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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조선 유적_왕릉

홍성 성삼문선생 유허, 선생이 태어난 외가 마을

younghwan 2010. 12. 26.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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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남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마을에 위치한 성삼문선생 유허이다. 이 마을은 선생의 외가가 있었던 곳으로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아이를 낳았느냐"고 하늘에서 세번 물었다는 성삼문선생 출생의 고사가 담긴 장소이다.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반대하다가 처형된 까닭에 선생이 태어난 집은 아직까지 남아 있지는 않지만, 그 집터는 오늘날까지 전해내려오고 있다.

 이 곳에서는 조선후기 숙종때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던 노은서원이 있었다고 하며, 우암 송시열 선생이 비문을 지은 휴허비와 노은서원에 모셨던 위패를 묻은 노은단이 유적지임을 말해주고 있다. 노은서원은 구한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지고 대신 위패를 묻은 노은단과 최근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사당인 '숭문사'가 그 자리에 남아 있다. 부근에는 성삼문선생의 외손자인 엄찬이라는 사람이 살았던 고택이 남아 있는데 아마도 선생을 모시기 위해서 이곳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크게 눈에 띄는 유적은 없지만 집현적 학자로서 한글을 창제하고, 세종때의 많은 업적에 큰 기여를 했으며, 사육신의 한사람으로 곧고 바르게 살았던 선생의 발자취를 한번 생각해 본다는데 의의가 있는 것 같다.


홍성 홍북면 노은리 성삼문 선생의 유허에는 집터와 서원이 있었던 자리와 뒷편의 노은단이 눈에 띄게 보인다.


선생이 태어난 집터 길가에는 두개의 유허비가 보인다. 비각 안에 있는 유허비는 숙종때 송시열이 세운 유허비가 있다.

성삼문선생 유허비
이 곳은 성삼문 선생의 유허지이다. 선생은 태어날 때 하늘에서 "아이를 낳았느냐"고 세번 물은 일이 있어서 이름을 삼문이라고 하였다. 성삼문 선생은 조선 세종 때의 학자로 자는 근보, 호는 매죽헌이다. 1456년(세조2년)에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1668년에 민유중이 홍주 관찰사로 왔다가 선생이 살았던 유허를 돌아보고 선생이 태어난 노은동에 돌로 추모의 표시를 하였는데, 뒤에 송시열이 유허비를 세우게 되었다.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김진상이 썼다. <출처:홍성군청>


지금은 공터로 남아 있는 성삼문 선생이 태어난 집터. 아마도 이곳에는 조선후기에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웠던 노은서원이 있었던 자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뒤동산에는 사당처럼 출입문처럼 생긴 삼문이 보이는데 이 곳은 구한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서원이 헐릴때 사당에 모셨던 사육신 위패를 묻은 노은단이라고 한다.


위패를 묻은 노은단은 마치 사람의 무덤처럼 봉분을 만들어 놓고 있다.


노은단을 올라가는 계단길


노은단 출입문


노은단 올라가는 길에는 숭문사라는 큰 사당이 있는데 아마도 70년대에 세워진 사당이 아닐까 생각된다.


'숭문사'라고 한글 현판이 걸려 있는 앞면 3칸의 맞배지붕을 한 이 사당은 현충사처럼 전형적인 70년대 사당의 모습을 하고 있다.


노은단에서 내려다 본 숭문사


성삼문선생 유허

성삼문선생 유허
성삼문 선생의 외할아버지 고택이 있던 곳으로, 이곳에서 선생이 출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선생의 자는 근보, 호는 매죽헌이며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1676년에 이옥량이 선생 등 사육신의 절의와 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여기에 사우를 세우고 녹운서원이라 임금으로부터 이름을 받았고 뒤에 노은이라 부꾸어불렀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에 헐리게되니 유생들이 사육신의 위패를 묻고 노은단이라는 단을 세우고, 매년 음력 10월15일에 제향을 하고 있다. <출처:홍성군청>


성삼문선생 유허 동쪽편 마을 언덕에는 선생의 외손자인 엄찬이라는 사람이 살았던 고택이 남아 있다. 선생의 후손으로 선생의 제사를 올리는데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런 연유로 해서 이 고택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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