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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조선 유적_왕릉

예산 가야산 남연군묘, '2대에 걸쳐 왕이 나올 자리'라는 명당 (?)

younghwan 2011. 1. 5.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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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남의 대표적인 평야지대인 내포평야가 있는 예산지역 서쪽편에는 수덕사가 있는 덕숭산과 그 북쪽으로 보원사와 가야사라는 큰 절이 있었던 가야산이 있다. 그 중 가야산은 내포평야 중심이 위치한 산으로 북쪽으로는 보원사지, 서산마애석불이 있고, 서쪽으로는 해미읍성과 개심사가 자립 잡고 있는 지역의 명산이다. 

 이 가야산 동쪽편 기슭인 덕산지역에는 구한말 풍운아인 흥선대원군이 아버지 남연군을 이장할 명당자리를 찾다가, 이 곳 가야사 자리가 '2대에 걸쳐서 왕이 나올 자리'라고 하여 절을 불을 질러 없애버리고 그 부친의 묘소를 이장했다고 하는 명당자리라고 한다. 가야산 동쪽편에 자리하고 있으며 뒤편과 좌.우에는 산능선이 있고 앞쪽인 동쪽 방향으로는 틔어져 있는 전형적인 명당자리하고 한다. 실제로 그 자리에 올라서서 보면 풍수에 무지해서 그런지 그런 느낌을 받기는 힘들고, 유흥준씨가 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는 앞쪽의 뚫려있어 넓은 내포지역의 벌판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그런느낌이 들지는 않고, 오히려 수덕사 경내 마당에 올라서면 그런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실제로 자손이 2대에 걸쳐서 왕이되기는 했는데 그 왕이 나라를 망하게 했으니 명당으로 불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 곳이다.


남원군묘가 있는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마을은 가야산 등산로 입구라서 그런지 주말에는 자동차가 들어가지 못한다.


충남 내포지역의 명산인 가야산 자락 아래 남연군묘가 있는 마을입구. 이 곳에 남연군묘가 있음을 알려주는 커다란 비석이 우뚝 서 있다.


마을입구에서 조금 걷다보면 '남연군의 묘'라고 적힌 안내표지판을 볼 수 있다.


마을입구에서 이렇게 생긴 시골길을 500m 정도를 걸어서 올라간다.


멀리 언덕에 봉분이 보이기 시작한다.


남연군묘는 옛날 가야사라는 사찰의 탑이 있던 곳에 조성했다고 하며, 대원군이 부친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한 후 실제로 그의 아들인 고종이 왕위에 올라서인지 커다란 봉분처럼 만든 언덕위에 묘소가 위치하고 있다.


봉분이 있는 언덕을 올라가는 길


남연군묘는 크지 않은 봉분, 비석과 석물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간소하면서도 단정한 느낌을 준다.


남연군묘는 동쪽을 향하고 있는데 오른쪽에는 가야산의 주봉으로 보이는 산이 있다.


남연군묘 왼쪽으로는 백제고찰인 보원사지와 서산마애석불, 개심사 등이 있는 산이 내포평야지역을 산줄기를 뻗고 있다.


남연군묘에서 내려다 본 동쪽편 내포평야지역. 사방이 틔여 있다는 느낌보다는 아늑하다는 느김을 주는 장소이다.


남연군묘 앞에 있는 석물


석등에 새겨진 부조에는 대원군이 좋아했던 그림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숫양 석물


남연군의 묘


남원군묘 아래는 이곳에 있었던 큰 사찰인 가야사 옛절터라고 하는데 그런 느낌은 잘 오지는 않는다.

가야산 기슭에 현 남연군 묘소자리에 가야사가 있었으나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아버지 남연군을 이장할 명당자리를 찾았으나 가야사 자리가 명당자리라는 것을 알고 가야사를 불지르고 그 곳에 남연군묘를 쓴 것이다. 이 곳에는 보원사지보다 큰 불교문화재가 있다는 것으로 충남도는 이 곳을 도지정 기념물 150호로 지정.관리하고 있다. <출처:예산군청>


마을입구와 남연군묘 입구에 서 있는 비석


덕산지역에서 본 남연군묘가 있는 가야산 골짜기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이구의 무덤이다. 높은 언덕에 밴구형 봉분이 크게 자리잡고 있으며, 앞으로 석물과 비석이 서 있다. 원래 경기도 연천 남송정에 있던 무덤을 1846년에 이곳으로 옮겼다. 이하응은 풍수지시설을 믿고 남연군의 무덤자리를 찾기 위해 지사 정만인에게 부탁하였는데, 그는 지금의 자리를 '2대에 걸쳐 왕이 나올 자리'라고 지목하였다. 이곳에는 가야사라는 절이 있었고 원래 묘자리에는 탑이 있었는데, 대원군은 절을 없애고 남연군의 묘를 옮겼다. 묘를 옮긴지 7년 후 차남 명복을 낳았는데, 철종의 후사가 없어 가까운 종손인 명복이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니 그가 고종이다. 1866년 독일상인 '오페르트'가 남연군의 묘를 훼손하였는데 관에는 미치지 못한 채 돌아갔다. 이 사건은 국내외에서 커다란 비난을 받았고, 대원군은 쇄국과 천주교 탄압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출처:예산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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