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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터

부여 왕흥사지, 낙화암 건너편 백마강변에 자리잡은 백제의 옛 절터

younghwan 2011. 2. 9.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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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 왕흥사지는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던 사비성 부소산성 낙화암에서 보면 백마강 건너편에 자리잡고 있는 백제의 옛 절터이다. 삼국사기를 비롯한 여러 문헌에 이 사찰에 대한 여러 기록들이 남아 있었던 사찰이다. 지금은 남아 있는 흔적이 그리 많이 남아 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여러 차례의 발굴 조사에 의해서 기와편을 비롯하여 여러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문헌상으로만 알고 있었던 이 사찰의 존재는 일제강점기인 1934년 왕흥이라고 적힌 기와편이 현재의 절터에서 출토됨으로써 이 곳이 옛 왕흥사 절터임이 세상에 알려졌다.

 왕흥사는 백제의 수도 사비성 왕궁이 있었던 부소산성과 백마강을 경계로 마주보고 있는 지역에 자리잡고 있으며, 백제의 사비성 시절에 도성과 가까운 중요한 사찰이었다고 한다. 왕궁에서 나룻배를 타고 백마강을 건너면 바로 찾아갈 수 있는 중요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어 누가 보아도 왕실과 관련된 사찰이었음을 느낄 수 있다. 왕흥사의 가람배치는 목탑, 금당, 강당이 일렬로 배치된 형태로 1탑 1금당의 가람배치라고 할 수 있다. 현재도 발굴작업이 진행되고 있는데 옛절터의 건물터를 구분하는 작업이 진행중인 것으로 보인다.


옛 백제의 왕성인 부소산성 맞은편 낮은 야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왕흥사지. 발굴작업이 현재까지 진행중인 곳이다.


옛 왕흥사 가람배치의 근간이 되는 목탑, 금당, 진입로 터가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왕흥사지 발굴 현장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목탑터와 금당터가 상당히 넓게 잡혀 있다. 백제 사찰은 그 규모가 현재의 사찰에 비해서 상당히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 형태에서 일본 나라의 동대사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준다.


사찰 뒷편 강당이 있었던 건물터


목탑과 금당을 중심으로 한 사찰 중심영역 동쪽편 터.


왕흥사 서쪽편 회랑과 건물터. 아직 발굴과 정비작업이 완료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왕흥사지 발굴현장 통행로


발굴현장 한쪽편에 모아 놓은 옛 왕흥사 절터에서 출토된 기와편와 석재들


이 기와들 중에서 왕흥이라고 적힌 기와편이 발굴되어 왕흥사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주춧돌 등으로 사용된 석재. 석재의 가공수법이 상당히 세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왕흥사 절터 입구에 파 놓은 연못


왕흥사에서는 바로 눈앞에 백제의 왕궁이 있었던 부소산성과 낙화암이 보인다.


왕흥사지 발굴현장 안내.



부여 왕흥사지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문헌에 창건(법왕 2년, 600)과 낙성(무왕 35년, 634) 관련 기사가 수록되어 있는 백제시대의 중요한 사찰유적으로 1934년 충남 부여군 신리 일대에서 왕흥명(王興銘) 기와편이 수습되어 신고됨에 따라 이 지역을 ‘왕흥사’의 위치로 비정하였다. 이후 왕흥사의 중요성이 인정되어 1982년에 충청남도 기념물 제33호로 지정되었으며 2001년에 사적 제427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는 2000년부터 연차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2010년 현재 11차 발굴조사를 시행중에 있으며 발굴조사 결과 목탑지, 금당지를 비롯하여 동,서회랑 및 동,서건물지, 강당지 및 서편부속건물지 등 사역 중심부의 건물지들을 확인하였으며 사역의 축대인 동서석축, 진입시설인 남북석축과 사역 동편 외곽의 백제~고려시대 기와가마터가 확인되었다. 2007년 제8차 발굴조사 중 사리공 내부에서 금제사리병, 은제사리호, 청동사리합의 3중구조로 안치된 사리기가 출토되었다. 청동사리합 동체 외면에는 상·하 양단에 2줄의 음각선을 돌리고 그 안으로 5자 6행 29자의 명문이 음각되어 있었으며 그 내용은 “丁酉年(577) 2월 15일 백제왕 창(昌)이 죽은 왕자를 위해 탑(또는 사찰)을 세우고 본래 사리 2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왕흥사의 창건과 관련된 내용으로 문헌기록과 차이를 보여 왕흥사 창건시기를 밝히고 나아가 문헌 속 백제사에 대한 재검토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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