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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터

양주 회암사지, 조선 최대 사찰에서 폐사지로 변해버린 무학대사가 수도했던 곳

younghwan 2010. 10. 1.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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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주 회암사는 태조 이성계의 정신적 지주이자 한양천도에 관여했다고 잘 알려진 무학대사가 주지로 있었던 사찰로 조선전기에는 전국에서 제일 규모가 큰 사찰이었다. 인도에서 온 고승 지공선사와 회암사를 크게 중창한 고려말 고승 나옹선사, 그리고 무학대사가 회암사를 대표하는 고승으로 절터 뒷편 현 회암사가 있는 곳에 그분들의 부도탑이 남아 있다.

 회암사 규모에 대해서는 목은 이색이 쓴 '목은집'에 그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하는데, 262칸의 건물에 거대한 불상 7구를 모시고, 3천여명의 승려들이 이 사찰에 머물렀다고 한다. 양주 회암사에는 태조 이성계가 왕위를 양위한 후 이 곳에서 머물렀으며, 세종대왕의 형인 효령대군도 이 곳 회암사에 머물면서 불교 공부를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가 또한 이 사찰을 크게 넓혔으며, 조선시대 불교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명종때 문정왕후의 후원으로 크게 번창했었다고 한다. 문정왕후 사후 새로운 신진세력의 사림들이 주류세력으로 확고히 자리잡으면서 대표적인 억불정책으로 상징적인 사찰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사찰을 폐사시킨것으로 보인다.

 회암사 절터를 보면, 양주 천보산자락이 평지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상당히 부지가 넓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지를 조성하고 건물을 세우는 방식을 살펴보면 전통적인 사찰의 가람 조성 방법과는 약간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현재 절터에는 많은 축대와 계단 등의 구조물이 남아 있는데, 그 모습이 궁궐 건축과 비슷한 양식으로 보인다. 또한 가람의 배치는 통일신라시대 사찰의 배치 형식인 불상을 모신 금당이 앞쪽에 있고 뒷쪽에 강당을 두고 있다. 태조 이성계가 머물기도 했으며 왕실인사들이 이 곳에 많이 방문해서 그런지 행궁의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으며, 사찰에 많은 요사채 건물을 두고 있어서 손님들이 많이 머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궁궐터같은 느낌을 주는 양주 회암사지 절터. 조선시대 절터라서 그런지 건물은 남아 있지 않지만, 건물들이 서 있던 자리에 있었던 석재로 만든 축대가 많이 남아 있다.


사찰의 중심건물인 보광전이 있는 영역. 보광전은 통일신라시대 사찰의 금당을 연상시키는 형태로 상당히 큰 불상을 모시고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보광전 서쪽편으로 천당과 서승당이 있었고, 동쪽편으로 요사채로 쓰인 건물터가 있다.


중심불전인 보광전 터. 축대를 쌓은 것이 궁궐 건물의 축대를 쌓은 것과 비슷해 보인다.


보광전 뒷편으로는 강당 역할을 한 설법전을 중심으로 양쪽에 불전인 조사전과 영당이 있었고, 그 양쪽으로 고위 인사가 머물렀을 것으로 보이는 요사채인 수좌료와 서기료가 있었다고 한다. 특히 동쪽편 끝에 위치한 서리료는 규모가 큰 요사채 건물이었다. 그리고 설법전과 보광전 사이에는 작은 요사채 건물인 지장료와 향화료가 있었다고 한다.


회암사 절터 제일 뒷쪽편 가운데에는 사찰 사무소 역할을 하는 정청, 동방장, 서방장이 있고 그 양쪽으로 불전인 대장전, 나한전이 있었으며 정정 앞에는 사리전과 요사채인 입실료, 시자료가 있었다고 한다. 사찰 곳곳에 있는 많은 요사채 건물들이 왕실을 지원을 받는 사찰로 많은 고위 인사들이 찾는 사찰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찰 제일 뒷편에 위치한 회암사지 부도


회암사지에 있는 안내표지판에는 중심불전인 보광전 앞쪽에 있는 건물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는데 이는 이 건물들이 조선시대에 증축된 것이라 이색의 '목은집'에 그 모습이 묘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건물터 모습으로 볼 때 상당히 많은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회암사에는 2개의 출입문이 있었다고 하며, 현재의 건물터 모양을 보면 상당히 많은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회암사 첫번째 출입문이 있었던 곳. 축대를 쌓아서 부지를 조성해 놓고 있는데 넓은 마당이었던 것 같다.


회암사 두번째 출입문이 있었던 영역.


회암사가 시작되는 첫번째 축대. 사찰입구임을 알려주는 당간지주가 있는 곳부터 축대를 쌓아서 마당을 조성해 놓고 있다. 전국 제일규모의 사찰답게 행사가 많아서 넓은 마당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회암사 당간지주와 주변의 넓은 마당


계간과 축대에 모습에서 궁궐건축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많이 주고 있다.


회암사 가람배치도. 이색의 '목은집'에서 묘사된 대로 작성한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는 이 그림에서 묘사되지 않은 많은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입구에서 본 양주 회암사 절터


회암사 절터 뒷편에 있는 무학대사 홍융탑, 지공선사 부도, 나옹선사 부도




회암사의 역사
 회암사의 창건에 관한 기록은 아직 발견된 것이 없지만, 고려 명종 4년(1174) 금나라 사신이 들렀다는 문헌기록이 남아 있어 적어도 12세기 중엽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초기에는 현존하는 가람보다 소략한 규모였며 현재 남아 있는 대규모의 가람은 이후 중창된 것이다.
회암사의 중창과 중흥의 배경에는 유명한 고승들과 왕실의 후원이 있었으니, 고려말에는 인도의 고승 지공이 회암사를 주목했고 그의 제자 나옹에 의해 대대적인 중창이 이루어졌다. 조선 초에는 태조의 정신적 지주였던 무학이 회암사의 주지로 재임하였으며, 이성계 본인도 태종에게 왕위를 양위한 후 회암사에서 기거하였다. 또한 세종대왕의 형인 효령대군도 이곳에서 불도에 정진하였다. 이런 까닭에 숭유억불이 조선의 건국이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회암사는 왕실의 비호 아래 조선 최대의 사찰로 그 위명을 이어갈 수 있었다.

 고려말 대학자인 목은 이색의 '목은집'에는 당시 회암사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는데,3천여명의 승려가 머무르는 대사찰로 건물은 모두 262칸이며 높이 15척의 불상 7구와 10척의 관음상을 모셨다고 한다. 건물들이 크고 웅장하고 아름답고 화려하기가 동국제일이며, 중국에서도 이러한 사찰을 찾아보기 힘들 것이라고 기록하였다.

 이처럼 당당하였던 회암사의 위세는 문정왕후 사후 급격하게 쇠퇴하였다. 그러나 창건 기록과 마찬가지로 폐사에 관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폐사 시기는 알 수 없으며, 관련문헌과 발굴결과로 추정해 보았을 때 1566년부터 1595년 사이 유생들에 의해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1997년부터 시행된 발굴 성과를 살펴보면 조선시대 궁궐건축에서 주로 사용하였던 용봉 문양 막새, 청기와, 잡상 등이 출토되었으며, 왕실에서 사용하였던 광주 관요의 백자도 다수 출토되었다. 또한 8단지의 화계나 정청은 궁궐 건축 양식과 유사하여 회암사가 조선초기 행궁으로서의 역할을 함께 하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출처:양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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