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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관아

남원 광한루, 한국을 대표하는 누각 중 하나 (보물 281호)

younghwan 2010. 11. 28.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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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한루는 조선 세종 때 명정승인 황희가 처음 세워 인조 4년(1626)에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이 광한루에 올라 멀리 그네를 타고 있는 춘향이를 바라보는 장면에 등장하면서 크게 유명해진 누각이다. 누각은 사방이 트여있어 주변의 훌륭한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장소로 주로 경복궁 경회루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누각이라 할 수 있다 . 누각은 주로 규모가 큰 고을의 관청에서 세운 것이 많으며,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 평양 부벽루가 가장 잘 알려진 지방의 누각이다. 주로 지역을 찾은 고위 인사들의 접대를 위한 공식적인 연회를 베푸는 장소로 많이 사용되던 곳이다.


 남원 광한루는 주변에 있는 아름다운 정원과 함께 오랜 세월동안 대표적인 지방의 명승지로 이름을 날린 곳이다. 다른 지역의 누각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강변의 수려한 경치를 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비해 남원 광한루는 인공 정원을 조성하고, 그 중심에 누각인 광한루가 자리잡고 있다. 광한루 정원에는 지금도 광한루 외에도 여러개의 크고 작은 정자가 자리잡고 있다. 근검과 절약을 강조하는 조선사회에서 광한루 정원이 오랜 세월동안 큰 규모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세종때 명재상으로 존경받는 황희 정승이 이 곳을 처음 조성했기때문에 후대에 많은 사람들이 광한루의 화려함에 대해서 시비를 걸 수 없었기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남원 광한루. 앞면 5칸, 옆면4칸의 팔작지붕을 한 누각과 동쪽편에 옆면2칸짜리 부속건물로 이루어진 한국을 대표한 누각 중의 하나이다. 광한루 앞의 인공정원과 함께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고 있다.


옆쪽에서 본 광한루. 광한루는 사면이 트여 있어, 지리산에서 불어오는 자연의 바람을 느끼면서 아름다운 정원을 감상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정면에 걸린 광한루 현판


광한루 누각 동쪽편에 2칸으로 달린 부속건물. 누각과는 달리 방으로 만들어 놓고 있어, 겨울에도 이 곳에서 행사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 건물에는 온돌시설이 되어 있다고 한다.


광한루는 바깥쪽에는 석재 기둥을 사용했으며, 안쪽에는 목재로 기둥을 세워놓아다.


광한루 마루 아래의 목재 기둥들


광한루 마루를 받치고 있는 기둥은 전면에는 화강석 석대 기둥을 사용했고, 전변을 제외한 바깥쪽은 석재위에 목재기둥을, 내부에는 목재 기둥을 사용하고 있다.


광한루 북쪽에는 칸이 있는 계단을 만들어 놓고 있는데, 이는 구한말 고종때 건물이 기우는 것을 막기 위해서 설치한 것이라 한다.


계단을 올라오려고 신을 벗고 있는 사람들


광한루 누각 내부. 상당히 넓은 마루로 아주 많은 사람이 참석하는 연회가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사방으로는 난간을 두고, 문을 달아놓고 있는데 이는 겨울에도 행사를 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으로, 연회의 목적도 있지만 통영 세병관이나 여수 진남관처럼 긴급 사태시 주위 고을의 수령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는 장소라는 목적도 있는 것 같다. 남원은 종3품인 부사가 수령인 도호부로 주위 10여개의 고을을 관할하는 역할도 있었다고 한다. 춘향전에 나오는 변사또는 사실 지방수령중에서도 상당히 직위가 높은 수령이며, 과거에 급제한지 얼마되치 않은 초짜 암행어사가 혼내줄 수 있는 직위가 아닌것으로 생각된다. 아마도 소설이기때문에 가능한 일이며, 이런 암행어사가 있었으면 하는 민간의 바램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누마루 기둥사이에 달아 놓은 문짝


계관桂觀이라고 적힌 현판과 광한루라고 적힌 큰 현판이 내부에 걸려 있다.


광한루를 다녀간 많은 사람들이 지은 글들이 적힌 현판들이 곳곳에 걸려 있다.


동쪽편 온돌방으로 들어가는 출입문


한쪽편에는 '호서제일루'라고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동쪽편 춘향사당 앞에서 본 광한루


광한루 앞쪽 연못에 있는 섬에서 본 광한루

누(樓)란 사방을 트고 마루를 한층 높여 자연과 어우러져 쉴 수 있도록 경치 좋은 곳에 지은 건물을 말한다. 이 건물은 조선시대 이름난 황희정승이 남원에 유배되었을 때 지은 것으로 처음엔 광통루(廣通樓)라 불렀다고 한다. 광한루(廣寒樓)라는 이름은 세종 16년(1434) 정인지가 고쳐 세운 뒤 바꾼 이름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정유재란 때 불에 탄 것을 인조 16년(1638) 다시 지은 것으로 부속건물은 정조 때 세운 것이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누마루 주변에는 난간을 둘렀고 기둥 사이에는 4면 모두 문을 달아 놓았는데, 여름에는 사방이 트이게끔 안쪽으로 걸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또한 누의 동쪽에 있는 앞면 2칸·옆면 1칸의 부속건물은 주위로 툇마루와 난간을 둘렀고 안쪽은 온돌방으로 만들어 놓았다. 뒷면 가운데 칸에 있는 계단은 조선 후기에 만든 것이다. 춘향전의 무대로도 널리 알려진 곳으로 넓은 인공 정원이 주변 경치를 한층 돋구고 있어 한국 누정의 대표가 되는 문화재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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