 꾀어 3,000냥에 짓도록 하고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였다고 전한다. 태인동헌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동헌건물 중에서 규모가 큰 편은 아니지만,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건물이다. <출처:문화재청>

태인현은 삼국시대에 백제의 대시산군(大尸山郡)과 빈굴현(賓屈縣)이었다가 신라의 삼국통일 후 757년(경덕왕 16)에 태산군(太山郡:泰山郡 또는 大山郡)으로 개칭되었다. 고려시대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1018년(현종 9)에 고부군(古阜郡)의 속현이 되었다가 뒤에 현으로 강등되었으나 감무가 파견됨으로써 독립했다. 조선초인 1409년(태종 9)에 태산현과 인의현이 태인현으로 합병되었다.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5년에 전주부 태인군, 1896년에 전라북도 태인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폐합 때 태인군을 폐지하고, 태인군의 18개면을 8개면으로 폐합하여 정읍군에 병합했다. 군내면·인곡면·흥천면이 태인면으로, 동촌면·옹지면이 옹동면으로, 산외이변면·산외일변면이 산외면으로, 감산면·은동면·사곡면이 감곡면으로, 고현내면·남촌일변면이 칠보면으로, 산내일변면·산내이변면이 산내면으로, 서촌면·남촌이변면이 보림면으로, 북촌면·용산면이 용북면으로 통합되었다. <출처: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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