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유학자로 일제에 항거하다 대마도에 유배되어 세상을 떠난 면암 최익현 선생의 출신지역이 포천인 관계로 포천시 신북면에는 그를 기리는 사당인 채산사가 마을 뒷편 언덕에 세워져 있다. 구한말 대표적인 유학자인 이항로의 제자로 이른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정부 고위관직을 두루 역임했다.
현재의 사당은 일제강점기가 끝난 1947년에 세워진 것이라고 하며, 일제강점기 이후에 사당이 세워진 많지 않은 인물 중 한사람이다. 그의 사당 뒷편으로는 경주최씨의 시조라 일컫어도 무방한 통일신라시대 유학자인 최치원 선생을 모신 사당이 청성사가 있는데, 이는 아마도 이 지역에 경주최씨 집안 사람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라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채산사 사당 출입문이 삼문. 오래된 사당으로 보이지만 일제강점기가 끝나 1947년에 세워진 것이라 한다.
사당은 앞면 3칸에 겹처마를 하고 있는 맞배지붕 건물이다. 사당 이외에는 재실 등 부속건물이 들어서 있지는 않다.
채산사 사당 앞 마을 풍경
채산사 전경
최치원을 모신 사당인 청성사를 올라가는 길에서 보이는 채산사
채산사,
채산사는 조선말기의 유학자이며 의병장으로 일제에 항거하다 대마도에 유배되어 세상을 떠난 면암 최익현 선생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고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다. 자는 찬겸이다. 최익현은 철종6년(1855) 문과에 급제하여 장령, 동부승지, 공조참판, 공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공조판서 때 고종이 직접 정사를 돌봐야 한다는 친정을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려 대원군이 정권에서 물러나도록 한 사건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광무9년(1905) 일본이 강제로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자, 이에 반대하는 의병운동을 전라도 순창에서 일으켜 항거하였으나 체포되어 일본의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유배된 후 왜국의 곡식을 먹을 수 없다 하여 단식을 한 끝에 세상을 떠났다. 후에 지역의 유생들이 최익현의 뜻을 기리고자 1947년 사당을 다시지었고 1975년에 보수가 이루어 졌다. <출처:포천시청>
마을 뒷편 언덕에는 경주최씨 시조에 준하는 인물인 통일신라시대 유학자 최치원을 모신 사당인 청성사가 있다. 최치원을 모신 곳은 전북 태인의 무성서원을 비롯하여 여러곳이 있다.
사당 출입문인 삼문. 보통 사당을 건립할 때는 서원과 함께 세우는 것이 보통인데, 이 곳에는 사당만이 있다.
앞면 3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사당 건물
청성사에서 내려다 보이는 마을 풍경
청성사 전경
청성사,
통일신라 말기의 학자인 고운 최치원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다. 최치원은 신라 경문왕 9년 당나라에 유학하여 당나라 과거에 급제한 후 당나라 선주의 표수현 현위를 거쳐 승무랑.시어사.내봉공이 되었다. 879년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토황소격문>을 지어 붓으로 적을 물리친 뛰어난 글솜씨가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헌강왕 11년(885) 귀국하여 아찬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신라 진성여왕8년(894) <시무10조>를 올려 이를 시행케 했으나, 난세를 비관하여 관직을 버리고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여생을 마쳤다. 글씨를 잘 썼으며, 그가 쓴 <난랑비서문>은 신라 화랑도를 해설해주는 귀한 사료이다. 고려 현종 땐 내사령으로 벼슬이 높아 졌으며, 문창후에 봉해졌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평면 규모를 가지며 지붕은 맞배지붕에 겹처마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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