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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터

경주 황룡사지, 찬란한 통일 신라 문화를 과시했던 흔적

younghwan 2010. 10. 5.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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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의 수도 경주에는 많은 화려한 당시의 유적지와 유물들이 남아 있지만 많은 것들은 지금은 사라져 버리고 없다. 사라진 많은 것들 중에서도 가장 아쉬운 부분이 경주에 황룡사가 아직도 남아 있었더라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현재 기준으로도 20층 가까운 높이의 황룡사 구층목탑은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서 없어져 버리지기 전까지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경이로움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황룡사 금당이라던가 목탑의 형태는 지금도 일본 나라의 사찰들에 그 형태가 남아 있는 것 같아서 그 사찰의 모습으로 당시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황룡사를 보면서 당시 사람들은 
고대 사람들이 피라미드나 바빌로니아의 하늘 정원 등을 보았을 때의 느낌과 비슷할 것으로 생각된다.


1. 황룡사 중문, 남문, 회랑 터

백제 미륵사지와 함께 신라를 상징하는 거대한 사찰인 황룡사지 출입문인 남문과 중문이다. 황룡사의 규모에 걸맞게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으며, 지금은 주춧돌만 남아서 황량한 옛 도읍의 의미를 던져 주고 있는 곳이다.

황룡사 입구인 남문터와 중문 좌우의 회랑터

2. 황룡사지 구층목탑, 종루, 경루

신라 제일의 보물이었던 황룡사 구층목탑이 있었던 자리입니다. 경주 중심가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으면서 천년 가까이 이정표 역할을 했던 거대한 목탑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경주를 처음 방문한 사람이 황룡사 구층목탑을 처음 봤을 때 감동은 우리가 파리에 갔을 때 에펠탑은 보고 느끼는 감동보다 훨씬 웅장한 감동을 느꼇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황룡사 목탑 앞 좌우에 있었던 종루와 경루. 종루에 걸렸있었던 종은 당시에 가장 규모가 컸었던 동종이었다고 한다.

3. 황룡사지 금당터

황룡사 구층목탑 뒷편에는 본당이라고 할 수 있는 금당이 자리하고 있으며, 금당에는 거대한 불상인 장륙존상과 솔거의 그림이 있었다고 한다.

황룡사 금당터 중앙에는 세개은 커다란 석재 받침대가 있는데 이 것이 거대한 장륙존상을 비롯한 삼존불상을 받쳤던 받침돌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황룡사 본당 좌우에 있었던 금당터

황룡사 금당과 비교할 수 있는 건물로 생각된 일본 나라의 동대사 본당 건물이다. 세계에서 제일 큰 목조건물이라고 자랑하는 건물이고 하며, 내부에는 거대한 불상이 자리잡고 있고 역시 회랑으로 둘러져 있다. 황룡사 금당에 대한 설명 분위기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곳으로 황룡사의 규모를 상상하는 데 참조가 될 것 같다.

4. 황룡사지 강당터, 우물

경주 황룡사지에서 제일 뒷쪽편에 있는 강당터이다. 신라 평지 사찰의 특징으로 강당이 본당인 금당 뒷편에 자리잡고 있다는 점으로 현재의 사찰에서 강당은 본당이 있는 경내 입구에 누각의 형태로 존재하는 경우와 많다. 황룡사 강당에서는 원효대사 등 당대의 유명한 승려들이 설법의 강의했던 역사적 의미가 큰 장소이기도 하다.

황룡사 강당 뒷편에 있던 우물. 최근에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황룡사 강당 뒷편 분황사 가는 길에서 발견된 건물터

황룡사지에서 발굴된 석조 유물들. 아직 분류되지 않은 유물을 한 곳에 모아 놓고 있다.





사적 제6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553년(진흥왕 14) 월성(月城)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지으려고 할 때 황룡이 나타나자 그곳에다 황룡사라는 절을 짓기 시작했으며 574년에는 장륙존상(丈六尊像)을 만들어 안치하고, 584년(진평왕 6)에는 금당을 건립했다고 한다. 645년(선덕여왕 14)에는 목탑을 세웠고, 그뒤 몇 차례 중건되면서 고려시대까지 국가왕실의 보호 아래 호국사찰로서 숭앙되었으나 1238년(고종 25) 몽골 침입으로 모두 불타버리고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다. 이 절터는 문화재연구소 주관으로 1976년 6월부터 1983년 12월까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보고서에 의하면 총면적 약 2만 여 평에 중문(中門)·탑·금당·강당이 남북으로 길게 늘어선 일탑식가람배치(一塔式伽藍配置)로 알려졌으나, 금당의 좌우에 거의 같은 규모의 건물이 나란히 있고 탑 앞쪽에도 역시 좌우에 종루(鐘樓)와 경루(經樓)로 보이는 건물이 대칭으로 서 있는 독특한 가람구조였음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이 건물들은 회랑(回廊)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특히 남회랑이 동·서 회랑보다 더 길게 연장되어 있고, 이 남회랑이 끝나는 곳에서 다시 북쪽으로 긴 건물지가 연결되어 있는 점 등에서 회랑이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고 독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특이한 가람배치는 〈삼국유사〉에도 보이듯이 황룡사가 1, 2차에 걸쳐 가람이 형성되었다는 사실과도 일치된다. 현재 절터는 민가와 경작지로 변하여 흔적만 남아 있지만, 특히 신라3보(新羅三寶)인 장륙존상과 9층목탑이 있었던 석조대좌와 심초석이 남아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 황룡사는 삼국시대에 가장 큰 규모의 절로 신라 불교수용 초기에 지은 흥륜사(興輪寺)와 함께 6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왕실사찰이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인도에서 전래된 상을 모본으로 만든 장륙존상이나 9층탑에 대한 전설, 가섭불이 앉았던 연좌석(宴坐石)의 기록 등에 의해서 신라가 석가탄생 이전부터 불교와 인연이 깊은 불국토(佛國土)였음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신라불교 문화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출처: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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